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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0화 (10/155)

00010  2. 검은 탑.  =========================================================================

아, 난 드디어 악당의 본거지에 발을 들인 것일까? 문제는 내가 정의의 히어로가 아니라 단지 포로의 신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저씨, 도망치라고요?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요. 나는 아찔하게 솟은 탑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동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높은 곳에서 곤두박질친 듯한 충격이 느껴지고 난 잠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어지럼증에 비틀거리다가 기댄 상대가 마스터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내 정신도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자지러질 듯이 놀라며 사죄한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리고 난 지금, 거대한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은 온통 뿌연 운무가 깔린 평원이었다. 둔덕 없이 곧게 뻗은 지평선은 흐릿한 안개에 젖었고, 그 가운데 온통 검기만 한 탑이 존재감을 알리듯 우뚝 솟아 있었다. 부피로 따지자면 흡사 요새와 같았고, 세로로는 하늘을 뚫을 것 같은 기세였다.

성경에 나온 바벨탑이 이러했을까? 눈앞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검은 탑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짓누른다. 드높은 산봉우리를 앞둔 양 마치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간의 손으로 이러한 탑을 건축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중세시대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 여겼던 문명도를 단숨에 넘어서는 이 탑은 내가 사는 세계에서도 짓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감탄과 외경이 섞인 탄식이 입에서 저절로 새어나왔다.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암만 높아진다 해도 이 탑은 살아남으리라. 게다가 뭐로 칠했는지 겉이 온통 시커먼 것이 척 봐도 누구 취향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앞서 가는 마스터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뭐지.”

“아뇨, 아무것도.”

눈치가 빠르기도 하시지. 배시시 미소로 얼버무리며 난 열심히 마스터의 뒤를 따랐다. 탑까지의 거리는 약 500미터 남짓 되어 보였다. 딱히 길이 나 있진 않았지만 걷기는 나쁘지 않았다. 곳곳에 작은 관목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고 얕은 잔디가 깔려 있어 딱 도시락 먹기 좋아 보였다. 이곳에 머물게 된다면 날씨가 흐리긴 하지만 기온은 약간 서늘한 정도이니 피크닉을 와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같이 올 사람이 없구나. 약간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피크닉이고 자시고 난 지금 악독한 간수들이 바글거리는 무시무시한 감옥에 발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암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진지해졌다간, 끝없이 땅굴만 파게 될 것 같아 모험을 떠나는 양 저절로 가볍게 생각하게 된다. 긴장감이 지나치게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바짝 굳어서 심력을 소진해도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도는 별반 없다. 도망치려면 여관의 결계가 풀렸을 때 진작 시도했어야 했다.

저 거대한 탑에는 나 말고도 네 명의 다른 제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마스터와 저 남자를 보았을 때 제정신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제오늘 같은 일들을 계속 겪으면 수명이 줄어서 1년도 채 못살지도 모른다.

탑에 가까이 다가가자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까맣다고 생각한 탑의 표면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검은 수정처럼 반들반들했고 그래서 감옥 같다기보단 오히려 신비로운 느낌이 강했다. 고대의 유적지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입구의 문 역시 광택 나는 검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관문처럼 워낙 크고 묵직해 보여 저 문을 열 수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문은 마스터가 그앞에 다가선 즉시 자동으로 열렸다. 기름칠이라도 칠한 양 소리 없이, 기꺼이 주인을 맞이하듯 활짝 벌어진 입구로 마스터가 먼저 들어섰고 그다음 남자의 뒤를 따라 나 역시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대낮이라지만 안개 자욱한 밖과 달리 안은 무척 환했다. 정면에는 벽이며 바닥에 온통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진 탁 트인 홀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서 있는, 흰옷을 입은 누군가가 보였다. 나는 매끄러운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그 사람을 넋을 빼고 바라보았다. 흡사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이 눈이 부셨다. 가볍게 흔들리며 굽이치는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햇살이 내리쬐는 녹색 잎사귀를 연상시켰고, 눈처럼 흰 피부는 숨결이 닿으면 녹아내릴 듯이 고왔다.

천사라 표현해도 무색할 만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입에서는 옥구슬 구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올 듯했고, 숨결에서는 향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내 생애 이런 미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예쁘기로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 줄줄이 세워놔도 이 사람 발치도 따라가지 못할 듯싶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기보단 신의 손끝으로 자아낸 조각품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돌아오셨습니까, 마스터.”

윽,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가 약간 깨긴 하지만 너무 완벽하면 사람 같지 않으니 그런 점이 오히려 더 매력이었다. 살짝 미소 짓는 얼굴에 나는 황홀감마저 느꼈다. 그때 상대가 넌지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모양 좋은 입매가 삐뚜름하게 뒤틀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내 환상을 와장창 깨부수기에 족했다.

“이 멍청한 녀석은 뭡니까?”

비웃듯이 고개를 갸우뚱해 보인 그 사람은 신랄하게 말을 쏘아냈다.

“실험용? 그 외엔 별달리 쓸모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군요.”

……역시 악의 소굴에 천사가 있을 리 없지. 난 금세 호의적인 평가를 바닥으로 깎아내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새로 맞이한 제자다.”

나를 소개하는 마스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상대는 기분 나쁜 소식을 전해 들은 양 미간을 찡그렸다. 불쾌감이 역력히 드러난 눈으로 상대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대놓고 무례한 태도에 난 당황스러운 나머지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이윽고 나에 대한 관찰을 마친 듯 상대는 비아냥거리며 품평을 꺼냈다.

“조금도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별반 재능도 없는 듯하고……. 더군다나 여자가 아닙니까.”

같은 여자이면서 왜 저런 발언을. 그러다 난 문득 상대의 시선이 나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굳이 가늠할 것 없이 여자라기엔 큰 키였다. 설마 생김새가 모호할 뿐 남자인 건 아니겠지? 골격은 확실히 여자라기엔 굵었고, 목젖은 옷깃을 높이 세우고 있는 터라 확인할 수 없었다. 불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내 감은 그가 남자라는 쪽에 기울어갔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마스터는 냉정하기 그지없이 녀석의 말을 잘랐다. 녀석을 굴하지 않고 조금 더 진해진 비웃음을 입가에 띠며 날카로운 투로 말했다.

“굳이 제자가 필요하시다면,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워 오는 것보단 탑 내에서 골라 양성하시는 편이 나을 텐데요.”

말이며 태도에서 묻어나오는 노골적인 적의가 가슴을 찔러 드는 듯했다. 단순히 텃세라기보단,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상대는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는 데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마음을 좋게 먹는다 쳐도 쓰레기 운운하는 모욕은 좀처럼 들어 넘기기 힘들었다. 울컥, 뱃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밀려 올라온다. 내 머릿속에선 저 반반한 면상을 주먹으로 갈겨주는 상상이 짧은 시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블레셋.”

경고하듯 그의 이름이 불리고 마스터가 냉혹한 눈빛을 던지자 녀석은 눈에 보일만치 흠칫 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도 마스터에 대한 두려움은 심어져 있는 듯싶었다. 더 이상 주절거렸다간 결과가 어찌 되든 정말로 주먹을 날릴 셈이었는데, 녀석은 내게 나설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수그러든 기색으로 고개를 팩 돌리며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교육은 누가 맡지요? 시온 중 탑에 있는 건 현재로선 저뿐입니다.”

뺄 때는 뺄 줄 아는 게 더 얄미웠다. 시온이 뭐지. 아마도 어떤 계급이나 지위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물어봐야겠지만. 마스터는 뜸들이지 않고 답했다.

“내가 직접.”

“직접……말입니까?”

녀석의 눈에서 불길이 확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녀석은 날 팬이 스타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열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지경이었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최 내가 잘못한 게 뭐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처음 보는 사이인데 그가 보이는 극렬한 반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녀석은 씹어먹듯이 말했다.

“그것참, 놀랍군요. 새로운 제자를 데려오신 것도 그렇지만 직접. 공을 들이셔야 할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질문이 많구나.”

그 말이 자르듯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스터의 기세가 일순 변화했다. 또 무슨 일을 하려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요하기만 하던 마스터의 눈빛이 섬뜩한 기운을 머금었다. 동시에 동공에 담긴 암흑이 일순 흰자위까지 새까맣게 번져나갔다. 공포영화에서 나올법한 CG가 현실에서 구현된 듯이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블레셋이라 불린 녀석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짚은 손이 덜덜 떨리고 무언가 지독한 일을 경험한 듯 낯빛에 생생한 고통이 떠올랐다.

건방을 떨길래 내심 혼쭐나길 원하기는 했지만, 녀석이 당하는 걸 보고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화가 내게 미칠까 싶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마스터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음에도 치밀어 올랐던 공포심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마스터는 사소한 징벌을 내린 것처럼 블레셋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는 마스터의 낯은 무감하기 그지없었다. 이어 명이 떨어졌다.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며 또한 네게 어떤 질문도 허락지 않는다. 다음 명이 떨어질 때까지 쉬고 있어라.”

그리고 순간, 마스터의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양 공기가 요동치더니,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곧 블레셋이 내쫓겼음을 깨달았다. 그건 실로 기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마스터가 이 공간 전체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듯한.

무엇 하나 힘을 들이고 있지 않은데 마치 그가 세계의 중심인 양 이 홀의 기운이 마스터의 호흡이며, 음절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 탑 안의 모든 것이, 심지어 대기마저도 마스터의 말에 복종하는 듯했다.

그는 흡사 절대자처럼 느껴졌다. 그가 내게 숨을 쉬지 말라고 명하면, 내 호흡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복종하듯 멎어버릴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마법이란 말이지……. 막연하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을 앞둔 기분이었다. 이곳까지 오게 된 지금 과연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난 무력감을 되새겼다.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스터는 차분히 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홀 중앙의 바닥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원반이 박혀 있었다. 복잡하고 기이한 문자가 선을 이루며 얽혀 있는 그 원반은 은은한 빛을 띠고 있어, 단순한 바닥장식 같지는 않았다. 서너 사람이 올라설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원반 위에 올라선 마스터는 내게 말없이 시선을 주었다. 조금 전 블레셋이 당하는 꼴을 본 난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따라 올라섰다. 그러나 멀찍이 서서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던 남자는 여기까지가 제 소관이라는 듯이 그대로 남았다.

한 명이라도 압박감을 주는 이가 줄어든다는 것이 안도하는 찰나,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그 독특한 이동마법은 한차례 겪은 바 있지만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갑자기 고도가 높아졌는지 귀가 멍멍하다 못해 찌르는 듯이 아팠다. 탑의 높은 층으로 이동한 걸까? 난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감싸 쥐었다.

그때 귓가에 서늘한 손이 와 닿았다. 놀라서 흠칫 거리는 데, 손이 거두어짐과 동시에 놀랍도록 깨끗하게 고통이 사라졌다. 난 눈을 끔뻑거리며 의외의 친절을 베푼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마스터는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여관에서도 그러했듯이 나를 내버려두고 푹신푹신 편안해 보이는 안락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또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그제야 나는 눈앞의 달라진 풍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백 평 이상 될 것 같은, 거실처럼 보이는 드넓은 장소였다. 마스터가 차지한 아늑해 보이는 안락의자며 침대, 자그마한 탁자에 책상, 책이 그득한 책장까지 있을 만한 건 다 있었다. 놀랍도록 평범한 생활공간 같았다. 이곳이 마스터의 거처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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