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50화
그가 몇 년 전부터 여자와 함께 지냈다던 오피스텔로 찾아갔던 게 벌써 나흘 전의 일이다. 인애는 그날 이후 그와 연락을 끊고 호텔에서 지냈다. 그와는 당분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삼류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남편의 외도 현장을 급습한 자신이 역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또 한편으로는 그를 발로 걷어차기라도 하고, 여자의 머리채를 한 번 더 잡고 뺨이라도 후려쳤어야 했나 하는 다소 과격한 후회도 들었다.
유치하고 저열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모멸감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 결혼이었다. 그는 중요한 사전 공지처럼 사랑을 바라지 말라는 말을 제일 먼저 꺼냈었다. 그런데도 갑작스러운 그의 심경 변화가, 아련한 눈빛이, 다정한 목소리가, 뜨거운 손길이 모두 진심일 거라고 여겼다.
인애는 티끌 하나 없이 정리된 호텔 침대에 얌전히 몸을 누였다. 보드라운 면 이불을 덮자, 노곤함이 밀려들었다. 마치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포근한 이불에 휘감긴 채 숨어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완벽한 현실 도피. 그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말대로 사랑을 바라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 마음은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릴 적부터 지켜본 그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지금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울함이 전신을 덮쳐 왔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버텨 왔다.
뜻하지 않게 사촌의 정혼자였던 그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갤러리에서 정직을 당하게 된 것도.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 버렸는데, 그걸 어떻게든 극복해 보겠다고 애를 써 왔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한 번에 무너져 내린 듯 무력감이 찾아들었다. 안온한 호텔방에만 머물고 싶을 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하비샴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불 속을 파고드는데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가 윙윙 울려 댔다. 그와의 관계를 배제한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갔다.
“네, 여사님.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정 여사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 응, 요즘 어때? 갤러리에도 없던데.
정 여사의 목소리에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 쉬고 있어요.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 죄송하긴. 그럼, 나랑 좀 볼까? 어디 콕 박혀 있길래 얼굴도 안 보여 주고 그래.
요즘 같은 시기에는 필원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표정만 봐도 인애가 어떤 기분인지를 알아차리는 막역한 친구와의 만남은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럴까요?”
대화를 나눌 누군가가 간절했었다. 다소 거리를 두며 적당한 예의를 차릴 수 있고, 업무적인 이유로 사적인 이야기를 덮을 수 있는 사이.
기분 전환을 위해 정 여사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여사가 인애에게 만나자고 한 곳은 청담대로에 있는 티 카페였다. 똑떨어지는 영국식 꽃 장식이 기품 있게 어우러진 카페에서는 영국 황실에 납품되는 티 세트가 인기라고 했다.
“이게 그 첫째 왕자비가 결혼할 때 고른 그릇이래. 원산지가 헝가리랬나? 예쁘지?”
“네, 예뻐요.”
인애는 나비와 꽃 문양이 섬세하게 그려진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결혼하기 전에 그릇 고르고, 이불 고르고, 그럴 때가 제일 재미있잖아. 안 그래?”
“저는 제가 직접 준비한 게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면 될 일인데, 인애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솔직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정 여사는 자신이 실수했다 싶었는지, 얼른 말을 돌렸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재미있는 일 있어?”
세상 무력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 재미있는 일이라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있어요.”
“그렇구나. 좋은 물건은 없고? 쉬고 있는데 일 이야기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다음 주에 서울옥션 부산 프리뷰 열리는 건 아시죠?”
“알지, 알지. 근데 나는 거기 나오는 거 말고 우리 윤 과장이 골라 주는 게 좋더라.”
정 여사는 작품에 관해서는 인애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예전에 서양화 전문 복원사가 복원하다가 사라진 작품이 하나 있어요.”
인애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의 어머니가 복원한 작품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해당 물건을 사들이는 데 정 여사는 굉장히 적합한 인물이었다. 일단 정 여사가 손에 넣으면, 인애가 더 비싼 값에 사 오면 된다.
발이 넓고, 흉허물 없이 고루 어울리는 사람이 많은 정 여사였다. 사모님들의 세상에서는 큰손으로 통했고, 휘욱의 큰어머니도 정 여사가 나선다면 움직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큰어머니의 관심사는 휘욱의 모친에게서 인애에게로 옮겨 오는 중이었다.
여러 가지를 잘 이용하고 조율하면 그의 어머니가 복원하다 만 작품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뭐 하러?
험한 꼴을 봐 놓고도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비련의 여주인공은 딱 질색이다.
“어떤 그림인데?”
작품에 사연이 있으면, 가치는 치솟는다. 정 여사가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 미국 작가의 그림인데요. 아상블라주(Assemblage; 여러 물건을 이용하여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 작품이에요.”
그의 어머니가 복원했던 작품에 관한 설명을 이어 가며, 인애는 아직도 자신이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음을 느꼈다.
사람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지 않는 것은 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도 감정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좋은 건가 봐?”
사실 복원 담당자가 최휘욱 대표의 모친이었다는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어머, 정 여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애의 시선이 어색하게 돌아갔다.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검은색 가죽 원피스를 입은 가은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붉은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지나치게 색정적이다. 그가 여자의 육감적인 입술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장면이 제멋대로 그려졌다.
인애는 눈을 감지도,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보기 싫은데, 보게 된다.
왜 저 여자인지, 왜 나는 아닌지.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인사해. 여긴 윤인애 과장이라고. 내가 자주 가는 갤러리 갤러리스트야.”
이제야 알아보겠다는 듯 가식적인 시선이 인애에게 닿았다.
“안녕하세요? 송가은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마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일행이 있어서.”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일별하고는 자리를 떴다. 정 여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차를 음미하는 척했다. 인애가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려는 의도 같았다.
“여사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인애였다. 정 여사는 무슨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저 이만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인애가 죄송하다고 덧붙이자, 정 여사가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가 봐. 나는 차 좀 더 마시고 갈게.”
그러고는 핑거푸드 하나를 집어 들며 읊조렸다.
“꼭 이겨야 해.”
누구를 만나러 갈 작정인지 깨달았다는 듯이 정 여사는 응원을 보냈다. 인애는 뒤처졌을까 싶어서 얼른 티 카페를 빠져나갔다.
청담대로 한복판에 서서 먼저 나간 여자를 찾겠다고 어리석게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윤인애 씨.”
마치 인애가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어요. 내가 일부러 알은체한 거예요. 윤인애 씨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당당한 태도에 기가 막혔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죠. 부인이랑 내연녀랑 청담대로 한복판에서 붙었다는 소문 도는 꼴은 내가 못 보겠거든요.”
인애가 고까운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은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골목에 자리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문을 열었는지, 가게 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선택한 장소였다.
“좀 기다려 봐요.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여자는 모호한 말을 내뱉었다.
“주제넘은 말도 정도가 있어요.”
“윤인애 씨가 휘욱이랑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고. 내가 그런 말을 해 줄 위치도 아닌 것 같고. 나는 일이 어디까지 진척됐는지 자세히는 몰라서 그러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와의 관계를 과시하며 인애를 약 올리려고 기다린 줄 알았다. 일전에 그녀는 인애를 자극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었다.
자신이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인애가 연인 관계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거라고.
막장 치정극에서 머리채 잡고 싸워야 하는 맞상대인 것처럼 굴었으면서, 지금은 그를 두둔하면서 인애를 설득하려는 뉘앙스였다.
사랑하는 남자를 채 가서 결혼한 여자에게 그를 믿고, 이해하고, 기다려 주라고 말하는 내연녀?
세상에 그런 미친년이 어디 있을까 싶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오피스텔에서부터 오해라는 말을 했었다.
갑자기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처럼 얼얼했다. 애정과 시기, 자괴감과 무력감이 어우러져 뿌옜던 머릿속에 지금껏 생각지 못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의심스러웠다.
“송가은 씨, 정말 대단한 분이네요. 그 사람 정말 사랑하나 봐요?”
인애가 떠보듯 묻자,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성 불능인 남자랑 어떻게 그렇게 오래 만났어요? 나는 벌써 질리던데.”
이어진 물음에 그녀가 입을 떡 벌리며 멍해진 얼굴로 인애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