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달무리 금빛 숲-9화 (9/155)

00009  1. 검은 마법사.  =========================================================================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사람이 아니다.”

망설임 없이 떨어진 그 대답에, 순간 섬뜩해졌다. 사람이 아니면 뭐라는 거지? 눈을 크게 뜬 난 잠시 입만 벙긋거렸다. 온갖 흉악스럽고 끔찍한 망상들이 상상력을 시험하듯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어젯밤 흑마법사에 대한 괴담을 들은 터라 내 상상은 꽤 현실성을 가졌다. 즉, 내가 무얼 상상하든 간에 이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난 영화로는 괴물을 보며 낄낄거릴 정도로 담대한 편이었지만 그게 현실에서 이루어질 땐 이야기가 좀 달랐다. 에일리언이라든가 한강의 괴물, 그런 걸 실제로 보고도 내가 기절하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종류의 영화를 잘 보는 편이라 해도 실제로 보는 것과 영화는 다르지 않은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저어- 사람이 아니라면?”

“네게 준 책에 적혀있는 종족 중 하나다.”

마스터는 흡사 숙제를 내어주고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대꾸했고, 부드럽게 찔러 드는 그 시선에 가슴이 다 뜨끔했다. 어제 그 책에 그런 내용이? 앞쪽은 다 읽었지만 그런 내용이 없었고, 아마도 뒤쪽에 실린 내용인 듯싶었다. 그런데 그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난 진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보통 목숨을 위협당하면 뭘 던져줘도 알아서 빨리 습득하려 들지 않나. 노예 같은 경우는 일을 제대로 못하면 채찍질을 당하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런 것치곤 난 혼자 내려가서 밥도 먹고 오고 뻔뻔스레 침대를 차지하고 잠도 잘 잤다. 생각하면 할수록 낯이 뜨거워졌다. 아마 마스터의 입장에서 평가할 때 내 인간으로서의 지능 수준은 바닥이지 않을까.

그 책도, 잠을 줄여서라도 다 읽길 당연스레 기대한 것 같은데 난 세세히 말해주지 않으면 박차를 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낯은 저리도 무정해도, 속은 부글부글 끓어서 날 벌할 수 있었기에 난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자진 납세했다.

“어, 음. 죄송해요! 거기까진 못 읽었어요.”

“……거기에 적혀있는 건 기본적인 지식이니 숙지해두어야 한다.”

“오, 오늘 내로 다 읽을게요.”

다행히 마스터는 제자가 좀 게으르고 덜떨어졌다고 해서 바로 회초리를 드는 성품은 아닌 것 같았다. 책 뒷부분을 뒤적이며 종족, 종족을 뇌까리던 난 포기하고 읽던 부분부터 마저 읽기로 했다. 뒤쪽에 단어별로 페이지가 정리된 것도 아니라서 원하는 부분만 뽑아 읽기 힘들었다. 이쪽 세계란! 인간만 있으면 되었지 무슨 종족이 또 따로 있어서 날 골치 아프게 하는 거야.

지극히 인간본위적인 불평을 하면서도 찾아들 손님이 흉악한 괴물이라면, 하는 가정을 버리지 못한 난 책을 놓고 조심스레 물었다.

“마스터, 저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이것만 말씀해주세요. 온다는 그분 사람하고는 비슷하게는 생겼어요?”

좀 애매한 질문이었는지 마스터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관에 사람이 없어 후드를 눌러쓰지도 않은 터라, 눈가가 가늘게 좁혀드는 게 또렷하게 보였다. 왜 고민 따위를 하는 거지! 고심 끝에 마스터가 답을 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안도의 한숨도 잠시, 나는 마스터의 비슷한 정도에 대한 기준과 내 것이 전혀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즉 마스터는 사지만 달리면 사람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두려움이 감해지기는커녕 더 몰려들었다. 어쩐지 식욕이 뚝 떨어진다 생각했는데, 정말로 식사가 나오자 그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손님 나왔습니다요.”

아침이라 그런지 식단은 간단한 수프와 빵, 그리고 장조림처럼 달짝지근하게 졸인 고기로 간소했다. 그러나 여관 아저씨의 손맛은 알아줄 만해서, 꽤 맛있었다. 나는 식탐 앞에 모든 걸 잊고 마는 나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며, 묵묵히 식사를 씹어 삼켰다. 이 세계에 와서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적어도 식사는 제대로 한다는 것이다. 잠도 제대로 잤지. 이 정도면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 아닐까? 무시무시한 흑마법사한테 붙잡히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스터와 함께 있는 한 내게 조용히 식사를 즐기는 운은 따르지 않을 모양이었다. 침묵만이 깔려있던 실내에 쾅, 하고 귀청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급체할 것 같은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뭐, 뭐죠?”

“왔군.”

마스터의 중얼거림과 함께, 공기의 흐름이 누구나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현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일순 공간의 속성이 뒤바뀌는 듯했다. 바깥과 단절된 골방에 있다가 갑자기 탁 트인 광장에 선 느낌이었다. 여관을 가두고 있던 결계가 풀려났다는 것을, 난 즉시 눈치챘다.

일거에 소리가 쏟아지는 듯이, 주변이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이런 소음이 어디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터져 나온 소리들. 밖에서 들려오는 그 익숙하지 않은 소음의 정체를 깨닫자 피가 빠져나가는 듯이 전신이 싸늘하게 굳었다. 등골이 오싹하다 못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비명소리였다.

생의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는 듯이 처절한.

얼어있던 난 겁에 질려 다급하게 물었다.

“뭐, 뭘 하신 거예요? 이 소리는 뭐죠?”

“결계를 풀었다. 그러니 밖의 것들을 처리해야 들어오지 않겠나.”

무심하게 대꾸하는 마스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곧 알아차렸다. 어제 있었던 일의 반복이었다. 단지 어제 죽은 사내는 본인조차 자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몰랐다면 밖에 있는 이들은 자신이 왜 죽는지 생생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 달랐다.

마스터와 아는 사람이라면 날 해치진 않을 테니 나가서 말려본다는, 그런 계산은 결코 실행할 수 없었다.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바깥이 온통 비명과 이상한 굉음으로 가득한데, 나가볼 배짱은 내겐 없었다. 마스터가 눈앞에 앉아있지 않았다면, 도리어 난 여관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 들어갔을 것이다.

난 단지 두려움에 잠겨 겁쟁이처럼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발붙이고 있을 따름이다. 차츰 잦아드는 비명소리를 배경음으로 앉아있는 기분이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내 비명이 멎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몰살(沒殺). 심장이 조금이라도 연약했다면, 나는 이미 기절해 있었으리라. 가장 두려운 장면을 앞둔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문이 열렸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마치 운명교향곡처럼 들려왔다.

쏟아지는 역광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문이 금방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낯선 이가 마스터 앞에 섰다. 나는 몸을 잘게 떨며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얼어붙은 몸을 따라 폐도 얼어붙은 것인지, 내게선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만이 났다. 식욕도 잊고 난 구역질을 참듯 입가를 감쌌다.

그자의 몸에서는 어떤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처음 맡은 자라도 알 것 같은, 그런 견딜 수 없이 끔찍한 냄새.

그건……. 피비린내였다.

나는 현실을 직시하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상상만큼 두려운 외형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2미터에 육박할 듯한 큰 키는 실로 우뚝 선 산 같았다. 그의 회색 망토는 군데군데 검게 얼룩져 있었고 눈 아래는 복면으로 가려져 위협적이고 흉악했다. 겉모습이 괴물이 아닐지라도, 그는 내게 있어선 이미 괴물이었다. 난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자제하듯 이를 악물고 주먹을 꾹 눌러 쥐는 찰나, 남자가 마스터 앞에 부복했다.

일말의 감정도 싣지 않은 고요한 음성이 대기를 타고 흘렀다.

“일은?”

“시키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이 자는.”

남자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날카로운 회청색 눈동자가 날 관찰하듯이 훑자 난 벌침이라도 맞은 양 화들짝 놀라 그를 외면했다. 공포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돌린 난 오로지 마스터만을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남자와 다른 것 하나 없는 그가 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이윽고 떨어진 말에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다섯 번째 제자다.”

……처음으로 놀란 점은 정말, 내가 제자가 맞긴 맞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제자라는 게 실험체를 뜻하는 특정 암호가 아니라면, 그는 정말로 날 제자로 삼는다는 것이리라. 마스터 흑마법사설때문에 우려하고 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자그마치 다섯 번째 제자라는 점이었다. 그러면 나 외에도 네 명이나 제자가 있다는 뜻인가? 딱히 교육적이거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자상한 성미로 보이진 않았는데. 살인마를 앞둔 불안감에 힘입어 조바심이 솟았다. 알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난 불쑥 빠르게 물었다.

“저 말고도 제자가 있습니까?”

마스터와 남자의 시선 둘 모두가 내게로 향했다. 마스터의 시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눈앞의 살인마의 시선이란……. 진실로 꺼려지는 것이었다. 마스터에게는 따졌던 전적이 있었던 나도 이 남자에게 살인을 저질렀다고 따질 용기는 없었다.

위협적인 올블랙 패션의 마스터는 그래도 몸이라도 호리호리했지, 이 남자는 다른 종족인데다가 키도 훌쩍 컸다. 내가 운동을 좀 배운 정도가 아니라 국가대표선수였어도 이 신체적 차이는 극복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곧 보게 될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스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엉겁결에 따라 일어서자 마스터는 내 어깨를 잡고 그자의 옆에 붙여 세웠다. 내 얼굴은 글쎄, 거의 백지장이라 표현해도 그르지 않을 만큼 하얗게 질려있을 거라고 추측이 가능했다. 방금 살육을 저지른, 피가 배어든 옷을 입은 남자 옆에 서 있는 기분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아마도 13일의 금요일, 살인마 제이슨과 나란히 앉아있는 기분과 흡사하지 않을까.

심장이 펄떡거리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고동소리가 고막까지 울렸다. 피가 빠져나간 듯이 머리가 온통 얼어붙었다. 사고의 여력 없이 그저 가만히 서 있는 내 앞에 마스터가 다가섰다.

그 한없이 깊고 검기만한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빨려드는 것 같았다. 홀리듯이 정신이 몽롱해지며 추위에 떠는 양 부들거리던 몸을 차츰 진정되었다. 마주한 눈동자가 늪 속에서 빛이 올라오는 듯이, 요요한 빛을 머금었다. 그 기이한 눈으로, 마스터는 속삭이듯 말했다.

“귀환한다.”

어디로요? 라고 작게 웅얼거리기 무섭게 무언가가 시작됐다. 물안개같이 흐릿하고 요동치는 기운이 주위를 둘러쌌다. 바람인가.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 한가운데 서 있는 듯이 사위가 빙빙 돌았다. 식당 안의 배경이 흐릿해지더니 마침내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추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귀에 마스터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탑으로.”

============================ 작품 후기 ============================

챕터1종료 이제 챕터2에서 본격적으로 강제 마법사의 길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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