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60화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떨렸다. 조부를 독대할 때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휘욱 씨, 지금 어디야?
그녀가 일상 보고를 원하는 전화를 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
“본가에 왔다가, 이제 나가는 길이야.”
― 최 회장님 만났어?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가라앉았다.
“어, 방금.”
― 휘욱 씨, 무슨 일 있는 거야?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듣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에게 손톱만큼도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지만, 그녀가 휘욱의 모든 상처를 감싸 안아 줄 것처럼 굴 때면,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충동마저 일곤 했다.
“아냐. 아무 일도 없어.”
― 최 회장님, 나는 되게 예뻐하시는데. 나랑 같이 갈 걸 그랬다. 그럼 휘욱 씨 기분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녀의 말처럼 최 회장은 핏줄도 아닌 그녀를 유독 예뻐했다.
“네가 전화한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
그녀가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맑게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최 대표님, 이내 미술관으로 좀 오시겠어요?
“미술관?”
그녀에게 헌정하는 미술관이었지만, 그녀는 이내 미술관하고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명례 재단 일을 시작한 그녀는 휘욱만큼이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응, 지금 올 수 있어?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의 톤보다 살짝 들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올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었지만, 그녀는 반드시 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네가 오라면 가야지.”
순순히 대꾸하자 그녀가 겸연쩍게 웃었다.
― 얼른 와. 보여 줄 거 있어.
통화를 마친 휘욱은 오후 일정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내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은 기획 전시들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직 상시 전시관에 관한 구체적은 계획은 없었다.
미술관 주 출입구로 들어서자, 직원 중 한 명이 다가와 휘욱을 알은체했다.
“오셨어요, 대표님?”
그녀와 같은 갤러리에서 일했다던 직원이다. 늘 김 대리라고 부르는 것만 들어서 그녀의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다.
“그 사람 어딨습니까?”
“2층 복원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냥하게 웃는 직원에게 묵례하고 2층으로 향했다. 이설 자동차의 첫 번째 자동차가 놓여 있는 복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가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며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있었네.”
휘욱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넋을 놓은 채로 벽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어, 휘욱 씨. 왔어?”
“왜 텅 빈 벽을 올려다보고 있어?”
그녀는 어여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여기 걸리면 좋을 것 같아서.”
“여기? 뭘?”
휘욱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드디어 이내 미술관에 놓을 첫 번째 작품을 골랐나 보다. 그런데 전시실이 아닌 복원실에 그림을 건다는 말이 조금은 의아했다.
“뭘 걸고 싶은데?”
그녀는 특유의 장난기가 어린 다정하고 상냥한 눈빛으로 휘욱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보여 줄까?”
휘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그녀가 휘욱의 손을 잡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 복원 중인 자동차 옆에 놓인 커다란 이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놓인 작품은 하얀색 실크 천으로 덮여 있었다.
“이거야.”
그녀가 조심스럽게 실크 천을 걷어 냈다. 그 안에는 혹여 망가질세라 유리관 속에 넣어 둔 그림이 한 점 있었다.
“이거…….”
작품을 마주한 휘욱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들로 여길 채워 달라고 했잖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휘욱 씨인데? 휘욱 씨를 미술관에 갖다 놓고 전시할 수는 없잖아.”
휘욱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휘욱 씨를 이 세상에 있게 해 주신, 어머님께서 마지막으로 복원하신 작품이야.”
넋을 놓고 그림을 바라보던 휘욱은 천천히 돌아서서 인애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갖고 왔어?”
“사실 정 여사님 도움을 좀 받았어. 정 여사님이 비싼 값을 부르니까, 큰어머니가 혹하더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안 판다고 난리를 치더니. 최 부회장이랑, 최광욱 대표가 나란히 구속되고 자금 압박이 좀 심했나 봐. 어머님이 복원하신 작품들만 전부 정 여사님 통해서 내가 사들였어.”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동차 복원 끝나고 나면, 어머님이 복원하신 작품들만 여기 모아서 상시 전시관 열자. 이설에서 처음 만든 자동차랑 같이 전시하는 거야. 어머님 작업실 분위기도 여기에 그대로 살려 두고. 복원실이 전시실이 되는 거지.”
그녀는 휘욱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휘욱 씨한테 뭔가 해 주고 싶었어. 어때, 마음에 들어?”
그녀가 환히 웃으며 물었다.
“고마워.”
휘욱은 세상 전부를 끌어안듯 팔을 넓게 벌려 그녀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이제 휘욱에게 그녀는 세상 그 자체였다.
“그냥 회화 작품도 복원하는 데 굉장히 힘들거든. 엑스레이 기계 사용해서 붓칠 연구하고, 그 당시 물감 색 재연하려고 성분 분석도 하고. 그런데 어머님이 복원하신 작품들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한 작업이었어. 아상블라주 작품을 처음 보는데,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더라. 그 멋진 작품이 이상한 컬렉터 방 안에 있는 게 숨이 막혔어, 나는.”
그녀가 휘욱의 왼쪽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속삭이듯 덧붙였다.
“어머님 정말 너무 멋진 분이셔. 살아 계셨다면 내가 엄청 따랐을 거야.”
“그래, 어머니도 살아 계실 때 너 많이 예뻐하셨어.”
“아, 맞다.”
그녀는 생각난 것이 있다며 휘욱의 품을 잠시 벗어났다. 품 안에 가득했던 따뜻한 온기가 갑자기 사라지자, 순간 외로움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또 보여 줄 거 있어.”
그녀가 재킷 주머니에서 꺼내 든 것은 초등학교 때 썼다던 단어 암기장이었다.
“이건 왜?”
“이거 봐 봐.”
그녀가 엄지로 단어장이 촤르륵 넘어가도록 했다. 그 안에는 단순하게 표현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따로 놀다가, 같이 손을 붙잡고 노는 장면이 만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자,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였다.
“이거 나 어릴 때 어머님이 그려 주신 거야.”
“정말?”
“응. 내가 공부 안 하고 나가서 놀고 싶다고 했더니, 오빠랑 나랑 손잡고 노는 거 그려 주셨어. 이게 그 증거고.”
그녀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서 휘욱에게 보여 주었다.
[휘욱과 인애. 사이좋게 잘 지내렴.]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엄마가 창고에 있는 내 짐 정리하다가 발견했다면서 주셨어.잘 지내자, 어머님 말씀처럼 사이좋게.”
그녀가 작은 손으로 휘욱을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휘욱은 그녀의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기울이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마워.”
“고맙기는. 이 그림 그려 주신 건 어머님이셔.”
“그걸 잘 간직해 줘서 고마워.”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위무하듯 휘욱의 입술에 닿았다. 휘욱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멀어지려는 입술을 물고는 혀를 얽었다.
아무것도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일을 벌이다니. 서서히 퍼져 나가는 행복감에 가슴이 벅찼다.
“으응.”
그녀가 고개를 모로 비틀며 입술을 떼어 냈다. 휘욱은 아쉬운 마음에 그녀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오후에 사무실 꼭 복귀해야 해?”
그녀의 물음이 어쩐지 야하게 들렸다. 이미 오후 5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내일 아침에 일처리를 한다고 해서 큰일이 날 것도 없었다.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보았다. 그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어떻게 휘욱을 꼬여 낼지 궁금해졌다.
“그래? 아쉽네. 아주머니 이제 안 오잖아. 혹시나 우리 자기 바로 퇴근해도 되나 싶어서.”
그녀가 생전 처음 듣는 애칭까지 읊어 가며 매혹적으로 웃는다. 휘욱은 그녀와 이마를 맞댄 채로 속삭였다.
“그럼, 바로 퇴근해야겠다. 그치?”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그녀가 더 진하게 웃는다.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버겁게 뛰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휘욱은 침대로 갈 새도 없이 그녀를 현관 앞에서 안았다.
“흐읏, 휘욱 씨. 안으로 들어가. 응?”
힘이 다 빠져서 매달리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이번에는 소파에서 멈춰 섰다.
“아아.”
그녀가 신음을 내지를 때마다, 그녀를 원하는 감각이 그 부피를 점점 부풀려 나가는 듯했다.
“사랑해, 휘욱 씨.”
못 참겠다는 듯이 그녀가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며 내뱉은 말에 휘욱은 그녀를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서 부서졌다. 그녀가 가쁜 숨을 고르는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휘욱은 마침내 그녀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그녀가 몸서리가 난다는 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휘욱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만할까?”
그녀가 힘들다고 하면 물러설 생각이었다.
“아니.”
밤새도록 안는다고 해도 부족할 것 같은 그녀를 다시금 안았다. 그녀는 자지러지며 몸을 비틀었다. 휘욱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속삭였다.
“사랑해, 인애야.”
“응.”
신음인 듯, 대답인 듯 기분 좋게 나른한 음성이었다.
“나도 사랑해, 휘욱 씨.”
“사이좋게 살자. 평생.”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올겨울 첫눈이 창밖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세상을 탈색해 버리는 흰 눈처럼 그녀는 휘욱의 모든 아픔을 탈색해 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태어나서 이토록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지키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사이좋게 지내라는 어머니의 말씀처럼, 평생을 그녀와 행복하게 보내리라는 다짐을 하며 휘욱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고 잠이 드는 것, 이것보다 더 진한 행복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 평범한 일상을 즐겨 그린 화가들이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색채와 구도로 평범한 삶에서 비범한 순간을 끄집어내곤 했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명화 속 한 장면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이는 많지 않다.
휘욱은 인애의 매끈한 이마에 입술을 붙인 채로 미소를 머금었다. 남은 일생은 그녀가 있기에 매 순간이 명작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