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46화
그에게는 여느 날과 같은 월요일 아침인 것처럼 보였다. 인애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그의 넥타이를 손수 골라 매 주기까지 했다. 그는 인애가 매 준 넥타이의 매듭을 매만지며 흡족하게 웃었다.
“넥타이를 왜 이렇게 잘 매?”
신기하다는 듯이 묻는 그의 목소리에 어쩐지 서운한 기색이 묻어났다.
“남자들 넥타이 많이 매 줬거든.”
불안한 마음에 그를 또 자극하고 싶은 건지, 말도 안 되는 대꾸가 흘러나왔다. 거울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인애에게로 옮겨 왔다. 그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는 그의 눈빛에는 옅은 분노까지 감돌았다.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그가 무거운 숨을 간신히 들이켜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네가 넥타이 매 줬다는 남자들 전부 그 넥타이로 목 졸라 죽이고 싶으니까.”
서슬 퍼런 그의 질투에 인애는 가슴이 아렸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의 눈빛이 형형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아빠 넥타이 매 드렸거든. 매듭 잡는 법도 아빠가 가르쳐 주셨어.”
그가 팔을 뻗어 인애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착한 딸이네. 갑자기 장인어른이 엄청 부러워지려고 하네. 이런 딸도 있고.”
그의 입술이 인애의 입가에 머물렀다. 그러고 보니 처음 몸을 섞기 시작한 순간부터 피임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면 그가 마음을 더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그럴까.
인애는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키스에 열중하고 있던 그가 열이 오른 눈빛으로 의아하다는 듯이 인애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안 좋아?”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엊그제부터 그의 손길을 은근히 피해 왔다.
“좀 어지러워. 어서 출근해야지.”
그는 여차하면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붙잡아 볼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지만 오늘 하루를 그렇게 버텨 낸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저녁때 많이 늦어?”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고 있어. 많이 늦을 거야.”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에게 지금이라도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알았어. 얼른 가. 늦겠다.”
출근하는 그를 배웅하고, 다시 드레스 룸에 들어선 인애는 전투복을 고르듯 옷을 골랐다. 그가 만약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면, 그래서 속고 있는 거라면 대비가 필요했다.
인애는 결혼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어쩔 수 없는 정략혼이었지만, 일차적으로 부모님을 위해 나선 일이었다. 최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조부와의 거래를 잊어서는 안 되었다.
감정이 앞서면 일을 그르친다. 그에게 그 여자에 관해 따져 묻지 못한 데는 조부와의 거래도 한몫 크게 작용했다. 이대로 결혼이 어그러진다면, 조부와의 거래도 깨지게 된다.
인애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결혼할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랑은 잠깐이라고. 오히려 조건이 맞는 결혼이 더 성공적일 수 있다고.
그 후에 사랑해도 늦지 않는다고.
그런데 정말 사랑이 잠깐일까. 왜 그와 그 여자의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동화처럼 느껴지고,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잠깐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까.
생각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머릿속을 좀먹는 것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쓸린 인간은 가장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였다.
*
조부를 만나기로 한 곳은 삼성동에 있는 호텔 스위트룸이었다. 조부는 그곳에 일주일간 머물며 기후변화포럼 건으로 전시장을 찾은 국내외 인사들과 회의를 이어 갔다. 조부와 만나는 이들은 정치인, 경제인, 문화 예술인 등 다양한 분야에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나이가 지긋한 기성세대들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뒷방 늙은이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실세들이기도 했다.
그들과의 회의 중간에 인애가 끼어들었다. 원래 조부와 약속했던 것보다 한 달이나 이른 대면이었다. 가족이라고 한들 약속을 잡지 않으면 쉽게 만날 수 없기에 업무 중간에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인애의 앞에는 시원한 향을 풍기는 로즈메리차가 놓여 있었다.
“들거라.”
인애는 조부가 시키는 대로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로즈메리 향이 복잡한 머리를 한결 가벼이 만드는 듯했다.
“차 한잔 정도는 마실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호텔방에 머무시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무시는 시간까지 줄여 가면서 회의하시는 할아버지가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조부는 미소를 머금었지만, 미심쩍다는 듯이 인애를 바라보았다.
“네 머리 말이다.”
인애는 듣고 있다는 듯이 조부를 바라보며 찻잔을 소서 위에 내려놓았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로구나. 그런 얼굴로 급히 할아비를 찾은 걸 보면, 어지간히 급했던 게지.”
조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유리한 위치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누군가 절 건드리면 지켜 주실 건가요?”
빙빙 돌려서 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바쁜 조부와 길게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말을 길게 늘이며 대거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감히 내 손녀딸을 건드릴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과장되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며 조부는 그 정체를 묻고 있었다.
“최 부회장이요.”
일러바치는 기분이었지만, 인애가 더욱 대범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최 부회장이 발톱조차 세우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직설적인 인애의 대꾸에 조부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인애가 휘욱과 관련한 일을 들고 왔다고는 예상한 눈치였지만, 최 부회장을 언급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나 보다.
“그 작자가 너를?”
조부의 목소리에 노기가 어렸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가장 많은 것을 손에 쥐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위치에 있기에 놓치는 것도 있었다. 조부는 미수를 넘긴 나이에도 정정함을 과시했지만, 교묘하게 움직이는 피라미 같은 인간들에게는 눈이 어두워진 듯했다.
“정확히는 최휘욱 대표를 노리고 있는 거겠죠. 최휘욱 대표를 망가뜨리기 위해서는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거고요.”
조부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인애가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도 않았는데, 조부는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신 제대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단 그 경고는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손녀딸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인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제대로 할게요.”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큰 그림을 그리고만 있을 뿐, 어떤 붓으로 어떤 색을 칠할지는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빛의 움직임에 따라 빠르게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인상파 화가가 된 기분이었다. 변한 건 없지만, 모두가 달라져야 하는 상황.
인애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굳은 결심을 한 듯한 손녀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윤 회장은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사고 건은 알아보았나?”
남의 집안사에는 굳이 관심 없었다. 신효가 휘욱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신효가 연심을 품고 있기는 했지만, 두 집안의 혼맥을 이용한 사업적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기회라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인애의 경우는 달랐다. 지나치게 영특하고, 기민해서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한 수를 앞서 봐도 기특할 나이에 그림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는 아이이기도 했다.
둘째 아들 내외의 처지를 고려해 일부러 정을 덜 주고, 일부러 눈 밖에 난 아이처럼 대했었다. 훗날 그룹을 물려받을 인물이 있다면 인애라고 여기면서도 관심을 주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시기심에 눈이 먼 자들의 눈총을 받아 손녀딸이 다칠까 저어되었다. 그래서 남몰래 아끼고, 남몰래 정을 쏟았다.
아이의 보석 같은 성정을 알아본 것은 조부인 자신만이 아닌 것 같았다. 휘욱의 눈빛은 인애를 더없이 아끼는 사내의 것이었다. 그걸 최 부회장도 눈치챘나 보다.
“워낙 오래전 일이고, 국외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쉽지 않았습니다만, 최 부회장 쪽 소행은 맞는 것 같습니다.”
촉망받는 경영인이었고, 장차 이설 그룹의 후계가 될 거라고 여겼던 휘욱 부친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인애 좀 잘 돌봐 주게.”
비서실장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최 부회장이 휘욱을 괴롭히려 한다면 제일 먼저 인애를 건드릴 것이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지만, 경고는 필요했다.
“최 부회장하고 점심 약속 한번 잡지.”
더욱 교묘하게 움직이려고 들 테지만, 이쪽에서 거미줄을 더 촘촘하게 짜 넣으면 그만이다. 교활한 인간에게 양심적으로 대해 줄 생각은 없다.
“그 전에 휘욱 군하고도 점심 약속 한번 잡고.”
신효보다는 인애와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애보다 휘욱의 그릇이 더 작은 것은 아닌지 저어될 정도다. 자존심이 센 아이,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해내고야 마는 인애가 결혼 후 자신을 찾아와 내놓은 말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 달라는 거였다.
그 말인즉, 휘욱을 지키기 위해 나서겠다는 의미겠지.
그럴 가치가 있는 놈인지, 재고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