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57화
휘욱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정 실장이 의문 어린 눈빛을 보였다. 휘욱은 복잡한 감정을 갈무리하며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큰어머님이 고가의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뇌물 수수 혐의와 이설 건설 비자금 조성에 연루되었다는 기사도 순차적으로 흘리시고요.”
오랜 시간을 공들여 준비한 일이었다. 혹자는 복수가 제 발을 옭아맬 수도 있는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건 죄지은 사람이 복수당할까 봐 두려워서 하는 말이 아닐까.
끝내 최 부회장이 무너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음 기회를 노려 보자는 생각 따위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이후로 접었다.
반드시 단번에 목을 베어 내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당했던 수모와 그들이 끼쳤던 해악이 그녀에게는 눈곱만큼도 미치지 않아야 한다.
보고를 마친 정 실장이 집무실을 나가고 난 뒤, 휘욱은 슈트 재킷을 입으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아직까지 그녀와의 관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잠시라도 그녀를 곁에 두고자 부린 욕심은 스스로 생각해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매사에 철저하게 방비하는 휘욱이 무모한 짓을 저지른 것은 그녀와의 결혼이 처음이었다.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관계를 타인에게 이해시키려 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한 일을 모두 지우고, 순수한 고백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녀는 요즘 명례 재단 일로 바쁘게 지내는 듯 보였다. 휘욱보다 귀가가 늦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집에 와서도 정리된 자료를 들여다보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녀가 부모님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그것이 휘욱에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상황을 면죄부 삼아 상처 준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이기심이지, 사랑이 아니다. 휘욱은 그저 미안해할 뿐이었고, 그녀와의 관계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어색해진 것 같았다.
섣불리 위로를 건넬 수 없는 사건임을 안다는 듯이 그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가 휘욱을 멀리하는데도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건, 개관식 날 불같이 화를 내던 그녀의 모습이 뇌리와 심장에 깊숙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휘욱의 역성을 들어 주며, 최 부회장에게 당차게 할 말을 다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마음껏 껴안아 줄 수도, 입을 맞출 수도, 딱 붙어서 잠자리에 들 수도 없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그녀가 거리를 좁혀 가는 휘욱을 허락해 주길 바랄 뿐이다.
*
명례 재단이 벌인 사업을 파악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인애는 재무 담당자와 인사 담당자, 기획 팀장 등 다양한 인물들과 접촉하며 재단의 속성에 대해 익혀 가는 중이었다. 퇴근도 잊고 자신을 돕는 그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향후 6개월간의 재단 운영 로드맵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재단 일을 인수인계 받으면서 인애의 곁을 수행 비서처럼 따라다니는 직원이 말을 걸었다.
“손님이요?”
갑작스러운 말에 집중력이 흩어진 탓에 인애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지금 인애가 명례 재단에 드나드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그와는 요즘 조심스레 거리를 두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의 일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는 있지만, 온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또 그가 부모님의 죽음에 관한 치부를 타인에게 낱낱이 들키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미안해졌다.
시간이 필요했다. 각자가 서로에게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되짚으며, 어느 정도 무뎌질 만큼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그저 덧없는 시간이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소극적인 대응이라고 탓할지 모르지만, 때론 소극적인 대응 사이에 엉성하게 얽힌 관계망에 해법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누가 왔는데요?”
직원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마치 무미건조하게 행동하라고 훈련받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그녀는 딱딱했다.
“윤 교수님, 이사장님의 아버님께서 오셨습니다.”
직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사장님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어색하다.
“아빠가요? 지금 어디 계세요?”
“1층 접견실로 모셨습니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인애는 곧장 소회의실을 나서서 접견실로 향했다. 전화도 없이 인애를 찾아올 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애가 이곳 명례 재단에 와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고 있다는 것도 의아했다.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색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인애를 맞았다.
“아빠, 어디 안 좋으세요?”
어떻게, 왜 이곳에 오셨느냐는 물음보다, 걱정 어린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며칠 잠을 못 자서. 그런데, 이제는 괜찮다.”
아버지는 인애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회장님께 들었다.”
조부가 자신과의 거래를 아버지께 말씀드렸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철렁했다. 부모를 지킨답시고 원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한 딸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떨지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할아버지 만나셨어요?”
아버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인애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꼭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어조에서 어쩐지 불편한 기색이 느껴졌다.
“말씀하세요.”
“휘욱이 말이다.”
사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아버지를 인애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신효와 파혼하기 전에 나를 찾아왔었다.”
“네?”
인애는 멍해진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조부와 거래를 했던 것처럼, 아버지와 그 사이에도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아빠…….”
당황스러워서 뭘 어떻게 물어야 할지 감이 서질 않는다. 아버지는 그간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말해 주었다. 인지 부조화가 오는 것처럼 머릿속이 산란해졌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저와 결혼하려는 목적으로 신효 언니와 파혼했다는 게 사실이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못난 아비도, 휘욱이도 용서해 다오.”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그와 손을 잡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타까운 궁지에 몰려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미어졌다.
고마워해야 할까, 그 사람한테.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줘서 고맙다고, 아니면 아버지까지 매수해서 나와 결혼을 하고 싶었느냐고 화라도 내야 할까.
답답하게 둑을 쌓아두었던 가슴이 저도 모르게 허물어져 내렸다.
“아빠, 잘못하신 거 없어요. 저한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도 할아버지랑 거래한 건 마찬가지예요.”
같은 목적을 위해 서로를 속이고, 서로에게 속았다. 아버지는 이제 명례 재단을 위해 애쓰는 일을 그만둬도 된다고 했다. 아버지의 향후 거취에 관해 조부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그리고요.”
인애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휘욱 씨가 저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던가요?”
아버지는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더구나. 처음에는 서로 불미스러운 거래 때문에 그런 줄만 알았지. 그런데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러더구나.”
“뭐라고요?”
인애는 불안하게 떨리는 숨을 조심스레 들이켰다.
“나는 인애 너한테 인자하고 좋은 아버지로 남아 있어 달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와 거래한 일은 밝히지 말라고. 자기는 나쁜 놈이 되더라도 평생 속죄하며 살 거지만, 네가 아버지와 등져서 상처받는 건 원치 않는다고 말이다.”
가슴을 타고 서러움이 젖었다.
“너한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휘욱이 안쓰러운 아이야.”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목적보다, 사위인 휘욱을 두둔하려는 목적으로 인애를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안쓰러운 사람, 사랑을 몰라서, 사랑이 버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던 사람.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흘러넘친 감정과 함께 흩어지는 듯했다.
아버지와 헤어진 인애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는 요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찍 귀가해 집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아주머니는 여전했지만, 두 사람은 예전처럼 작위적인 연기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빨리 귀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그와 얼굴을 마주하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지만, 그를 빨리 보고 싶었다.
갑자기 그리운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사랑을 모르는 사춘기 소년 같다는 결혼 초의 감상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인애의 휴대전화가 부드럽게 진동했다. 발신인은 휘욱이었다.
“여보세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 나야.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응.”
짧은 대꾸에 복잡한 감정을 싣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 집에 들어갔어?
“응.”
― 잠깐 밖에서 볼까?
“어딘데?”
― 지하 주차장이야. 내려올래?
통화를 마친 인애는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는 공동 출입구 앞에 정차해 놓은 차 옆에 서서 인애를 맞았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환히 웃는 그의 얼굴은 무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인애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지상에 올라온 차는 한강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차가 멈춰 선 곳은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북악 스카이웨이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