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55화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었다.
“아버지께서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사실을 확인시키듯 말했지만, 그 속에는 최 부회장의 말을 끌어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최 부회장은 휘욱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
“순진하기는. 그놈이 사고로 죽었으면, 그렇게 사고 처리가 빨랐을 리가. 마누라가 죽었다고 태풍이 오는데도 공항으로 이동하겠다는데, 그게 뒤지려는 의도가 아니면 뭐겠어? 그래서 뜻대로 해 줬지, 뭐.”
“뜻대로 해 줬다니요?”
그의 나직한 물음에 최 부회장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읊조렸다.
“트럭으로 밀어 버리라고 했지, 뭐. 이쯤 되면 하늘도 날 도운 게 아닌가? 빗길 사고로 자연스레 위장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마치 대단한 사업적 성공을 이룬 사업가가 자신의 업적을 떠벌리듯 자랑스러워하는 말투였다.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치들이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에 대한 대가를 얻는 것을 미련하다고 여기고, 요행과 투기를 일삼으며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에 맛 들인 미친놈 말이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조차도 가벼이 여긴다. 특히 재물을 두고 겨뤄야 하는 상대라면 악랄하고 치밀하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런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는 학자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살아생전에 이설 그룹의 실세로 꼽혔던 그의 아버지는 최 부회장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최 부회장은 능력으론 동생을 뛰어넘을 수 없으니, 결국 제거하는 방법을 택했나 보다.
“우리 조카님이 순진해서 아직도 사고사라고 믿고 있었나 보네. 이렇게 순진하니까, 그렇게 순진한 여자를 만났지.”
그의 턱이 굳어 가는 게 보였다.
“아니, 얼마나 순진한지. 그 갤러리 스프레이 사건 말이야. 그게 네가 벌인 짓이라고 하니까 믿던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가 분개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 이 중요한 말을 먼저 꺼냈어야 했는데 말이야. 내가 갤러리에서 갤러리스트 노고를 치하하느라 마음이 들떠서, 인애 갤러리 일도 자네가 그런 거라고 말했지, 뭔가.”
최 부회장은 기분 나쁘게 낄낄 웃었다.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인애가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인애는 친정에 다녀온 뒤로 그와 별다른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 미술관 개관 행사가 없었다면, 둘이 같이 외출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최 부회장을 만났다고 말할 기회도 없었다. 사실 최 부회장이 말했던 것에 대해 휘욱에게 따져 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인애에게 미끼를 던졌는데도 휘욱이 아무렇지 않게 결혼 생활을 하는 것 같아서 몸이 달았을 것이다. 결국, 최 부회장은 직접 그를 자극하는 방법을 택했고, 이 지경까지 치닫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최 부회장의 목적은 지나치게 분명했다. 그룹의 실세로 자리매김해 가는 그를 망쳐 놓는 것, 그 과정에서 인애를 이용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었다.
불안한 박자로 크게 뛰어 대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인애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잠시라도 함께하고 싶었다는 그의 고백, 이제 와서 그의 이상했던 고백이 묵직한 설움으로 다가왔다.
사랑이 지나치게 버거운 남자,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가 자신과의 결혼을 택했을 때, 어떤 간절함이 작용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눈물 뚝뚝 흘릴 것 같은 눈을 보니까 믿는 눈치더라고.”
휘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애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괴로운 얼굴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저런 얼굴로 최 부회장을 대하면 약점을 잡힐 게 뻔했다.
“아뇨. 안 믿었어요.”
끼어들까 말까 고민했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말을 던지기는 했지만, 곧 미술관의 공식적인 개관식에서 연설해야 하는 그를 자꾸 도발하고, 뒤흔들어 놓는 최 부회장을 견딜 수가 없었다.
최휘욱, 당신이 여기까지 어떻게 버텨 왔는데, 저깟 놈이 나를 걸고넘어진다고 무너져.
또 한편으로는 한번 속아 줬을 뿐인데, 자신을 천치 취급 하는 놈을 가만히 두고 보기 싫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대번에 문 쪽으로 향했다. 별채 안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는지, 휘욱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었다.
“인애야.”
그가 당황한 음성으로 인애의 이름을 불렀다. 인애는 그의 곧은 시선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되게 순진하시네요. 그 위치까지 오르셨는데,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셔서야.”
인애는 안타깝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곁에 섰다. 최 부회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황당해했다.
“뻔히 보이는 수를 쓰는데, 넘어가 드려야죠. 어른이 그렇게 나오는데, 나이 어린 사람이 장단 맞춰 드려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요?”
“윤인애 양, 자네 지금 나한테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인애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최 부회장이 볼 수 있도록 화면을 그쪽으로 향하게 했다.
“여기서 누가 가장 심한 말을 했는지, 한번 들어 볼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 부회장이 그악한 말을 퍼붓던 시점부터 인애는 휴대전화 녹음 어플을 통해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했다.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의 아내를 범한 것도 모자라, 동생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 악인의 진술이 고스란히 인애의 휴대전화에 기록되었다.
“이리 내.”
최 부회장은 귀찮은 일을 마주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내놓으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이걸 제가 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인애가 진한 웃음을 머금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인애야.”
휘욱은 인애가 최 부회장을 자극하는 게 두려운 듯 침잠한 목소리를 냈다. 인애는 휘욱의 커다란 손을 꽉 움켜잡았다. 꽤 긴장했는지 늘 따뜻했던 그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인애는 자신의 손에 있는 온기를 그에게 불어 넣듯이 악력을 더했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는 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탐욕으로 그득한 최 부회장에게 둔 채로 입을 열었다.
“휘욱 씨, 잘 봐 둬.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좋은 말로 해서는 안 통해. 휘욱 씨처럼 착한 사람이 상대하기 버거우면, 나한테 맡겨.”
“착한 사람? 자네가 휘욱이 녀석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야.”
최 부회장은 세상천지에 가장 선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목소리로 읊조렸지만, 지나치게 가식적이었다.
“그리고 감히 쓰레기라니. 자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하는 소린가?”
명백하게 인애를 겁박하는 투였다.
“저 협박하시는 건가요?”
최 부회장은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럴 리가.”
그러고는 비열하게 덧붙였다.
“시간 아깝게 협박은 왜 해. 그런 수고를 할 시간에 움직여서 행동으로 보여야지. 세상이 말로만 돌아가나, 어디?”
최 부회장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이 거만하게 굴었지만, 이따금 불안한 시선으로 인애의 휴대전화를 살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빼앗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얕은 수가 눈에 보였다.
“해 보세요, 어디.”
인애는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방법을 택했다.
“뭐?”
최 부회장은 무뢰배들이나 쓸 법한 저속한 어조로 되물었다.
“행동으로 보여 주시라고요. 단, 그때는.”
인애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아마 명례 그룹과 최 부회장님의 전면전이 될 겁니다.”
전쟁을 선포하듯 장엄하게 말했다. 준열하고 엄정한 시선으로 최 부회장을 단죄하듯 쏘아보았다. 엄벌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 같아서는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려 주고 싶었다.
“어린 여자라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 명례 그룹 윤 회장님이 노망이 나셔도, 우리 이설하고 척질 분은 아니시지.”
인애는 가소롭다는 듯이 대꾸했다.
“누가 이설 그룹하고 척진다고 했나요? 최 부회장님을 상대할 거라고 했지. 이 녹음 파일이 만천하에 공개된다고 해도, 이설 그룹이 최 부회장님을 보호할지는…… 글쎄요.”
이설 그룹 내에서 흔들리는 그의 입지를 반영한 말이었다.
“이놈의 계집애가!”
최 부회장은 성정이 올곧은 사람이 아니었다. 입과 손을 함부로 놀리는 데 거리낌이 없는 인간이었다. 모 기업 부회장이 비서진을 폭행해서 구설수에 올라 있다는 증권가 찌라시의 주인공이 바로 최 부회장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다.
최 부회장은 휘욱이 곁에 서 있는 것도 망각한 채 인애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내내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인애를 지켜보기만 하던 그가 순식간에 움직였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최 부회장이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괜찮아?”
그가 인애의 양어깨를 잡아 돌리며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분노와 염려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휘욱 씨는 괜찮아?”
인애가 무슨 의도로 질문을 던진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가 미간을 좁혔다.
“겨우 한 대 친 거로 속이 풀리겠어? 내가 망봐 줄게. 죽도록 패.”
인애는 한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냥 죽여 버리자. 우리도 사고로 위장하지, 뭐. 여기 휘욱 씨 재단이잖아? CCTV가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과격한 물음에 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인애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뭐 해? 저 새끼 도망가잖아. 저대로 도망가게 둘 거야? 죽도록 때려 주라니까?”
최 부회장은 앓는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문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