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38화
그해 여름.
“휘욱아.”
소름 끼칠 만큼 다정한 부름이었다. 큰아버지인 최태진 부회장이 끔찍이도 다정하게 굴 때면 휘욱은 어금니를 사리물어야만 했다.
“들어와야지?”
최 부회장이 들어오라며 가리킨 곳은 멀티미디어 룸이었다. 그는 진공관 앰프와 턴테이블을 다루는 게 취미였고, 멀티미디어 룸은 그의 값비싼 컬렉션으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장송곡 같은 음악을 틀었었다. 그는 음악에 심취한 광인의 모습으로 악마 같은 짓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자극에 중독된 인간은 더 잔인한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음악을 틀지 않았다. 휘욱의 살갗이 터지고, 악문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즐겼다. 그걸 깨닫고 난 뒤부터, 휘욱은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해서든 악마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오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런 행동이 최 부회장의 화를 부추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휘두르는 무조건적인 폭력 앞에서 저항하는 중이었다.
손찌검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부터 시작되었다. 중학교 1학년, 겨우 열네 살이었던 휘욱은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괴물과 마주했다. 체력이 약했던 휘욱은 최 부회장이 휘두른 손에 맞고 계단 아래로 나뒹굴었다.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발목이 골절되었고, 팔꿈치 인대가 파열되었다. 어떻게 하다가 다친 거냐는 조부의 물음에 휘욱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독한 놈이야. 아주 독해. 일러바치지 그랬어? 내가 그랬다고. 하긴 고자질해 봐야 좋을 게 있겠니? 네 부모 어떻게 갔는지 알잖아, 그렇지?”
최 부회장에게는 자신이 인간 이하의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어 보였다. 처음엔 화풀이할 대상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휘욱에 대한 폭력은 유희의 하나일 뿐이라는 걸 깨달아 갔다.
그날 이후 최 부회장은 보이지 않는 곳을 골라서 때렸다. 등허리, 복부, 허벅지 등 옷으로 충분히 가릴 수 있는 곳이 타깃이 되었다.
집 안에서 휘욱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부인 최 회장은 서남아 건설 시장 진출과 휘욱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이설 자동차 대표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일어난 경영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중이었다.
최 부회장은 새살이 돋아나도록 기다렸다가, 다시 살이 터져 나가는 광경을 목도하는 것을 즐겼다. 허리띠를 풀어서 때리는 것은 예사였고, 어디서 끝에 정이 달린 채찍 같을 구해 와서 때리기도 했다.
죽지 않을 만큼만. 딱 그 정도까지만 맞았다.
이 남자는 미친 인간이다. 이 남자는 괴물이다. 이 남자는 악마다.
끊임없이 되뇌지 않으면 온전한 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대들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럼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죽도록 맞으면서도 죽음은 두려웠다.
그날 역시 최 부회장에게 불려 들어가 등이 다 터지도록 맞았다. 너무 아프면 기절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정신을 잃으며 바닥에 쓰러지는데 귀가 멍해지면서 몸이 붕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제 끝이다. 끝난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눈을 감고 얼마쯤 있었을까, 델 듯이 뜨거운 물이 벗겨진 살갗 위로 쏟아졌다. 신음성을 내뱉으며 눈을 떴을 때, 불지옥보다 더한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처음으로 죽고 싶어졌다.
죽기 직전까지 맞는 일을 반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결국, 살아 봐야 부모님의 전철을 밟기밖에 더 할까?
기력이 다할 때까지 휘욱을 두드려 팬 최 부회장은 조부가 귀가하는 소리에 매질을 멈추었다. 휘욱은 방으로 돌아가 온 집 안 사람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새벽 서너 시쯤 되었을 때, 무작정 현관 밖을 나섰다.
“휘욱 학생 어디 가요?”
정원 관리사가 휘욱을 불러 세웠다. 집 안 사람들 눈을 피해 잘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두컴컴한 정원에 누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친구가 우편함에 학교 과제 안내문을 넣어 놨다고 했는데, 제가 깜빡해서요. 그거 찾으러 가요.”
“아침에 찾아도 되지 않아요?”
집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휘욱을 감시하면서, 은근히 무시했고, 뒤로는 비웃었으며, 불쌍히 여기며 자위했다. 재벌가에서 태어난 허우대 멀쩡한 놈이지만, 기댈 곳 없는 인생이라고.
“오늘 아침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라서요.”
“별일이네요. 휘욱 학생이 과제를 다 깜빡해서 친구가 알려 주고.”
휘욱은 조부의 뜻에 따라 경영학부에 진학했다. 수석으로 입학했고, 재벌 3세라는 타이틀은 묘한 아우라를 만들었다.
“부모님 기일에 강의를 빠져서, 그날 안내문을 받지 못했거든요.”
휘욱은 괴물처럼 구는 핏줄이 아닌 타인을 대하는 법을 잘 알았다. 그들은 재벌가에서 나고 자랐지만, 비빌 언덕이 없는 휘욱을 측은하게 여기곤 했다. 특히 휘욱이 서글픈 얼굴로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를 꺼낼 때면 그들은 연민을 숨기지 못했다.
“어서 다녀와요. 여기서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나도 정원 단속하고 자야 하거든.”
정원사는 자신의 엄정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이번만큼은 너그러이 봐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휘욱은 예의 바르게 감사하다고 말하며 웃었지만, 속으론 조소를 퍼부었다.
인간 이하의 짓을 하는 이 집 사람들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고용인들은 이 집에서 얻는 이득에 눈이 멀어 떠나지는 못했다.
집안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정한 일을 목격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돈 앞에서 기꺼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심지어는 수족이 되기를 자처했다. 먹고살기 위해 그런다는 말은 변명 같았다.
정당하게 일하고, 정의롭게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은 멍청해서 그러는 것일까?
먹고살기 위해 그랬다는 말로 이해될 문제라면, 살인강도와 친일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그들은 반박할지도 모른다. 대항할 가치가 없는 말이다.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바꿀 수만 있다면.
정의롭지 못한 일을 저지르면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현시대의 기업과 사회의 역할이 아닌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을 하며 휘욱은 자조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이상만 키워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휘욱은 대문 밖에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우편함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 관리사가 목을 길게 빼고 휘욱을 관찰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진짜 우편함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거짓말을 한 것인지 감시하는 듯했다.
거짓이면 아마 오늘 아침이 밝자마자 최 부회장의 귀에 휘욱이 새벽녘에 외출하려고 했다는 말이 기어들어 갈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편함엔 종이 쪼가리 하나 있을 리가 없었다. 대문 밖에 있는 우편함은 말 그대로 형식적인 우편함이었다. 이 집으로 오는 우편물은 지하에 있는 우편함에 수집되었고, 3단계의 보안 절차를 거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휘욱은 경비원들이 저지하는 탓에 광고 전단지 하나 꽂혀 있지 않은 우편함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른 손가락 끝에 종이봉투가 닿았다. 휘욱은 허탈하게 웃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세상은 단 한 번도 휘욱의 편이 되어 준 적이 없었다. 쓰레기 같은 종잇조각이라도 하나 있기를 바랐는데, 기적처럼 종이봉투가 손에 잡혔다. 무슨 봉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휘욱은 종이봉투를 빼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새벽녘이 되어 정원 조도를 낮춘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종이봉투 겉면에는 정원 관리사의 의심을 살 만한 글씨 같은 건 없었다.
“여기 있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휘욱은 종이봉투를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별것 아닌 종이봉투의 발견은 마치 풀 더미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은 것과 같은 감상을 안겨 주었다.
좋은 일이 있을 것도 같은 느낌.
방으로 돌아온 휘욱은 책상 위에 봉투를 올려 두고 잠이 들었다.
종이봉투를 다시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였다. 시험 기간이어서 일찍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휘욱은 며칠 전 책상 위에 올려 둔 봉투 겉면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걸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흰색인 줄로만 알았던 봉투는 라벤더색이었다. 따뜻한 색감의 봉투에 쓰여 있는 글씨는 정갈했다. 휘욱은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두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휘욱 오빠, 오빠한테 편지를 써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 나 인애야.]
인애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편함에 넣어 놨다는 사실이 조금은 얼떨떨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무척이나 가깝게 지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애는 휘욱을 조심스레 경계했다.
모두가 휘욱을 그렇게 대했기에 상처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인애의 경우는 조금 특별했다. 세상 사람 모두를 냉소적으로 바라볼지라도, 인애를 향한 눈빛만큼은 따뜻했다.
인애가 어떤 목적으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건지 확인하는 게 두려웠다.
휘욱은 호흡을 고르며 편지를 잠시 책상 위에 엎어 두었다.
자신이 아닌 이 집안사람 중 누군가가 인애가 보낸 편지를 먼저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럴 수도 있는데, 왜 인애는 이런 방식으로 편지를 보냈을까?
곁에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부정당하는 삶은 가끔씩 벗어날 수 없는 패배주의적 트라우마와 끔찍한 피해 의식으로 발현되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인애가 이 집을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다. 휘욱은 뺨을 한 번 어루만져 보았다. 그때의 감촉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