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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먼저 45화 (45/68)

결혼 먼저 45화

갑자기 사고가 멈추는 순간이 있다. 평소였다면 논리적으로 따져 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을 테지만,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폭발해 버리면 사고 능력은 제로에 수렴하게 된다.

인애는 그의 휴대전화를 베개 밑으로 도로 집어넣어 버렸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당장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또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분명 그는 여러 번에 걸쳐 그 여자를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라 대답했었다. 자존심까지 다 버려 가며 그에게 눈물 어린 호소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처럼 그는 그 여자와 아직도 만나고 있는 듯했다.

사랑이 쉽게 잊힐까?

신효와의 파혼을 감당하면서까지 지켰던 여자였다. 그 여자와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애는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뜨겁게 닿았던 곳에서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분명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는 잘 수 없다고 했었다. 사랑 없는 섹스는 역겨운 행위라는 듯이 짜증을 내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게 인애와는 잘 수 없는 이유라고도 했었다.

그래서 착각했던 걸까?

그가 당연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무의식적으로 결론 내리고 행복해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기에 품었다고 여겼다. 이제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결혼 생활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조부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부모의 위신을 세우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장밋빛 꿈을 꾸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가 조소로 물들었다.

왜 그렇게 순진하게 굴었을까?

그는 처음부터 철저히 계산적이고, 오만방자했었다. 그를 자극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가 그런 것처럼 자신도 내연 관계를 맺겠다며 자극했고, 필원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오해한 날, 하필 외박을 하게 되었다.

그날 밤 이후, 그는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인애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 버렸다.

의심을 했어야지, 너무 쉬웠잖아.

지금에 와서 하나하나 되짚어 생각해 보니, 모든 게 너무 쉽게 변해 버렸다. 그런데도 의심 한 점 없이 그를 믿었다. 심지어는 그의 어머니가 복원한 작품을 찾아 주겠다는 약속까지 해 버렸다.

그만큼 그가 간절했나. 대체 왜.

인애는 팔을 들어 눈가를 덮어 버렸다. 눈물이 주륵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 팔뚝으로 지그시 눌렀다.

처음엔 그저 필요에 의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그와 대면하면 할수록 무섭도록 끌리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과거에 묻어 두었던 감정을 터뜨리고 싶었다.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신 앞에 무릎 꿇고 맹세하고, 법적으로 완전해진 부부였다.

사랑을 갈구하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편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도 당연한 거였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을 하면서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진짜 같았으니까.

그의 진중한 눈빛이, 그의 근사한 미소가,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그의 다정한 손길이.

진심을 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뱃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온 마음을 다해 품는 것처럼 굴어 놓고, 뒤에선 그 여자와 여전히 함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묵직하게 차오르는 한숨을 겨우 집어삼켰다.

“스파게티 했어. 소스는 그냥 토마토소스, 마트에서 병에 담아 파는 거. 이거 좋아하지 않나?”

그가 커다란 베드 트레이를 들고 침실로 들어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는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충견처럼 인애를 바라보았다. 인애는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대꾸했다.

“어, 좋아해.”

건조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언젠가부터 인애가 좋아하는 것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마음을 얻으려고 이런 뒷조사까지 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입맛이 썼다.

“먹어 봐.”

침대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그가 인애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순간 짜르르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와 더 오래도록 가까이 닿고 싶다는 열망과 그에게 분노하고 밀어내고 싶은 충동, 극과 극을 달리는 감정이 무서운 기세로 치솟았다.

인애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골랐다.

“왜 그래?”

그가 진지한 투로 물었다. 사람이 기민하다고 해야 하는지, 그는 인애의 심리 상태가 미묘하게 바뀐 것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곤 했다. 인애는 대꾸 대신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좀 머리가 아파서.”

골치 아픈 상황을 대면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인애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이 인애의 이마에 닿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머리가 어떻게 아파?”

자상한 그의 목소리에서 눈물겹도록 진중한 염려가 묻어났다.

“그냥, 좀.”

“두통약 찾아올게. 약 먹기 전에 일단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스파게티 말고 다른 거 해 줄까? 수프나 죽 같은 거 먹을래?”

“아니야. 괜찮아.”

“일단 먹고 있어. 약 가져올게.”

그는 저지할 틈도 없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마치 두통약을 찾아오는 게 대단한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랑하는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짜르르 아파 왔다.

이게 전부 계산된 행동이라면, 저 남자는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걸까.

나는 지금 여기 앉아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결혼할 때만 해도, 결혼 생활을 제대로 하겠다고 덤빌 때까지만 해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생각인 걸까.

그리고 또 다른 두려움이 가슴 반대편에서 피어올랐다.

그가 보여 주는 모든 게 거짓이고, 끝내는 그를 잃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약을 찾으러 갔던 그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침실로 돌아왔다.

“이거면 될까?”

그는 이부프로펜 계열의 두통약을 내밀며 안절부절못했다.

“응.”

“왜 안 먹고 있어? 안 먹혀?”

그가 인애의 곁에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인애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가 인애에게서 포크를 가져갔다. 그러곤 은색 포크에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서 인애의 턱밑에 갖다 바쳤다.

“딱 세 번만 먹고, 약 먹자. 응?”

그는 대단한 부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애원했다. 그의 눈동자엔 진심 어린 염려가 녹아 있었다. 인애는 입을 벌려 그가 떠먹여 주는 스파게티를 받아먹었다.

“내가 토마토스파게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포크를 움직이며 대꾸했다.

“한 4년 전쯤 신효 생일이었을 거야. 가족 전부 모여서 식사하는데, 네가 다른 건 넣지 말고 토마토소스만 넣은 스파게티로 달라고 주문하는 거 봤어. 그날만 그런가 했는데, 다음에도 또 그러더라고.”

주로 소화가 잘되지 않을 것 같은 자리에서 주문하는 단순한 요리였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

그의 진심을 시험하듯 물었다. 그는 인애에게 스파게티를 한 번 더 떠먹여 주고는 대꾸했다.

“나는 다 기억해.”

그의 눈동자에 아련한 감정이 어렸다.

“뭘 다 기억해?”

“너에 관한 건, 전부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왈칵 치솟았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고백하는 것 같은 얼굴로 인애를 마주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대하고 있는 듯 구는 남자에게 그 여자와 어떻게 된 거냐고 다시 물을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 여자가 일방적으로 연락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아둔한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남자가 바람피우는 걸 왜 몰라, 저걸 어떻게 참지, 신파극을 보며 비웃었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신기하네. 그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해.”

“내가 기억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트레이를 향해 있던 인애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해 움직였다. 가슴 떨리는 고백을 한 그는 선한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평소 눈물이 많다거나,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진심인 듯 혼란케 하는 감정을 내뱉을 때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랬구나.”

싱거운 대꾸를 했는데도, 그는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인애의 상태를 살폈다.

“더 먹을 수 있겠어?”

인애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가슴이 자꾸만 왈칵 차올라서 음식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럼, 약 먹자.”

그가 물컵과 함께 두통약을 한 알 내밀었다. 인애는 아무런 저항 없이 약과 물을 받아먹었다. 그러고는 도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있잖아.”

그가 인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게 느껴졌다. 한 올 한 올 조심스럽게 넘기는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공연은 됐고. 나 보고 싶은 영화 있는데, 서울 가서 볼까?”

“그러지, 뭐.”

그는 기분 좋게 대꾸하고는 인애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럼, 월요일 저녁 어때?”

“월요일 저녁은 안 될 것 같은데.”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의 손길은 여전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떨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

구차한 질문인 걸 알면서도 물었다.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한 간결한 물음이었다.

“선약이 있어.”

머리카락 쓸어 넘기던 그의 손이 목 아래를 파고들었다. 그는 인애의 머리를 자신의 단단한 팔로 받친 뒤,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품은 놀랍도록 안온했다.

“누구랑? 일 때문에?”

그의 품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응.”

그 역시 짧게 대꾸했다.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한 간결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물었다가는 그 여자가 보낸 메시지를 봤다는 말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섣불리 물었다가는 그가 그 여자를 더 깊숙이 숨겨 놓을까 봐 걱정되었다.

바람난 남편이 꼼짝 못 할 증거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아내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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