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52화
“내가 얼마나 비참했을 것 같아? 그런데도 나는 미련하게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이면서, 그렇게 마음 다잡으면서……. 휘욱 씨 옆에 있었어.”
지금 울면 우스워진다는 것을 안다. 인애는 울컥 차오르려는 감정을 집어삼키기 위해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얕은 숨을 연신 내뱉는 모습이 그도 감정적으로 격앙된 듯 보였다.
“이제 너한테 상처 주는 일 없을 거야,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결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루려고 했던 모든 걸 다 포기해야 한다고 해도. 너만은 지킬 거야.”
인애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여전히 나한테 뭘 숨기고 있으면서, 그걸 믿으라고?”
감정이 울컥 치솟아서,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인애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린 휘욱이 간절한 목소리를 냈다.
“인애야.”
그의 다정한 눈빛이 가슴에 긴 선을 긋는 듯했다. 선을 따라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아무리 이 바닥에 정상적인 결혼이 드물다고 해도. 휘욱 씨랑 나는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어.”
숨을 한 번 고른 인애는 최후통첩을 하듯 결연하게 말했다.
“어긋난 걸 바로잡아 보려고 솔직한 대답을 바랐는데도, 휘욱 씨는 그러지 않았어. 내가 할 말은 다 한 것 같아. 나는 1년 후에 최휘욱 씨랑 이혼할 거야.”
그는 이제 인애의 부정적인 말에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는지, 지극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휘욱의 눈빛은 마치 구름에 휩싸인 산 정상처럼 아득했다. 분명 그곳에 있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산꼭대기처럼 무지근한 그의 눈빛이 가슴을 짓누르려는 듯했다.
“차라리.”
그의 눈빛에 잠식당한 나머지 진심이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나한테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진심을 내뱉는 순간인데, 놀랍도록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제껏 그와 말다툼을 하는 동안 격앙되었던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나는 휘욱 씨 말을 따랐을지도 몰라. 물론 고민했을 거야. 그렇게 휘욱 씨 곁에 있는 게 맞는 건지, 아닌지. 그러다가 아마.”
묵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거야, 우리는. 애초에 이런 식으로 결혼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었던 거야.”
시작부터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시작의 의미가 갖는 그 순수함을 회복할 수는 없다.
그림을 그리다가 실수를 했다면, 새로운 캔버스에 다시 그리면 된다. 하지만 관계는 다르다.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다.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그렇게 애쓴다고 해서 과거의 애석한 감정이 없던 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헤어졌던 커플이 다시 만났다가 같은 이유로 헤어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과거에 서로에게 경험했던 일에 대해 또다시 실망하고, 그러한 까닭에 헤어졌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만약 우리가 1년이 지난 후에도 같이 살게 된다면.”
인애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며 상체를 바짝 숙였다. 아득했던 그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어렸다. 인애에게 일말의 여지라도 보여 달라고 애원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휘욱 씨를 의심할 거야. 기적처럼 우리 사이가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휘욱 씨를 바라보면서 속으론 또 나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속앓이를 하게 될 거야.”
차라리 아예 마음에 없던 사람이라면, 그와의 결혼 생활을 잘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그의 품에 안기지 않았더라면.
이해득실을 철저히 따진 뒤, 계산적이고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을 지속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괴로워질 걸 뻔히 알면서, 휘욱 씨 곁에 있고 싶지 않아. 나는 이제 이 결혼보다 나를 먼저 지키고 싶어.”
“나도 널 지키고 싶어.”
그의 간절한 목소리에 인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나, 우리 부모님 지키기 위해서 휘욱 씨랑 결혼한 거야.”
그가 잠시 멈칫하며 말을 꺼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명례 건설이나 명례 호텔 주식이 왜 필요하겠어? 누구를 위해서? 두 분 평생 그늘에서만 사셨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키워 주신 분들이야. 나는 어머니, 아버지 지키기 위해 휘욱 씨랑 결혼한 거야.”
그의 낯빛이 어두웠다. 무언가 하려던 말을 또 감춘 얼굴이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건지, 말하지 못하는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마음을 툭 건드릴 만큼 아팠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야.”
새로운 캔버스를 꺼내 든 것처럼, 있었던 일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향해 여전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심장이 천천히 무뎌지기를.
그의 눈동자에 갑자기 차오른 열기가 천천히 식어 가기를.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차창에 부딪치는 빗방울이 거셌다. 닿기가 무섭게 줄줄 흐르는 물줄기에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빠한테는 말씀드렸는데, 엄마는 모르셔.”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말을 섞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함께하는 공간에서 그녀는 휘욱을 없는 사람 취급 했다. 지금처럼 휘욱의 시선은 항상 그녀를 향해 있었지만,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가 했던 말이 가슴에 박혀 곪아 가기 시작했다.
‘신혼여행 기간 내내 나타나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 처음……. 그래, 처음 당신 품에 안겼을 때는? 내가 얼마나 비참했을 것 같아?’
그녀는 마치 그 당시의 휘욱처럼 차갑게 굴었다. 했던 짓을 돌려받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의 태도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짓 때문에 그녀가 받았을 상처가 느껴져 미칠 것 같았다.
“그래, 잘할게. 장모님 눈치채시지 않게.”
모처럼 장모님의 생신을 맞아 처가에 가는 길이었다. 할 도리를 하며 1년의 결혼 생활을 마친 뒤, 서로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며 이혼하자는 게 그녀의 뜻이었다.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 만약 그게 진짜 이유라면 휘욱은 그녀를 위해 뭐든 맞춰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돌아선 그녀의 마음은 굳건해 보였다.
차에서 내리기 전, 그녀는 마치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처럼 크게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휘욱을 돌아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가자, 휘욱 씨.”
그녀를 이설 자동차에서 설립한 재단 미술관으로 이끌었던 날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다. 휘욱은 그녀에게 야멸차게 대하면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완벽한 아내의 모습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날, 그녀가 느꼈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실 그녀가 지금 보이는 행동보다, 휘욱의 언행이 더 악랄했다. 가은과 함께 후원을 거닐며 그녀를 능멸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하는 변태냐고 화를 내던 가은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휘욱은 완벽히 잘못된 선택을 했다. 잠시라도 그녀와 있고 싶었다는 변명은 지나치게 궁색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휘욱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휘욱에게 사랑은 생소한 감각이면서, 지나치게 무거운 감정이었다. 오직 분명한 것은 휘욱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을 제외하고 사랑을 느낀 사람은 인애가 유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는 휘욱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안 갈 거야?”
그녀가 미소를 지워 내며 무미건조한 얼굴로 물었다. 휘욱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애써 산뜻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아냐, 가야지. 가자.”
자신보다는 그녀가 사랑하는 법을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화목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는 결핍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날 이유가 없었기에 태생적으로 다정하고 다감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녀가 결혼 생활을 열심히 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녀의 기질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그런 기질을 물려준 사람이 마주 선 윤 교수와 장모님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휘욱이 예의를 차리며 인사를 건넸다.
“최 서방 바쁜 거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 있을까? 어서 들어와. 저녁부터 먹어야지.”
장모님이 휘욱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집 안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새침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또 딸보다 사위가 더 반가운가 봐?”
그녀의 목소리에는 모친을 향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럼, 우리 듬직한 사위가 더 반갑지.”
“아빠는요?”
그녀가 윤 교수를 향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당연히 우리 딸내미가 더 반갑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가 윤 교수의 팔에 팔짱을 꼈다.
“나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얘는 최 서방도 듣는데, 사람 섭섭하게 그런 소리를 해.”
장모님이 그녀를 나무라며 휘욱을 다독였다.
“최 서방, 너무 서운해 말아. 쟤 저래 봬도 최 서방이 첫사랑이었다니까. 어릴 때 속앓이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아? 내가 모른 척해서 그렇지 자네 정혼한다고 했을 때.”
“엄마!”
그녀가 장모님의 말을 막아서며 얼굴을 붉혔다. 이 모든 게 누군가를 위해 연기하는 허상이 아닌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뺨이 붉게 물든 그녀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이제 와서 숨길 게 뭐 있어? 뭐가 창피해서?”
장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딸 놀리는 재미에 짓궂게 굴었다. 휘욱은 너그럽고 다정한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받았다.
“장모님, 저도 이제 와서 얘기지만 제 첫사랑도 인애였어요.”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의 시선이 휘욱을 향했다. 원망스러운 기색이 희미하게 어렸던 것도 잠시,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