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41화
“표정이 왜 그래?”
갑작스럽게 어두워지는 휘욱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야.”
휘욱은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감정을 감추고, 표정을 숨기고, 눈빛을 들키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삶이었다.
그런데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상대에게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휘욱은 인애를 통해 깨달았다.
분노와 증오를 넘어서 살의마저 담긴 눈빛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큰어머니가 그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최 부회장에게 험한 일을 당한 직후부터였다.
최 부회장은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시기했고, 빼앗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 범주에는 어머니도 속해 있었다. 한국에 몇 없는 서양화 전문 컨서베이터(복원 전문가)로 일했던 어머니를 최 부회장은 그녀의 작업실에서 범했다.
늘 웃음기 가득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어느 날부턴가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을 휘욱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귀가했던 휘욱이 어머니의 주검을 발견한 것은 장마가 막 시작된 여름이었다.
아버지는 이설 자동차의 올림픽 공식 후원을 위해 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 중이었다. 사춘기가 시작되려는 시기였다. 어머니가 손목을 그은 작업실에는 피비린내와 함께 불결한 정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자신이 내뱉었던 건조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연하다. 휴대전화 너머의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한국으로 들어오겠다고 했던 아버지는, 싱가포르 창이 공항으로 향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했다.
태풍으로 인해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상황이었다고 했다. 비행기의 이륙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인데도 아버지는 공항으로 향했다고 했다.
‘이 그림은 내가 보관하는 게 좋겠구나.’
어머니가 복원 중이었던 그림을 사들인 사람은 큰어머니였다.
‘그림 보는 눈은 있었지.’
큰어머니는 복원이 끝나지 않은 그림을 보며 어머니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 꼬시는 재주도 탁월했고.’
최 부회장과의 관계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며, 큰어머니는 어머니를 증오하듯 읊조렸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큰어머니는 병적으로 예술 작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부모를 모두 잃고, 살던 집을 떠나 그들의 집에 가서 살게 된 휘욱은 큰어머니의 비뚤어진 시기심과 소유욕에 시달려야만 했다.
‘어떠니? 너희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이걸 샀겠니?’
휘욱의 상처를 들쑤시는 말은 서슴없이 흘러나왔다.
‘아닌가? 이 정도 작품 보는 눈은 없었나? 전공자가 실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니, 소규모 프로젝트만 근근이 참여했지.’
어머니의 경력을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어머니가 복원한 그림의 흔적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희 엄마가 복원한 건데, 내가 고이 간직하는 게 좋지 않겠니?’
이미 죽은 사람인데도, 큰어머니는 어머니의 흔적을 없애는 데 병적으로 집착했다. 그리고 가장 명백한 흔적 중 하나인 휘욱이 최 부회장의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온갖 수집품으로 가득한 본가에 들를 때마다, 고가의 예술 작품들이 휘욱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갤러리와 박물관, 복원 작업실 등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휘욱에게 작품이 있는 곳이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 있는 작품들이 고통이 되어 버렸다.
“걱정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깊은 상념에서 벗어난 것은 옆에서 들려온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 덕분이었다. 그녀는 소리 낮춰 속삭이기 시작했다.
“큰어머니가 나 얕잡아 보고 막 대할까 봐 걱정돼?”
그녀가 미간을 모으며 휘욱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마치 휘욱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겠다는 듯이 신중한 눈빛이었다.
“그럼 나도 얕잡아 보고, 막 대하면 되지. 뭐.”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은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결연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변종 취급 받고 살았어. 부모님 덕에 멋대로 살 수 있었잖아, 나. 물론 휘욱 씨랑 결혼한 건 예외.”
그녀는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휘욱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이 덧붙였다.
“그래도 나…….”
쉽지 않은 얘기인지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휘욱은 떨리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슬며시 쓸어 보았다.
그녀가 뭉근하게 달뜬 눈빛으로 휘욱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시간이 흘러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을 뿐이었다. 그들과 맞설 힘을 얻고 싶었었다.
그런데 따뜻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은 이대로 영원 속에 갇힌다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끌려오듯 결혼한 건 아니야.”
진중한 눈빛이 휘욱을 향했다.
“휘욱 씨 좋았거든.”
이제껏 뜸을 들인 것과는 달리 덤덤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그녀의 모습에 휘욱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왈칵 치솟아서 목구멍을 막아 버린 것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오질 않는다.
휘욱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고는, 옆머리가 예쁘게 흐트러진 관자놀이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차를 몰고 싶었다. 집이 아니라도 단둘이서만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향하고 싶어졌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자는 그녀의 말에 따라 천천히 다가가고 싶었지만, 참고 버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곁에 둘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사람이었다. 곁에 두고도 모진 말로 상처 입히고 멀어지려 했었다.
그런 그녀가 품에 들어왔다. 그동안 그녀를 배제한 채로 살아왔던 삶이 무색하리만큼 조바심이 났다. 갖고 싶고,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머금고 싶고, 맛보고 싶은 본능이 무섭도록 치솟았다.
그녀는 휘욱의 왼쪽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웃었다. 휘욱은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느새 차는 본가 주차장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큰어머니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우리 휘욱이도 같이 왔네. 바쁘다더니, 시간이 난 거야?”
살갑게 구는 큰어머니의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제때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휘욱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담기지 않은 사과의 말을 건넸다.
“내가 우리 새아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보여 주고 싶은 것도 많고.”
그녀에게 팔짱을 끼며 큰어머니는 세상천지 좋은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보내 준 그림 너무 좋더라. 내가 후기 인상파 정말 좋아하거든.”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워낙 작품을 잘 보셔서, 걱정했어요.”
그녀는 마치 고객을 대하는 듯한 전형적인 투로 대꾸했다.
“내가 모은 것 좀 볼래?”
“보여 주시면 감사하죠.”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눈짓한 그녀는 큰어머니와 함께 수집품이 모여 있는 별채로 향했다. 응접실에 홀로 남은 휘욱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내온 차를 마시며 초조해진 마음을 달래려 노력했다.
한동안 순간을 넘기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았었다. 발을 디딘 얼음판이 깨지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다음 발걸음 내딛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삶이었다.
그룹 내에서 자리를 잡아 가며 삶은 조금씩 변화했다. 발밑 얼음이 두꺼워지고, 거침없이 내디딜 수 있는 요령이 생겨났다. 그런데 얼음 위에 그녀와 함께 올라선 게 잘한 일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딛고 선 바닥이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30분쯤 지났을까. 큰어머니가 그녀를 데리고 다시 응접실로 들어섰다.
“죄송해요. 저녁 식사 하고 가고 싶은데, 말씀드렸다시피 갤러리에 일이 좀 있어서 바로 들어가 봐야 해서요. 오늘 급하게 오느라 시간을 제대로 못 만들었어요.”
갤러리에 다시 가 봐야 한다는 것은 핑계일 것이다. 인사치레를 위해 들르기는 했지만, 식사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지 그녀는 상황을 유연하게 이끌었다.
“아니야, 갑자기 급하게 불렀는데도 와 줘서 내가 고맙지. 우리 자주 봐요. 어쩜 이렇게 작품 보는 눈이 탁월할까?”
큰어머니의 음성이 과거 어느 시점과 겹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큰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그녀가 휘욱을 돌아보았다. 휘욱은 눈치껏 그녀의 곁에 섰다.
“가 보겠습니다.”
휘욱의 딱딱한 음성에 치를 떨었던 큰어머니였는데, 이번에는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바깥 현관까지 두 사람을 배웅해 주기까지 했다.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오른 휘욱은 아무 일도 없었느냐고 묻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휘욱 씨.”
“응.”
“우리.”
“응.”
그녀는 고심하듯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휘욱 씨 어머님이 복원하신 작품 도로 갖고 오자.”
휘욱은 잠시 멍해진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복원한 작품이 큰어머니에게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본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 보기보다 유능한 갤러리스트야. 그걸 몰라봤을까 봐? 시장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고만 들었는데, 저기 있을 줄은 몰랐네.”
잠시 숨을 고른 휘욱은 그녀가 걱정스러워서 괜한 일을 벌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절대 안 놓아줄 거야.”
“이 동네에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작품을 수집하고, 집착의 대상이 자신을 봐 주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을 작품을 소유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 큰어머니도 그런 과 같은데?”
거기에 어머니에 대한 시기심도 물들어 있다는 말은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시키려면 어머니가 당했던 끔찍한 일을 입에 올려야만 했다.
“허기와 소유욕을 다른 작품으로 옮겨 가게 하면 돼. 나 믿어, 휘욱 씨. 내가 찾아 줄게.”
휘욱은 그녀의 정수리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