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1. 검은 마법사. =========================================================================
…죽어가는 나를 구하는 건, 어쩌면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타산적인 시각으로 다시금 그의 요구를 이해하려고 애써 보았다. 나를 살리는데 치른 비용이 크기에 그는 내게서 대가를 받아내고 싶을 수 있었다. 만약 그때의 나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려주고 살길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생각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살고, 후에라도 어떻게 타협을 보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목숨을 구해줬다고 몸을 요구하는 것은……. 생명과 자유, 그 두 가지를 저울질할 마음을 버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건 옳지 않았다. 내 도덕관념이 삐죽 반기를 들고 그를 비난했다.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전제로 깔아두고 사람을 살리고, 그 대가를 요구하다니 사채업자만큼이나 악독한 짓이 아닌가.
그러고보니, 퍼뜩 의혹이 샘솟았다. 혹시 나, 싸이코에게 납치된 거 아니야? 저 칙칙한 복장을 보았을 때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차원의 균열이니 하는 얘기가 상식적으로 사실일 리 없잖아. 난 급히 이불을 끌어올려 몸을 꽁꽁 가리면서 의심에 찬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순순히 따를 의지가 없음을 역력히 드러내는 내게, 그가 여전히 표정 없는 낯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돌아서려 했었다.”
그 말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동굴 바닥을 흐르는 지하수처럼 차갑게 깔리는 음성인데, 그가 말을 할 때면 이상스레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네가 날 잡았고, 그래서 내가 널 살렸지.”
분명…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던 일이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선명히 빛을 발했다.
“그렇다고 절… 그러실 권리는 없어요.”
차마 말할 수 없어 중요한 부분을 얼버무리고 난 항의했다. 그의 시선은 내가 움찔할 만큼 지극히 차가웠다. 사람의 것이 아닌 양 한 가닥의 온기도 깃들어 있지 않은 눈.
“모르겠나? 넌 이미 내게 소원을 빌었고, 나는 소원을 들어주었다. 네가 대가를 치르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소원을 빌기 전의 상태로 널 되돌려줄 수 있다. 좀 더 간단하게 최종적인 상태로.”
나는 분명 그에게 말했었다. 살려달라고. 그것이 소원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의 말뜻은……. 오한이 들었다. 나는 소원을 빌기 전에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최종적인 상태는 죽음. 즉 이자는 네 몸을 바치지 않겠다면 널 죽여주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 대답여하에 따라 바로 실행에 옮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을 되뇌면서도 두려움이 치솟았다.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었다. 누군들 정체 모를 인간한테 몸 바치게 된 상황에서 포기하겠는가.
“하지만, 전 절 바치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 그냥 살려달라고만 했지. 그러니까 뭔가 다른 것……. 어떻게든 제가 보상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생명의 대가가 값싸리라 생각했나? 네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니, 네가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모든 것 역시 나의 것이다. 그러니 넌 대가를 치를 수 없다.”
이런 생억지가 다 있다니! 조금의 타협의 여지도 없게끔 들리는 말이었다. 이 세계는 인권이고 뭐고 없나? 나는 아주 진지하게, 생명의 은인이고 뭐고 눈앞의 이 꺼림칙한 인간을 때려눕히고 방을 뛰쳐나가는 것을 고려해보기 시작했다.
난 이상할 정도로 힘이 센 편인데다가 유도를 좀 한편이라 지방대회에서 입상해본 적도 있다. 그러니까 무력을 행사하는데 익숙하다는 소리다.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건 어렵겠지만, 눈앞의 호리호리한 한 명쯤에게는 기습적으로 타격을 가하고 도망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가 내게 조금 전 행사한 힘. 거의 죽어가는 나를 살려냈던 그 힘, 나는 그 힘의 정체를 몰랐다. 그리고 이 인간, 얼굴은 세상에 둘 있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데 분위기가 심상찮은 게 척 보기에도 강해 보였다. 덤비면 그걸로 무덤행이 확정되는 건 아닐까? 아니, 까마귀밥……. 푸드덕 대는 날개짓 소리가 울려 퍼지는 환청이 들리자, 나는 신중해지기로 했다.
“그럼 제게 정확히 요구하시는 게 뭐죠?”
파노라마처럼 불건전한 상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난 도리질 치듯 생각을 뿌리쳤다. 나중에 줄행랑치든 어쩌든 그의 요구에는 일단 따르는 척하자. 그것이 바람직한 판단이었다. 설마 지금 당장 뭔가를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장소가 영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너는 앞으로 내 제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읽어두도록.”
내 물음에 답하듯 그는 품속에서 옛날 백과사전의 두 배쯤 될 듯한 두꺼운 책을 꺼냈다. 저런 게 들어갈 공간이 있었나? 의심이 갔지만 이미 상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난 책을 받아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안 했으면 떨어뜨릴 뻔했을 만큼 묵직했다.
책을 펼쳐보자 정말, 성경만큼이나 깨알 같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페이지 하나하나가 기름종이처럼 얇은데 빽빽하게 쓰인 글자를 보니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모르는 글자였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훑어보는 정도로는 당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대학 교재처럼 딱딱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체계적인 학술 저서 같았다. 그리고 내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글씨는, 마법. 마법이라고? 다행히 그가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양이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시험이라도 봐야 한다는?”
“마법사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익혀야 할 지식이다.”
“잠깐, 마법사라구요?”
아까부터 마법이라느니, 마법사라느니 그런 소리가 나오긴 나왔었다. 하지만 경황이 없어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마법사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던가? 순간 알록달록한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에서 손수건을 비둘기로 만드는 장면을 떠올린 것은 필연이었다.
“그래. 세계의 근본을 이루는 힘, 그 힘을 다루고 행사하는 것이 마법사다.”
그가 말하는 음성이 너무나 진지해서, 사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 농담기따윈 없었지만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는 마법이란 것을 방금 경험하지 않았던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말들,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낯설었다.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뜻하지 않는 공부를 강요받는 상황이라……. 이건 아무래도 머릿속에 심어줄 수 없는 종류인 것 같다. 벌써부터 골이 쑤셔오는 느낌이다. 아직은 얼떨떨하긴 하지만, 이 모든 불가사의한 것들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나는 살아있고, 여기는 다른 세계고, 저 사람은 다행히 변태는 아니지. 하지만 방금 목숨과 맞바꾼 노예계약을 선고받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이 깊어져만 간다. 나는 책을 침대 옆에 놓은 뒤 일단 궁금한 점을 해소하기로 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생소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도 당신의 그 마법 때문인가요?”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제 이름은 이아힌인데요. 성이 이고 이름이 아힌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이제 네 소속은 네 가문이 아니라 나에게 있으니 네 이름은 ‘아힌’이다.”
“아니, 저기 제 성이 뭐가 어때서요…….”
성도 없이 달랑 아힌이 뭐야 아힌이! 졸지에 이름도 잘라먹게 된 나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를 앞으로 마스터라고 불러라.”
내 머릿속에 새겨진 그 호칭의 뜻은, 지난 세계의 그것과 동일했다. 주인, 지배자, 혹은 스승……. 그리고 그것이 나와 그의 관계를 대변할 것이다.
새삼 가슴이 울컥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도 싶고,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수난을 겪는지 억울하기도 했다. 생사의 고비를 건넌 충격에 벗어나기도 전에, 자유의지를 구속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 내가 마냥 앞날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나. 나는 무거운 눈을 들어 눈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요구를 관철해오는 무정하고 완벽한 낯은 유리세공품처럼 아름다웠고, 그만치나 차가웠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말해주듯, 내가 그를 따르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말을 실현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 선택지는 별반 없다. 애초부터 난 자존심이 넘쳐서 절대 남에게 굽히지 못하는 성미도 아니었다. 울컥하는 성격 때문에 싸움을 부를 때도 있지만, 오히려 손바닥 비빌 때는 비비고 수그릴 때는 수그리는 현실적인 사고의 소유자랄까?
……가능하면 빨리 이 세계를 파악하는 대로 이 무섭고 수상쩍은 남자에게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순순히 따르는 척 해두자. 포기하니, 마음이 스르르 녹으며 편해졌다. 반감을 눌러낸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마스터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 마스터 저 좀 배가 고픈데 뭣 좀 먹을 거 없을까요? 마스터.”
……그러니까 마스터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발음한 것은 결코 앙심을 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나는 식당에 마주앉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정확히 나의 의도대로였다. 예기치 않은 말에 잠깐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내게 돈을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놀랍도록 얇고 가벼운 작고 네모난 판이 잔뜩 들어있는 지갑이었다.
이게 돈인가? 그렇다 한들 내가 이 동네 화폐단위 따위 알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난 음식을 주문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어쩌면 이 세계는 한 손으로 물구나무서서 다른 한 손으로 메뉴판을 가리키며 주문하는 등 음식 주문하는 데에도 특별한 절차가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런데 마스터는 나와 동행할 마음이 없는 눈치였다. 내가 도망칠 수도 있으니 그의 입장에선 같이 가는 게 나을 텐데. 그런 걸 보면 나를 감시할 만한 수단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뭔가 꿀리는 게 있는 걸까? 어떤 사람을 파악하려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었다. 특히 친해지려면 밥을 같이 먹는 게 가장 좋았다. 어느 정도 친숙해지면 내 탈출 시도 한 번쯤은 보아 넘겨주지 않을까, 하는 속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우선은 이 남자가 무늬만 강해 보이는 건지, 아니면 진짜 강해서 나 정도는 5초 만에 때려눕힐 수 있는 건지. 또 그가 가진 마법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능력인지 알아야 했다.
결국 난 스승이 제자를 내버려둬서야 되겠느냐는 둥, 죽을 뻔했던 몸인데 후유증 때문에 쓰러지면 어쩌느냐는 둥 온갖 논리적인 이유를 다 갖다 붙이며 그를 식당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내가 누워 있었던 곳은 한 여관의 3층 방이었다.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자 펍(Pub)처럼 보이는 식당이 있었다. 대충 살펴보니 건물은 벽돌과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계단은 나무로 만들어져 걸음을 내릴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희게 칠해진 벽면에선 전문적인 업체에서 칠한 게 아니라 대충 흰색 페인트를 문대놓은 것처럼 조악한 솜씨가 엿보였다. 이 세계는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이 여관이 친환경적인 건물로 지어진 건지 아직은 판가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식당이 갖춰진 걸 보면 이곳이 꽤 큰 여관 축에 속하는 모양이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 스위트룸에서 묵을 것 같이 생겨선 이런 곳이라니. 마스터는 생각보다 넉넉지 못한 사람인 듯싶다. 앞선 일들로 불만감이 충만했던 나는 내심 그의 경제수준을 헐뜯었다.
어쨌든 식당에는 자리가 넉넉했고 디자인을 신경 쓰지 않은, 그야말로 식당스러운 나무의자와 식탁이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의자는 앉는 순간, 딱딱한 감촉이 엉덩이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래 있을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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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삼킨 꽃 수정작업과 연재를 병행....흐규흐규 힘들어.
소개글은 일단 로노에님이 주신 걸로 ;ㅅ;
선작,추천,코멘트,평점,쿠폰,아이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