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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먼저 61화 (61/68)

결혼 먼저 61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대기를 점점 하얗게 물들였다. 때늦은 눈이었다. 봄꽃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고, 연둣빛 잎이 돋아나는 3월 중순.

봄의 만개를 시샘하듯 눈꽃은 소복한 흰색으로 곱게 곱게 쌓여 갔다. 휘욱은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조심스럽게 입단속을 해 보았지만, 웃음이 물린 입술은 호선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 지퍼 좀 올려 줘.”

프랑스의 음악가 에릭 사티가 화가인 수잔 발라동을 위해 만들었다는 곡 Je te veux(나는 당신을 원해)가 매끄럽게 흐르고 있었다. 선율보다 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휘욱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초콜릿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지퍼가 채워지지 않은 등을 그의 쪽으로 돌린 채 서 있었다. 휘욱은 한걸음에 성큼 그녀의 뒤로 다가섰다.

유려한 선을 그리는 풍만한 엉덩이 시작점에 있는 지퍼 끝을 잡고 그녀의 목덜미로 얼굴을 내렸다. 따스한 숨결이 매끄러운 살갗 위로 유연하게 흩어졌다.

“어서.”

채근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휘욱의 심장만큼이나 부드럽게 달떠 있었다. 휘욱은 올려 묶은 그녀의 머리와 목선을 은근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귀엽게 흘러내린 잔머리에 보드랍게 입술을 가져다 대며 천천히 지퍼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이어질까 봐 약간은 짜증을 낼 것처럼 굴더니, 지퍼 소리가 들리자 이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늘은 꼭 가야 해.”

인애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그 어조만큼은 단호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겠답시고 준비를 하고 나면, 언제나 이 고비를 넘지 못하고 침실로 향했다. 그러면 드레스 지퍼쯤이야 스스로 올리면 될 일인데, 인애는 그를 은근히 자극해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늘 이렇게 맨등을 들이밀었다.

“오늘 공연은 꼭 보고 싶단 말이야.”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씨어터의 백조의 호수 내한 공연이 있는 저녁이었다. 단 이틀의 내한 공연 중 마지막 날, 오늘 보지 못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일부러 방문하지 않는 이상 기약 없이 내한 공연을 기다려야 했다.

“그럼 이렇게 맨살 드러내며 꼬시질 말아야지.”

그가 인애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의 치아에 귀걸이가 부딪혀 달그락 소리가 났다.

“아야.”

인애는 엄살을 부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요즘 인애가 어떤 짓을 하든 다 받아 줄 것처럼 굴어서, 그녀는 툭하면 주인 속을 태우는 고양이처럼 제멋대로 굴고 싶어졌다. 물론 그의 사랑스러운 손길을 받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인애는 뭐가 그렇게 즐거우냐는 듯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돌아섰다. 뾰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눈동자에서는 숨기지 못한 그를 향한 애정이 물큰 배어났다.

“공연을 보러 가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그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도통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가자는 거지.”

“근데.”

말끝을 길게 늘이는 그의 끓는 듯한 목소리는 인애의 배꼽 아래도 살근살근 긁으며 데우는 듯했다.

“근데 왜 이렇게 또 사람을 안달 나게 해.”

내가 뭘 했다고.

인애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새침하게 시치미를 뚝 뗐다.

“가자. 또 나 때문에 못 봤다고 삐져서 입 댓 발 내밀지 말고.”

그는 팔뚝에 걸치고 있던 포근한 캐시미어 코트를 인애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인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손수 거들었다. 그가 얼마나 세심하고 자상한 남자인지 인애는 새삼 깨달아 가는 중이다.

공연장 로비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는 얼굴이 없었으면 했지만, 그럴 리가 있나. 꼭 이런 곳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만 골라서 만나는 게 세상 이치가 아니던가.

“어머.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남편에 대한 의부증을 작품 콜렉팅으로 해소하는 사람 중 한 명인 사림 그룹 회장의 부인 조 여사였다. 휘욱의 이설 그룹뿐 아니라 인애의 조부가 운영하는 명례 그룹과도 라이벌 구도를 그리고 있는 곳이 사림 그룹이었다.

조 여사는 재계에서 새로운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인애를 은근히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 여사는 인애가 소규모 갤러리의 갤러리스트로 일할 당시, 그녀를 은근히 깔보고 폄훼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저 동떨어지고 덜떨어진 사람으로 치부하다가, 갑자기 자신들의 세계에 등장한 인애의 존재감에 어느 정도 반감도 들었을 터.

“최 전 부회장이 그랬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최 사장이 고생이 많았지?”

최 부회장이 저지른 비위는 세상에 낱낱이 밝혀져서 초등학생도 다 알 정도였다. 휘욱 부모의 죽음부터, 그들 부자가 저지른 그룹 내 악행까지. 험한 일이 알려지고 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최 전 부회장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며 등장한 여자들만 다섯이었고, 사업체를 빼앗겼다는 중소 업체 경영인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피해를 본 당사자 앞에서 사건을 입에 올리는 건 2차 가해가 아닌가. 하긴 그걸 즐기기 위해 저 입이 존재하는 거겠지. 인애는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조 여사의 흐리멍덩한 눈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이 사람이 옆에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조 여사는 약간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가라뜬 눈으로 휘욱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림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큰아버지고, 핏줄인데……. 너무 독하게 그러지는 마요. 세상 보기 불편해.”

대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저게 지금 고상한 척한다고 떠드는 말이라기엔 맥락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인애는 재미있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과장되게 웃었다. 조 여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인애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예전부터 조 여사님 말재간 좋으신 건 알았지만, 이렇게 농담을 잘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인애는 캐시미어 장갑을 벗은 뒤 두 손을 턱 아래에서 꼭 맞잡았다. 인애의 네 번째 손가락에서 25캐럿 다이아몬드가 휘황하게 빛났다. 조 여사의 눈길이 자연스레 반지로 향했다. 조 여사가 세상에서 가장 못 견디는 것, 가장 눈꼴시게 생각하는 게 바로 애정이 넘치는 부부였다.

“그치, 자기야? 나도 평생 사랑받고 살려면 조 여사님한테 좀 배워야겠어.”

인애는 자신이 말하고도 수줍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표정을 단속하는 척했다. 조 여사는 흐음,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사님, 반어법이신 거 다 알아요. 이 사람이 마음이 약해서 더 독하게 하지 못한다고 다그치시는 거죠? 권선징악은 분명해야죠. 안 그러면 보는 사람 마음이 참 불편해져요. 죄인이 따끔하게 벌 안 받는 것만큼 불쾌한 게 또 없잖아요. 이번엔 솜방망이 처벌은 없을 거예요. 재벌 봐주기식 수사도 없을 거고요.”

조 여사는 자신이 분위기에 말렸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주위 눈치를 보며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쳐 댔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재벌이라는 이유로 이래저래 피해 가는 거, 기업의 사회적 책임하고도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인애는 비밀스러운 말을 덧붙일 것처럼 상체를 조 여사 쪽으로 살짝 숙였다.

“제 얼굴에 침 뱉기죠. 우리 같은 선량한 사람이 그런 무뢰배 때문에 피해 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같은 재벌이라는 이유로 우리까지 벌레처럼 본다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잖아요.”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인애를 몸서리를 한 번 쳤다. 그러자 조 여사가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그런 사람이랑 우리가 같은 부류는 아니지.”

턱끝을 우아하게 치켜든 조 여사는 이거 보통이 아니라는 눈빛으로 인애를 응시했다.

“아 그리고 여사님. 요즘도 여전히 작품에 관심 많으시죠?”

인애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조 여사에게 조곤조곤 물었다.

“내가 예술을 좀 탐닉하기는 하지.”

빤히 보이는 컴컴한 사정을 감추려는 듯 조 여사는 엄숙한 낯빛을 했다.

“뉴욕 경매에 렘브란트 초기 스케치가 경매로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벌써 파리 박물관들이 덤비고 있나 봐요. 조 여사님 안목과 재력이면 충분히 손에 넣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유럽과 뉴욕의 굵직한 업자들을 비롯해 유명 박물관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작품이 경매에 나온다는 소문이었다. 아까 조 여사가 큰 목소리로 휘욱을 건들던 순간부터 이쪽으로 쏠려 있던 이목이 더욱 집중되었다.

“어머, 조 여사. 이번에 큰 건 하나 하겠네.”

멀리서 듣고 있던 무리가 조 여사에게 다가오며 한마디씩 거들어 댔다. 남들 앞에서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조 여사는 빳빳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큰돈을 써야 하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물론 안타깝게도 루브르까지 덤비고 있는 렘브란트의 스케치를 조 여사가 손에 넣을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지만.

사모들의 고상한 대화에 감히 자신은 낄 위치가 못 된다는 듯, 인애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눈인사를 건넨 뒤 휘욱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사냥감이 된 조 여사가 물어뜯기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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