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1. 검은 마법사. =========================================================================
입안에서 비릿한 냄새가 감돌았다. 기가 막힌 사실은, 그 냄새에 내가 허기짐을 느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난 허기 때문에 눈을 떴다. 위장이 텅 비어서 아릴 지경이었다. 잠깐, 난 죽지 않았던가? 그러나 저승에서 아귀(餓鬼)가 된 것이 아닌 바에야 배고플 리 없다.
퍼뜩 정신이 깨어나는 동시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떡? 놀랍도록 나는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시야는 놀랍도록 맑았고 이리저리 뒤틀어본 몸은 원활하게 움직였다. 배가 고픔에도 전신은 활력이 넘쳤다. 엉덩이 아래로 인식하지 못했던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주위도 차츰 눈에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만 병원 특유의 약품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링거병, 하얀 벽면 같은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이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그러면, 여기는 어디일까.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회전시키며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난 거의 죽음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난 살아있었다! 솟구치는 환희에 서둘러 침대에서 벗어나려던 나는 문득 이 방에 나 이외의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시선이 그리로 돌아갔다. 저편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였다.
나는 숨을 죽였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사람……인가? 나는 눈을 의심했다. 최고의 장인이 완벽한 솜씨로 구현해낸 조각 같았다. 나의 구원자는-
쏟아지는 햇빛이 흡수되어 심연으로 사라지는 듯한 흑암의 머리카락, 어찌 보면 까마귀 깃털 같은 그것은 비단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와 선명히 대비되는 피부는 푸른기가 돌 정도로 투명하니 희었다.
또한 인간임을 의심케 하는 것은 또 하나, 표정 근육 하나 움직임 없는 완벽하게 감정을 제거한 얼굴. 그러나 결여된 인간미와 반비례하여 그는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천사도, 악마도 그 무엇도 그에 비할 것 같지 않았다. 너무도 검어 홍채조차 비치지 않은 눈으로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줄곧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범상치 않은 그의 외양과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실, 상대가 진짜 사람인지도 의심이 갔다. 만약 사람이라면 여자인가 남자인가? 그 점 또한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 간의 갈등 끝에 결국 나는 생명의 은인일지 모르는, 아니 틀림없이 그러할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았다.
“저기요.”
반응은 금세 왔다. 내가 가진 의심이 무색도록 그는 생명체 특유의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칠흑 같은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앉았다. 놀랐던 것이 아니다. 뒷걸음치고 싶은 두려움이 가슴을 찔렀다. 그의 눈이 무엇도 말하지 않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섬뜩할 지경이었다.
침 삼키는 소리만 고요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유 모르게 두렵다 하여 마냥 침묵을 지킬 수만은 없었다. 어쨌든 날 구해줄 만한 이타심이 있으니,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판단을 마친 난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를 구해주신 분이지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거든요. 죄짓고 산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
말을 멈춘 이유는 돌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성큼 내게로 다가서는 그를 보며 나는 그의 성별 또한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큰 키에 체격 역시 호리호리하긴 했지만 가녀리다고 보긴 어려웠다. 여자라면 운동선수에 어울리는 몸이다. 복장도 이상하다. 코스프레라도 하는 건지 온통 검은 옷차림에 망토까지 둘렀다. 그와는 너무나 잘 조화되어 위화감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내게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쫓기기라도 하는 양 황급히 벽에 등을 붙이며 난 재빨리 외쳤다.
“아 저 저기! 그대로 얘기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입은 건 싸이코 같은데 분위기는 진짜 위압적이다. 간이 쪼그라든 내 앞에 멈춰 서서 그는 내 이마에 지시하듯 손을 가리켰다. 일순 눈앞에 빛이 번쩍거렸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빨려들듯 어지럽게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어였다. 현기증을 느낄 만큼 폭넓고 낯선 지식이 머릿속에 범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밀하게 뿌리를 내리듯 뇌리에 구석구석 심어져 자리를 잡았다. 그 일은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났고 그가 손을 거두었을 때 나는 금방 안정을 찾았다. 숨을 몰아쉰 난 다급히 물었다.
“뭘 하신 거예요? 손에서 빛이 났는데……. 어, 어라?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이게 도대체 무슨 나라말이죠? 무슨 초능력자라도 되시는가요?”
“마법사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마법사로 살아가면서 네가 가장 많이 쓰게 될 언어지.”
딱딱할 거라 짐작했던 그의 목소리가 너무 매끄럽고 듣기 좋아 나는 잠깐 놀랐고, 또 그 말의 내용에 놀랐다.
“아니 저기 잠깐만요. 제가 왜 마법사로 살아가야 하죠? 아니 그 전에, 마법사라니요? 그게 도대체 뭐하는 건데요? 무슨 모자에서 토끼 꺼내고 그런 거요? 전 그런 건 취미가 없는데 손재주도 없구요… 집에 가야 해요.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예요. 그런데 난 집에서 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저, 여기는 어디죠? 제가 어떻게 된 건가요?”
횡설수설 질문을 내뱉으면서 머릿속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얽혀갔다.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집에서 잠을 자다가 죽을 뻔하고, 살아났더니 이상한 복장의 남자가 내게 초능력을 썼다.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어서, 얼떨떨하기만 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토끼 구멍으로 뛰어든 것이니 나보단 더 대비되어있었을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그는 감정 없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관찰하는 듯한 검은 눈이 지독히 검고 무기질적이라 나는 그의 성별을 가늠하려던 시도를 버렸다. 저건 사이보그나 인조인간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나를 바라보던 그는 설명이 필요하다 느꼈는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충격적인 이야기가 입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갇혀 있던 곳은 차원의 균열이었다. 아주 우연히 네가 있던 시공간에 균열이 생겨난 것이라 추측된다. 사실, 갇혀 있던 것만으로 운이 꽤 좋았다고 봐야겠지. 대부분은 균열에 빠진 순간 죽게 되니까. 다른 세계의 균열이 이 세계에 비치는 일 역시 흔치 않으나 나는 그곳에서 너를 발견했다. 그리고 꺼냈지.”
감정이 깃들지 않은 음성은 사무적이다 못해 냉정했다.
“하지만 정작 꺼낸 너는 죽기 직전이었다. 네 상태는 심각했지. 그곳에 갇힌 지 오래되어 보였고 뼈가 으스러진 채 살아는 있었지만 이미 비틀린 마력에 장시간 노출되어 손쓰기 어려운 상태였다.”
“잠깐!”
나는 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말이 지속되면서 점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굽어들며 손바닥 안쪽을 꾹 눌렀다. 두려움, 그러나 아까의 것이 맹수를 앞둔 본능에 가까웠다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까마득한 허공에 뚝 떨어져 놓인다면 이런 아득한 기분일까. 가파른 절벽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감이 치달아 올랐다. 나는 일부러 으름장을 놓듯이 질문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그러니까 여기가 다른 세계…라구요? 저 돌아갈 수는 있나요? 있……겠죠?”
질문을 퍼부을수록 내 음성은 흐려지고 떨림을 머금어 갔다. 그래,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일단 집에 갈 수 있는지, 그걸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없었다. 제발 몰래카메라이길, 아니면 차라리 꿈이길.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렵지 않은 악몽이었다고 해도 좋으니까.
눈앞의 생생한 현실에도 나는 아찔한 심정으로 빌며 절박하게 물어보았다. 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일말의 동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불가능에 가깝지. 그렇게 할 수 있더라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여전히 평온한 어조로 그는 잔인하게 통고했다. 불가능. 그처럼 절망적인 단어가 있을까? 숨이 턱 막히고, 몸이 덜덜 떨렸다. 여러 가지 상념들이 뒤섞여서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발밑이 떨어지는 듯이 아찔했다. 얼어붙은 나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이내 무기력하게 물었다.
“……어째서요. 아주 어려운 일이라서 그런 건가요?”
“누구도 시도해 본 일이 없어 결과도 알 수 없고, 행하는 법조차 알지 못한다.”
그때 문득, 벼락같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저절로 몸이 앞으로 숙이는 동시에 손바닥이 침대를 다급히 짚었다. 꺼림칙한 것을 피하듯 최대한 멀리하고 있던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건. 그런데 하지 않는다는 건 왜지요? 물론 처음 보는 내게 그런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다는 건 알아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심적 안정을 해치는 말들을 거침없이 해대는 걸 보아하니 지독한 냉혈한인 건 알겠다.
“하지만 저를 살려주셨잖아요. 그렇다면 혹시 시도를……. 해주실 수는 없나요? 그게 크게 어려운 일이라면, 제가 어떤 식으로든 보답할게요. 저 밥 잘해요!”
다급히 꺼낸 제의가 퍽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난 웃을 수 없었다. 내 터무니없는 소리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의 무표정한 낯이 대단히 무게감 있게 다가왔던 탓이다. 나는 금세 기가 죽었다.
“뭐, 그런 게 필요 없으시다면…… 제가 뭘 하면 되지요? 무엇을 대가로 치를 수 있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게요.”
나는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그의 말속에서 가까스로 찾은 여지를 동아줄이라도 잡은 듯이 힘껏 매달리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절벽 위의 꽃을 딴다거나 호랑이를 잡아오는, 어쨌든 시도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나마 희망은 있을 것이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정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는 내게 그는 망설임 없이 차가운 투로 통보했다.
“너는 대가를 치를 수 없다. 이미 넌 내 것이니까.”
그 말을 이해한 즉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건 구애의 표현이라기보단……. 흡사 물건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이 들렸다. 내가 널 살려주었으니 네 목숨은 내 것이라고, 고대에서나 적용되었을 법한 등가교환을 내세우면서.
아무리 날 살려주었다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뇌리에 인신매매, 노예와 같은 단어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것은 상상을 거치자 순식간에 그럴듯한 영상으로 구체화 되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위기감이 엄습한 난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혹시 이건, 목숨을 구해줬다고 몸을 바치라는 뜻인가? 아무리 내가 곱상하다, 반듯하게 생겼다는 소리를 좀 듣고 살았다지만.
“저기, 그건…… 좀, 그런데요!”
나도 모르게 강하게 낸 목소리가 내 귀에도 질색하는 것처럼 들렸기에 그를 자극한 건 아닐까 싶어, 짐짓 눈치를 보았다. 사실 여자가 아쉬울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연예인보다도 더 출중한 외양을 하고 있으니, 내 거절이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러나 우려가 무색하게, 나는 곧 그가 아주 일방향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의사는 상관없다.”
내가 정했으니 너는 따라야 한다, 섬뜩한 검은 눈이 그리 선고하는 듯했다. 절대권력의 군주인 양 당연한 듯이 하는 말에, 나는 그가 명령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달리 위협적인 투도 아니었는데 난 입술만 달싹일 뿐 반박을 꺼낼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내리누르는 위압감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선연히 느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옛날 글을 오랜만에 꺼냈더니 고칠데가 많군요. 비축분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다시쓰는 기분이 나서(...) 라기 보단 다시 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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