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외전 5화
개관까지는 휘욱이 공을 들였지만, 그 안을 완벽하게 채우기 위해 애쓴 사람은 인애였다.
인애는 남편이 시작해서 마침내 자신이 완성한 전시관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이제 한 시간 후면 VIP들을 상대로 ‘이내 미술관’의 특별 상시 전시관이 공개될 터였다.
이설 자동차의 첫 번째 자동차와 돌아가신 시모가 복원한 미술 작품들이 채워진 공간은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전시관 이름도 ‘아름다울 희’로 지었다. 돌아가신 시모의 이름 끝 자를 딴 전시관은 그녀에게 헌정하는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시관 오픈이 가까워지자, 언론에서는 복원가로 살았던 시모의 삶을 다루는 기사를 앞다투어 내보냈다.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셨을까.
인애는 저와 이룬 가정 말고는 남편이 의지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늘 가슴에 사무쳤다. 성인이 되어 이룬 가정이 아무리 따뜻하다고 한들, 제 뿌리가 있어야 할 세상이 텅 비어 있는 것은 또 다른 공허일 터였다.
인애는 시모가 세상을 저버리기 전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때의 복원실을 전시관 한편에 그대로 재현해 냈다. 남편이 어릴 때 복원실에서 찍은 사진을 조합해서 소품 하나 배치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사진 속에 있는 의자와 테이블부터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가죽 액자, 그녀가 사용하던 붓과 물감까지 그때 그 시절 그대로의 물건을 찾아내느라, 인애는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 컬렉터들의 소장품을 뒤져야만 했다.
막상 계약을 체결한 후 물건을 받아 보면, 전혀 다른 물건이어서 실망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공을 들이다 보니, 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에게 어머니의 전시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지 꼬박 5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개관이 확정된 것이다.
전시관을 둘러보는데, 그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5년 넘게 매달려 온 작업이어서 그런지 막상 개관하려니까 뿌듯하면서도 섭섭하고 서운했다.
부족한 곳은 없는지, 더 잘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쳐야 할 곳을 잊고 그냥 지나쳤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전시관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데, 누군가 인애를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등에 닿는 단단한 가슴과 허리를 감싸는 큼지막한 손, 귓가를 간질이는 숨소리의 주인은 남편이었다.
“고생했어.”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인애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남편에게 살짝 기대었다.
“아쉽고, 서운하고, 막 그래.”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잘했어. 충분히 잘했어.”
따뜻한 응원과 달콤한 숨결이 묻어나는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흐음.”
아직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이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일렀다. 하지만 인애는 잘했다는 남편의 한마디에 지난 5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남편의 입술이 턱선과 뺨을 타고 올라와서는 인애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인애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남편의 키스에 응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사의 인사가 담뿍 담긴 다정한 키스였다.
인애의 상체를 꽉 끌어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인애도 돌아서서 그를 품 안 가득 안고 싶었다. 몸을 슬쩍 돌리려는 순간, 입술이 떨어졌다.
“그대로 있어.”
입술에 부딪히는 그의 목소리가 짐승의 것처럼 낮았다. 크게 숨을 고른 그가 긴장을 풀려는 듯 웃었다. 행사를 앞두고 애써 욕구를 억누르는 남편의 모습은 지독하게 관능적이었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인애는 얌전히 구는 척하면서 그를 자극하는 말을 내뱉었다.
“윤인애, 정말.”
그가 인애의 의중을 정확히 간파했다는 듯이 아내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흐읏.”
전시관 개관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휘욱은 금욕 상태를 유지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내의 몸속을 파고들 때마다 억눌렀던 욕구가 새로이 깨어났다.
“하아.”
휘욱의 숨소리도 여느 때보다 훨씬 거칠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신음성이 터졌고, 심장이 뛰는 속도가 가파르게 치솟았다.
사랑스럽게 붉은 살갗 위에서 입술을 옮겨 가며 휘욱은 쉴 새 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아내는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치 휘욱의 부모를 되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그녀가 완성한 전시 공간을 마주했을 때, 휘욱은 오래전 발밑으로 꺼져 버렸던 세상이 다시금 솟아오르는 듯한 환상에 빠졌다.
어릴 적 어머니의 작업실에서 뛰어놀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끝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기억되던 공간이 그녀에 의해 다른 빛깔로 덧입혀졌다.
인생의 지향점으로 삼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저를 사랑으로 보듬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살아 숨 쉬는 작업실의 전경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했고, 사랑한다는 말로도 아쉬웠다. 온종일 품에 안고 보듬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휘욱은 아내의 입술에 대고도 수십 번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으응.”
그럴 때마다 아내는 듣기 좋은 신음을 내뱉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나도 사랑해.”
다시, 또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휘욱에게는 윤인애가 존재하는 세상이어야 했다. 죽음이 갈라놓는 순간조차도 아까울 것이다. 다시 만나서 사랑하기까지의 공백이 아쉬워서 다시 태어나는 것조차 조바심이 날 것이다. 지금 이대로 영원까지 함께할 수 있기를, 휘욱은 제 몸을 깊숙이 묻으며 바라고 또 바랐다.
*
“아흐읏!”
인애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실내를 매섭게 갈랐다.
“어머님! 이제 다 됐어요! 자, 한 번만 더, 힘!”
의사의 목소리도 급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으으읏!”
인애는 저도 모르게 맞잡은 남편의 손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힘을 주었다. 이제 다 됐다는 의사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아래에서 물컹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나자마자 거짓말처럼 고통이 잦아들었다.
“하아, 하아.”
힘없이 숨을 고르는 동안,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연후가 내놓으라고 했던 동생이 드디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간호사는 이번에도 번데기처럼 속싸개로 돌돌 만 신생아를 남편에게 먼저 안겨 주었다. 남편 역시 이번에도 건네받은 아이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첫째를 경험해 봤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감격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너무, 너무!”
남편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나도 좀 안아 보자.”
인애가 중얼거리자, 남편은 그제야 아이를 넘겨주었다. 둘째 아들을 품에 안은 인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또.”
최휘욱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낳고야 말았다. 둘째는 내심 딸이기를 바랐는데, 또 아들이었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미워한 거야?”
그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무슨 소리야?”
인애가 헛소리를 해 대는 남편에게 물었다.
“미워하는 사람 닮는다며. 나를 미워한 거야, 연후를 미워한 거야?”
“연후가 미워할 데가 어딨어.”
새초롬하게 대꾸하자, 남편이 울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진짜 나를 미워했다고?”
진실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는 괜히 억울해했다. 분명 결혼 초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들어서 사사로운 감정에도 다채로운 반응을 보이는 남편이다.
인애는 남편의 그런 변화가 기꺼웠다. 제 색을 잃고 살았던 사람이 인애로 인해 아름다운 빛깔로 물드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우리 둘째는 이름을 뭐로 짓지?”
인애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최고지. 어때?”
갓 태어난 연후를 바라보며, ‘최고군’이라고 이름을 짓겠다고 할 때와 똑같은 얼굴이다.
이 남자는 연후 때 겪었던 일을 전부 잊은 걸까? 최고지의 별명은 뭐가 될까?
인애는 과거와 똑같이 반응해 주기는 싫어서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난 좋아.”
인애가 대꾸하자,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애 이름이, 장난 같아?”
남편이 대뜸 묻는 말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장난에 애 인생을 거는 사람도 있을까요?”
인애가 태연하게 되묻자, 그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결혼이, 장난 같아?’
‘장난에 인생을 거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와 결혼을 준비하면서 주고받은 대화였다. 과거의 대화를 복기하는 부부는 이제 죽이 척척 맞았다. 함께 보낸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는 듯이 둘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그래서 둘째 이름은?”
분만실에서 입원실로 옮긴 인애가 아이를 안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
때마침 친정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연후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내 동생 왔어요?”
올해 여섯 살이 된 연후는 동생을 만날 생각에 들떴는지,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응, 여기.”
남편이 몸을 숙이며 연후에게 동생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와, 작다. 연후도 이렇게 작았어요?”
“그럼, 연후도 이렇게 작고 귀여웠지.”
연후는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생명체를 만났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아이를 관찰했다.
“안녕, 인후야. 형이야.”
아직 이름을 짓지도 않았는데, 연후가 제 동생을 인후라고 불렀다.
“연후야, 지금 뭐라고 불렀어?”
인애가 부드럽게 물었다.
“인후요. 내 동생 인후. 동생이랑 내 이름 합치면 인연.”
연후의 이름에 쓰이는 한자와 인연이라는 단어에 쓰이는 한자는 다르지만, 기발한 발상으로 이름을 지은 연후가 기특했다.
“그래. 인후 하자. 최인후.”
연후는 손뼉까지 쳐 가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친정 엄마는 인후도 형을 닮아서 똑똑하고 잘생겼다고 해 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인연이 깊어지기 전에 결혼 먼저 한 관계였지만, 이제 뭐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 무엇보다 그윽한 인연 속에서 행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