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39화
지난주였던가? 조부는 명례 그룹 회장의 맏손녀인 신효가 다녀갈 예정이니 일찍 귀가하라는 말을 했었다.
부모님끼리 각별한 사이였기에 인애와는 어린 시절 스스럼없이 지냈지만, 신효는 달랐다. 오만한 성정과 독단적인 언행은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어린 나이에 군림하는 법부터 배운 신효는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그리고 신효는 이제 휘욱을 발아래 두려고 하는 듯했다. 어차피 선택지가 없는 처지였지만, 눈앞에 인애의 말간 얼굴이 어른거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갖고 싶은 것도 자연스레 없어졌다. 주위에 휘욱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휘욱이 가지려고 하는 대상은 늘 망가졌다. 자연스레 포기하고, 욕망하기 전에 뒤로 물러났다.
마음속 깊이 동생이자, 소중한 인연으로 자리하고 있던 인애에게서 이제 멀어져야 할 타이밍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지금도 아주 서먹하고, 어색한 관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접고 완전히 멀어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런데 약속된 날에 본가를 방문한 사람은 신효가 아닌 인애였다. 놀란 눈을 한 인애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갑자기 가슴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휘욱은 앉으라는 조부의 말에 땀 냄새가 나서 씻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2층으로 향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쫙 풀리는 것 같아서 소파에 기대 누웠다. 몸이 붕 떠오르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놀라서 커다랗게 뜨인 눈에 떠오른 감정은 반가움이었나?
인애는 어릴 때부터 휘욱을 잘 따랐고, 외동인 휘욱은 인애를 친여동생처럼 아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손을 잡아 준 유일한 사람.
인생의 쓴맛 한가운데 몸을 담그기 시작한 자신에게 찰나의 달콤함을 선물했던 아이.
최 부회장의 폭력이 시작되면서 망가진 것은 휘욱의 몸과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최 부회장은 휘욱이 아끼는 모든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빼앗고, 망가뜨리고, 없애 버리고.
그 안에 인애가 속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휘욱은 어느 날부턴가 인애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굵어지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연스레 멀어지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어디에 있든 휘욱의 눈은 인애를 좇았다. 재벌가 자제들의 모임이든, 두 집안의 식사 자리든, 휘욱의 시선은 자연스레 인애가 있는 곳에 머물렀다. 들킬세라 조심스럽게 훔쳐보면서 따뜻한 아이의 미소를 마음에 새겼다.
휘욱이 무뚝뚝하게 굴어서인지, 인애도 어느 순간부터는 휘욱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오빠, 오빠!’ 하면서 매달리지 않는 게 서운하면서도 다행이지 싶었다. 명례 그룹 쪽에서도 인애의 부모는 조금 특별한 케이스에 속했다.
그룹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인생을 사는 인애 부모는 그만큼 그룹의 보호를 완벽히 받지는 못하는 듯했다. 패륜과 비슷한 행동인 줄 알면서도 휘욱은 부모의 친우였던 그들도 피했다.
그들과 깊은 연을 이어 간다면, 최 부회장이 가만두지 않을 게 불 보듯 뻔했다. 타고난 팔자로 인해 고통받는 건 제 선에서 끝나는 게 낫지 싶었다.
그런데 그날 찾아온 인애가 2층으로 올라오는 기척을 들었을 때, 휘욱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누군가 결박해 놓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인애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
따뜻한 눈빛을, 귀여운 미소를, 다정한 말 한마디를 가슴에 담고 싶어서 온몸이 저렸다. 하지만 휘욱은 그저 눈을 감은 채로 죽은 듯이 잠든 척할 뿐이었다.
더는 가까이 오지 마.
휘욱이 속으로 되뇌고 있을 때,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머릿속이 깨끗이 휘발되는 느낌에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자는 사람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놀라서 물은 말이 고작 그거였다. 인애도 놀랐는지 뒷걸음질 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운 왕자의 표정이 저랬을까, 백설 공주를 깨운 왕자의 표정이 저랬을까.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 속 공주와 왕자의 반전 상황을 떠올리며 휘욱은 자조했다.
가질 수 없다 해도 상상은 해 볼 수 있지 않은가.
너와 나의 동화도 해피 엔딩일 수 있을까.
잊으려고 할 때마다 불쑥 떠올라 머릿속을 헤집었던 그날 여름 오후의 기억이 또다시 가슴을 뒤틀었다.
휘욱은 덮어 두었던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나는 단건 안 좋아하는데, 스트레스받을 땐 초콜릿 먹는 걸 좋아해. 아이스크림은 바닐라아이스크림만 가끔 먹고……. 지난겨울에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다녀왔는데, 쉴리관이 정말 멋졌어. 종일 거기에 있고 싶을 정도로, 비비드한 색보다는 파스텔톤을 더 좋아하고, 장편 소설보단 단편 소설이 더 좋아. 수학보단 역사가 더 좋고…….]
편지에는 인애가 좋아하는 것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청량한 목소리가 저절로 연상되는 앙증맞은 글귀였다.
[……근데 그중에서도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오빠야.]
그리고 편지 끝자락에는 귀여운 고백이 쓰여 있었다. 휘욱의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되었을 소녀의 수줍고도 어리숙한 고백이 어여뻤다.
하지만 이내 휘욱의 미소는 스스로를 비웃는 삐뚜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해피 엔딩이 될 수 없는 동화는 희망과 꿈을 심어 주지 못한다.
휘욱은 종이봉투에 편지를 집어넣고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새드 엔딩일지언정, 찰나라도 미소 지을 수 있게 했던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할 수는 있으니까.
그날 이후, 휘욱은 편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해 왔다. 집 안 청소를 하는 도우미에게 들킬까 봐 학교 사물함으로 옮겼다가, 군대에 갈 때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맡겨 놓고는 훈련소로 보내 달라고 해서 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은 휘욱의 집무실 첫 번째 서랍 안에 자리했다. 휘욱은 마음이 삭막해질 때마다 인애가 보낸 편지를 펼쳐 보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삭막한 마음이 아닌,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어릴 적 꿈꿨던 동화가 해피 엔딩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해피 엔딩이 되도록 만들어야겠다.
수만 번 읽어서 외울 것 같은 편지를 또 한 번 읽어 내려갔다. 지난밤, 치킨을 먹으며 편지 내용의 일부를 읊어 주었는데, 인애는 오래전 자신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억 못 하면 어떤가,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는데.
인애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단 한 순간도 잊은 것이 없다. 친구 딸이 태어났다며 예쁘게 웃던 돌아가신 엄마의 미소, 병원 신생아실 유리창 앞에서 마주 보았던 빨갛고 작은 얼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며 신고 다녔던 삑삑 소리가 나던 신발,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같은 학교에 다니는 휘욱을 보고 좋아 죽으려고 했던 아이의 천진한 표정.
그리고 가장 슬펐던 날, 휘욱을 대신해 슬프게 울어 주었던 아이.
모든 순간이 소중해서 그대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신효와의 혼담이 오가면서 최 부회장의 폭력은 중단되었다. 신효의 조부인 윤 회장이 휘욱을 사우나로 부르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최 부회장은 더 이상 휘욱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리고 폭력은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최 부회장은 휘욱의 앞길을 교묘하게 막아섰고, 휘욱은 뜻하지 않는 곳에서 나타나는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해 곱절은 더 노력해야만 했다.
중단된 것은 최 부회장의 폭력뿐만이 아니었다. 인애와의 모든 교류가 사라졌다. 가끔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던 인애는 의식적으로 휘욱을 피했고, 휘욱은 그럴 때마다 가슴이 저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도 인애와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그동안 인애도 이렇게 마음이 아팠을까.
아니면 그저 어릴 적 풋사랑이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쉽게 접은 걸까.
고달픈 현실을 악으로 버티는 동안, 독이 바짝 올랐다. 이설 자동차 대표 자리에 오르면서는 욕심이 생겨났다.
잠시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아직도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미친놈으로 여겨질 것이다. 휘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기적인 욕심을 부려 보기로 했다.
잠시만 곁에 두자고.
때마침 인애의 부친 윤 교수가 수세에 몰려 있었고, 휘욱은 그의 편이 되어 주며 거래를 제안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윤 교수는 고심하는 듯했지만 끝내는 휘욱의 제안에 응했다.
약속처럼 털끝 하나 안 건드리려고 했다. 헤어지고 나서 상처가 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최 부회장은 휘욱이 아끼는 모든 것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괴물 같은 인간이었다.
만약 휘욱이 인애에게 깊은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인애를 망가뜨리려고 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자신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인애가 최 부회장으로 인해 망가지는 모습을 본다면,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리라.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며 곁에 두면서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마음 한 자락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제 밤, 연락되지 않는 인애를 밤새 찾아다니며 모든 다짐이 허물어졌다.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영혼이 찢기는 듯했다.
목숨을 걸고, 영혼을 팔고,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지옥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할지라도, 천벌을 받는다 해도, 그녀를 품에 안고 살아가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미 휘욱의 숨결이었고, 심장 박동이었다.
휘욱은 편지를 고이 접어 도로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출근 잘 했어?]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전화에 불이 반짝 들어오더니, 메시지가 나타났다.
먼저 연락해 볼걸.
늘 인애보다 한 발짝 늦는 휘욱이었다.
고백도, 사랑 표현도.
[응, 잘 했어. 오늘 퇴근 늦어?]
[안 늦을 것 같아. 휘욱 씨는?]
[나도 안 늦을 것 같아. 끝나는 시간 맞춰서 갤러리로 데리러 갈게. 아, 차 갖고 출근했나, 오늘은? 공연 하나 볼까 하는데, 공연장에서 만날까?]
첫 데이트나 다름없었다. 너무 딱딱하게 말했나 싶어서 신경이 바짝 쓰였다. 내내 즉각 답을 하던 그녀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휘욱 씨 큰어머님이 본가에 잠깐 들르라고 하셨어.]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휘욱의 눈가가 매섭게 변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