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1. 검은 마법사. =========================================================================
눈앞에서 일순 빛이 터져 나왔다. 난 본능적으로 눈을 감싸고 재빠르게 몸을 웅크렸다. 또 마스터가 마법을 썼구나! 하고 죽음을 예감하면서. 그러나 기다려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말았던 몸을 피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혹여 죽음을 맞고도 느끼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난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원형의 빛덩이를 목격하게 되었다. 방 안을 밝히고도 남을 만큼 환하게 쏟아지는 빛살에 시리도록 눈이 부셨다.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면서도 신기한 기분에 난 그 광구(光球)를 손가락 사이로 관찰했다. 그건 흡사 거대한 반딧불 같았다. 지탱하는 것 하나 없이 허공에 홀로 떠서 빛을 발하고 있다니, 저건 어떻게 만든 거지?
쓸데없이 호기심을 보이던 난 곧,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에. 금세 솟구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서서히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소파에 반듯이 앉아 날 응시하는 마스터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하기만 했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는 건 내가 몸으로 다이빙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차갑기 짝이 없는 그 눈길이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마스터가 고요히 물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네가 할 줄 아는 게 무어냐.”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한 의문인 듯, 마스터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힐책이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두운데 넘어질 수도 있죠. 제가 야행성 동물도 아니고.”
부끄러움에 난 작은 소리로 투덜대며 몸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저런 곳에 소파가 다 있었다니. 아무래도 내 방향감각은 영 좋지 못한 듯싶었다. 침대 옆에 있는 등불을 목표로 걸어갈 셈이었는데, 약간 방향이 틀어져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종일 창가에 앉아있었던 마스터가 내가 없는 새 그리로 옮겨갈 줄은 몰랐다. 당연히 예측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어쨌든 내게 책임을 묻지는 않으려는 것 같았기에, 그가 보인 뜻밖의 관대함에 안도할 새도 없이 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마스터는 식사 안 하세요? 아까도 안 드시고는. 원하시면 제가 내려가서 가져올게요.”
좋아, 이 정도면 걱정하는 척 친근하게 들리지. 조금 전까지 밑에 층에서 뒷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도 내겐 가책이란 없었다. 마스터는 무심히 답했다.
“말했을 텐데. 난 먹지 않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아예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까보다는 해석할 만한 여지가 적었다. 그게 마법사의 일반적인 특징인지 아니면 마스터의 특수성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범상한 사실은 아니었다.
마스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까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침대 위에 눕는 편이 편할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권하지 않은 이유는 여긴 침대가 달랑 하나라서 그렇게 되면 내가 의자에서 자야 하기 때문이었다. 같이 잘 수는 없지 않은가? 절대 문제 될 것 같지 않은 성적인 의미는 배제하더라도, 내가 긴장돼서 한숨도 못 잘게 분명했다.
잠은 좀 얌전하게 자는 편이지만, 혹시나 험악한 꿈을 꿔서 나도 모르게 발길질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때에도 마스터가 넘어가 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난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 서서 마스터를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마스터는 내가 보는 앞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물컵이 움직인 흔적이 없는 걸 보아선, 내가 없어도 그건 마찬가지였으리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스터는 대단한 마법사일지 모른다. 그리고 나한테는 마스터의 강력함을 말해주는 그 하나하나의 증거들이 좀 바람직하지 않았다. 가만, 먹지 않는다면 화장실도 안 가는 걸까?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던 그때 자그마한 쪽문이 시선의 끝에 들어왔다. 창고인가 싶어 열어보니 화장실인지 바닥에는 배수구가 나 있었고 푸세식 변기와 수도꼭지가 보였다. 화장실은 복도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가 제일 좋은 방이라서 그런가. 호텔과 비교하기는 뭣하지만 이곳이 여관 내에서 가장 비싼 방이라고 아저씨가 그랬다.
수도꼭지에 다가가 옆에 버튼을 눌러보자 물이 졸졸 새어나왔다. 수압도 세지 않고 온수도 없었지만, 삼 층까지 수도가 연결된 걸 보면 여기 문명수준도 아주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볼일은 일 층에서 이미 보고 온 터라 난 대충 입안을 헹구고 세수를 했다.
옷이 갈아입혀 진 이상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상하도록 몸 상태가 보송보송해서 목욕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마스터를 문밖에 내버려두고 씻는다는 게 좀 꺼려졌다. 성별을 떠나서, 그런 내밀한 행위를 경계하는 사람 앞에서 기꺼이 하긴 어려웠다. 난 옷깃을 들춰서 바뀌지 않은 속옷을 확인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내가 몸이 왜 이리 깨끗하냐고 추궁하는 건……, 아무래도 영 아닌 듯싶다. 굳이 묻지 않는 편이 득이 될 것 같았다.
내 옷을 갈아입힌 정도가 아니라 알몸을 보았다면……. 그 가정을 생각하니 얼굴에 확확 열기가 올랐다. 더군다나, 또 하나가 있었지…….
본능적으로 회피하고만 있던 기억이 덮쳐오듯 가시화되어 떠올랐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넘어지면서 난 마스터를 덮치다시피 했고……. 그리고… 입술이 닿았었지.
어디에?
그 감촉이 너무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대답이 곧장 떨어졌다. 난 얼굴을 감싸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건 무효야, 무효라고! 가슴에서 머리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 메아리쳤다. 앓는 신음을 내며 난 뺨을 문질러댔다.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자신을 마구 학대하고 싶은 기분이다. 처음 넘어졌을 때 그게 마스터라는 걸 왜 눈치 못 채었지? 바보잖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이것이 내가 불쾌해할 일은 아니라는 거였다. 마스터는 순전히 피해자 아니던가? 그 단어와 마스터가 퍽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사실이었다. 이성을 떠나서 감정적으로도 불쾌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당황스럽고……. 자괴감이 들고, 어떤 얼굴을 해야 할 지 모르겠고,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래, 다 내 잘못이지. 난 한숨을 푹 내쉬며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내가 한 짓을 생각하자니 마스터가 촛불 끄듯 훅 숨을 끊어버리지 않은 게 용하다 싶었다. 어쨌든 그는 공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말이다.
그 무거운 사실이 내 사소한 실수 앞에서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가왔다. 새삼 의문이 피어오른다. 그렇다면 고의가 아닌 실수로 그를 위협하는 건 허용할 수 있단 이야기인가. 아니면 제자로 삼은 나라서 관대하게 용서했던 걸까. 실수로 입술이 닿은 일에 의미부여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
답은 알 수 없었다. 난 지긋이 벽에 걸린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울상이 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애써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뻔뻔스러움을 새겨 넣으려고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 한 번쯤은 할 수 있지.
마냥 화장실에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므로, 난 애써 꼿꼿하게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마스터는 어차피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나만 신경 쓰고 그를 의식하는 건 손해였다. 그렇다고 ‘제 마음대로 입 맞춰서 죄송했어요.’라며 뒤늦은 사과를 건넬 순 없잖아. 그것 생각만 해도 참 민망하고 우스운 모양새였다.
씻고 나니 어쩐지 졸음이 몰려왔다. 대낮처럼 환했던 방안은, 공중에 떠 있던 빛덩이가 확연히 작아져서 이제는 촛불 밝힌 정도로 어두워진 터였다. 숨소리도 내지 않는 마스터는, 소파에 앉은 채로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부르기라도 하면, 금세 눈을 뜨겠지만.
가만히 침대에 드러눕는데 아까 반쯤 읽다가 만 책이 보였다. 저걸 다 읽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펼쳐 든 지 얼마 안 되어, 졸음은 눈덩이처럼 부풀어서 날 짓눌러왔다. 나는 어느덧 책을 놓고 의식을 잃듯 잠에 빠져들었다.
잠들기 전만 해도, 끔찍한 광경을 보았으니 악몽을 꾸리라 내심 예상했다. 죽은 사람이 피를 철철 흘리며 꿈에 나와서, 왜 그를 말리지 않았냐고 왜 나서지 않았냐고 추궁하는, 그런 뻔하지만 소름 끼치는 악몽.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채 세면대로 다가가 거울을 보면, 퀭하니 눈 아래가 푹 들어간 얼굴이 적나라하게 비치겠지. 통속적이지만 그럴듯한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 뻔한 걸 내게도 기대했지만, 마음가짐이 너무 불순했었던 것 같다. 쇠심줄처럼 무딘 신경은 나에게 악몽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무의식 상태에 접어들었고 한 번도 깨는 일 없이 잘도 잠을 잤다. 내가 깨어나게 되었던 건 마스터가 날 불렀기 때문이었다.
“아힌.”
딱 한 마디, 조용히 호명했을 뿐인데 조건반사적으로 눈이 번쩍 떠졌다. 잠을 푹 잔 것과는 별개로 긴장감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일까. 물 깊은 곳에 있다가 건져진 듯하여 나는 느슨한 정신을 추슬러야만 했다. 눈을 비비던 난 조금 후에야 마스터가 내 이름을 불렀음을 알아채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창밖으로 온통 환한 빛이 비쳐드는 게, 아침이 왔나 보다. 모든 게 꿈이길 바랐던 건지, 알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들었지만 나는 흔쾌히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 마스터. 안녕히 주무셨어요?”
“준비하고 내려오도록.”
마스터는 달랑 한 마디를 툭 던져놓고 방을 나섰다. 난 따뜻한 잠자리의 유혹을 떨치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캄캄했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는데도, 마음은 조금도 상쾌하지 않았다.
…상쾌하다면 이상한 거겠지. 가슴 속 깊은 곳을 꾹 누르는 듯이, 불안감이 무겁도록 자리를 차지했다. 준비하고 내려오란 소린, 단순히 식사할 준비를 말하는 건 아닐 터였다.
뭉그적거리며 세수를 마친 나는, 침대로 다가가 옆구리에 읽다 만 책을 끼었다. 소지품이랄 게 없으니 더 챙길 것도 없었다. 내가 가진 건 몸뚱이 하나와 이 책뿐.
대책이 없으니, 도망치고 싶어도 갈 곳이 없긴 하구나. 난 새삼 이곳이 기반이며 도와줄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낯선 이 세계라는 것을 실감했다. 특히나 이곳의 치안은 좋지 않은 듯하니, 알량한 운동실력만 믿고 도주를 꾀할 순 없었다. 내가 지금으로서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흑마법사로 추측되는 마스터뿐이었다.
문득 마스터에게 내 곰돌이 잠옷은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마스터의 입으로 내 옷을 갈아입힌 게 그라는 걸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어쩐지 방안을 나서기가 망설여져 미적거리고 있는데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참 그렇지. 지금 식당에는 마스터와 아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주인아저씨 둘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 나와 친분을 다진 아저씨는 내가 언제쯤 내려올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마스터와 단둘이 있는 건, 확실히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이니까.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난, 아저씨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재빨리 방문을 박차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이고 손님 오셨습니까? 시장하실 텐데 제가 식사를 준비해드립죠.”
죽상을 하고 안절부절 서 있던 아저씨가 나를 보자마자 얼굴에 화색을 띠며 후다닥 부엌으로 사라져갔다. 아가씨 운운하며 친한척했던 때가 언제였느냐는 듯이 순식간에 태도에 격의가 서렸다. 섭섭하게 느끼기엔, 목숨 걸고 친하게 굴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난 늦은 것을 사죄하듯 마스터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스터는 어제 식사했던 그 자리에 또다시 앉아있었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성격인 건 알겠지만…….
식욕 떨어지게 하필 저기람. 혀를 찼지만 그에게 자리를 옮기라 권하기는 좀 뭐했다. 난 한숨을 삭이며 마스터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소리 나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식사를 기다리면서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질문을 꺼내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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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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