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54화
“내가 바쁜 사람에게 괜한 제안을 했나요?”
인애의 대답이 즉각적으로 흘러나오지 않은 탓에 물은 말이라고 여겼다.
“요즘 갤러리도 그만두고 쉬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다는 듯 묻는 말에 인애는 애써 침착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저도 이번 전시는 처음 접하는 입장이라, 감히 제가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대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예의를 차린 인애의 대답에 최 부회장은 흡족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자네 참 아까운 사람이야.”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며, 과장되게 고개까지 흔들어 보인 최 부회장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인애는 최 부회장에게서 대각선으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의 뒤를 따랐다. 비서진은 최 부회장이 미리 언질을 해 놓은 것인지 어느새 전시관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최 부회장은 인적이 드문 전시관에 들어서며 걷는 속도를 늦췄다.
“일하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하지는 않고?”
“네, 괜찮습니다.”
인애가 명례 재단 쪽 일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최 부회장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막중한 책임감으로 열심히 해 오던 일을 남편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한가.”
그는 우뚝 멈춰 서서 인애의 표정을 살피듯 물었다. 최 부회장의 등 뒤에는 극사실주의 작가가 광화문 집회를 주제로 그린 작품이 걸려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네, 이 사람.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참……. 이렇게 착하니 그렇게 속았지.”
얼마 전 최 부회장의 비서가 찾아와 인애는 모르고, 최 부회장은 알고 있는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최 부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 최 부회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호기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네 전시관에 말썽 부리고 간 치들 말일세. 휘욱이가 고용한 놈팡이들이었다는데, 몰랐나?”
물음을 듣는 순간 뭉근한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시관을 망치라고 지시한 이는 휘욱이 아닌, 최태진 부회장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인애는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최 부회장이 원하는 인애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 부회장은 인애가 휘욱을 오해하고 상처받고 물러서기를 바라는 의도로 인애에게 접근한 듯 보였다.
인애와의 결혼을 통해 명례 그룹을 등에 업은 휘욱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인애가 등을 돌리면 휘욱은 명례 그룹과 척을 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휘욱의 곁에 있는 인애가 최 부회장에게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눈엣가시일 것이다.
“허허, 참. 전시관을 스프레이로 도배하고 도망간 무뢰배들 말이야. 휘욱이가 자네 갤러리 다니는 꼴 보기 싫어서 그리한 거라네. 내 자네를 만나면 언젠가는 이야기해 주려고 했는데. 내 조카지만 몹쓸 놈이지. 아내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최 부회장은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럽다는 듯이 인애를 바라보았다. 인애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혀 몰랐다는 듯이 굴었다. 진위를 모르는 자극적인 이야기에 휘말리지 않고, 대화를 빨리 끝내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속아 넘어가 주는 척하는 게 상책이다.
“설마, 그이가 그랬을까요.”
남편이 절대 그랬을 리 없다는 듯이 순진하고 무구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최 부회장은 인애의 기질을 파악하려 애쓴 듯했다. 인애가 커리어를 중요시해 왔다는 것,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최 부회장은 인애의 기민한 성격을 파악할 여유는 없었나 보다.
“그이가 그랬을 리가 없어요. 제가 갤러리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아는걸요.”
인애는 울분에 찬 표정을 지으며 최 부회장을 바라보았다.
“휘욱이 그놈이 참 악랄한 놈이야. 제가 갖고 싶은 건, 물불 안 가리고 덤벼. 내 자네가 딸 같아서 해 주는 말이야.”
최 부회장의 손이 인애의 어깨를 다독이는가 싶더니, 등허리를 타고 내려와 잘록한 허리를 훑고 엉덩이가 시작되는 부분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더러운 새끼.
두꺼비처럼 두껍고 시꺼먼 입술에는 색욕이 가득했고, 초점을 흐릿하게 뭉개 놓은 듯한 눈동자는 징그러운 성적 도발을 숨기지 못했다. 발정제를 맞아 미쳐 날뛰는 금수가 된 듯한 모습이 역겨웠다.
딸 같아서 해 주는 말? 딸 같은 사람의 몸을 더듬는 버러지보다 못한 놈.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지만, 인애는 한숨을 몰아쉬며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확인할 게 있어서요.”
“응, 응. 그래야지. 어서 가 봐.”
마치 최 부회장이 한 말을 휘욱에게 따져 물을 것처럼 급하게 전시관을 빠져나갔다. 물론 그에게 그 사건의 진위 여부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은 그가 아닌 최 부회장 쪽에서 저지른 일인 게 분명했다.
인애와 휘욱 사이에 오해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에 저런 일을 저지른 거라면, 대체 그동안 그에게는 무슨 짓을 하면서 살아왔을까.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최 부회장을 상대하기엔 아직 그도, 자신도 너무 약했다. 더 많이 가져야 했다. 이 바닥에서는 돈이 권력이고, 면죄부였다.
또다시 조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최 부회장이 인애에게 직접 접근해 왔다는 것은 이제 더한 짓도 하겠다는 의미였다. 가슴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빠르게 뛰어 댔다.
안쓰러운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스러운 그와의 관계가 답답했다.
*
이설 자동차에서 설립한 미술관이 프리 오픈 기간을 마치고, 정식으로 개관하는 날이었다. 휘욱은 아름답게 치장한 인애와 함께 미술관으로 향했다.
타오를 듯 붉게 물든 나뭇잎보다 인애의 입술이 더 매혹적으로 붉었고, 높은 하늘만큼이나 인애의 자세는 고아했다. 휘욱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르고 인애만을 파고들었다.
“일전에 여기서 있었던 일은 미안해.”
미술관 후원에서 그와 가은이 저질렀던 일을 사과하는 말이었다.
“괜찮아. 나도 그 여자 머리채 잡았었잖아. 뭘 그런 걸 가지고 사과를 해, 새삼스럽게.”
인애는 그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의 곁에 설 때마다 인애는 마음속 깊이 다짐한다. 절대 이 남자의 품 안으로 다시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평소보다 다소 강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그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는데, 한마디도 지고 싶지 않은 충동마저 일었다.
조용히 후원을 따라 걷고 있는데, 그의 비서가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달려와 그에게 귓속말을 해 댔다.
인애는 자신이 들으면 안 되는 정보 같아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정보를 기를 쓰고 듣는 것은 괜히 피곤해지는 짓이었다.
“잠깐만.”
휘욱은 인애에게 양해를 구하듯 안타까운 미소를 한 번 지어 주고는 미술관 안으로 향했다.
인애는 홀로 후원을 거닐었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땐 자신의 남편과 남편의 곁을 당당하게 지키고 있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서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헬레니즘 양식을 따른 조각은 아름다웠고, 세심하게 심긴 꽃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제 차례를 기다리며 사계절 내내 피고 지고를 반복할 것처럼 보였다.
어느 계절이든 아름다운 꽃과 조각을 볼 수 있는 비밀의 정원을 오래도록 구경한 인애는 별채를 거쳐 본관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직 공식 개관 행사를 시작하지 않은 데다가, 별채는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되는 범위가 아니었기에 괜히 더 가 보고 싶었다.
별채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여러 개의 전시관 너머 멀리에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인물들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미간에는 미세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지금 누구를 만났다고 했습니까?”
분노한 감정을 억누르는 그의 목소리가 지극히 낮게 울렸다.
“자네가 참 인물 하나는 잘 봐 뒀더라고. 인애인지 인아인지 죽은 지희랑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자신과 비교하는 최 부회장의 어조는 어딘지 모르게 불순하게 들렸다.
“경고했을 텐데요. 내 아내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최휘욱. 너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무나 건드리는 그런 무뢰한으로 보여? 네 어미는 나한테 제발 좀 해 달라고 매달려서 그런 거고. 명례 그룹 손녀딸 건드렸다가는 내가 제명에 못 죽지.”
이죽거리는 웃음소리에 인애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범한 큰아버지, 휘욱이 가진 모든 것을 해치려고 드는 최 부회장이라면 인애에게도 충분히 손을 뻗칠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했던 사랑에 대한 무참한 변명에 일면 수긍이 가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게 웃으며 등허리를 훑어 내려가던 징그러운 손길의 섬뜩함이 떠올라 인애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인애같이 순진한 애는 안 좋아해. 애가 남자 경험이 있어야, 데리고 놀기 좋지. 안 그래? 네 어미는 그런 데 전문이었잖아. 아, 모르려나? 아무리 몹쓸 사람이라도 제 아들놈이랑은 안 붙어먹었겠지. 시숙인 나한테는 들러붙었어도.”
“말 삼가세요.”
그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읊조렸다. 푸르게 타오르는 분노가 흉흉했다. 인애는 소름이 오싹 돋아서 팔뚝을 여러 번 문질렀다.
“내 동생도 참 불쌍하지. 그런 년 장례식에 오겠다고 무리했다가 사고로 죽은 거 아냐.”
최 부회장은 마치 궁지에 몰린 피식자처럼 발악하는 모습이었다. 모든 것을 동원해 그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아, 아닌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사고가 아니었나?”
비열하게 웃는 옆모습을 바라보며, 인애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