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37화
휘욱이 인애의 표정을 따라 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웃음기를 거둬 낸 그가 다정하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
“얼마나 알까?”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유추하기엔 주어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혹시 나한테 사람 붙였어? 아니지, 그러면 내가 어제 갤러리에 있었던 걸 모를 리가.”
인애는 얼른 쏟아 놓았던 말을 정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차차 말해 줄게. 얼른 먹자. 치킨 냄새에 취해서 미칠 것 같아.”
그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며 괴롭다는 듯이 웃었다.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장난기가 넘치는 남자였나.
생전 보인 적 없는 그의 모습이 친밀감을 더했다. 그리고 그가 쏟아 놓은 자신에 대한 정보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가 쉽게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치킨 안 먹으면 어쩌나 걱정했어. 안 물어보고 시켜서.”
식탁 앞에 그와 마주 앉은 인애는 닭 가슴살을 집어 드는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자, 너는 퍽퍽한 살만 먹지?”
“나 이제 조금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그럼 오빠는.”
인애는 아랫입술을 얼른 말아 물었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오빠라는 단어가 마치 두 사람을 10대 시절로 데려간 듯했다. 그가 닭 다리를 하나 들려다가 말고 인애를 바라보았다.
“나는 퍽퍽한 살 안 먹어. 걱정하지 마.”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호칭에도 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제 와서 호칭을 정정하는 것도 우스웠다. 인애는 젓가락으로 치킨 살을 쭉 찢어서 입에 넣었다. 그는 닭 다리를 뜯어 먹는 모습마저 우아해 보였다.
기름진 기다란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충동적으로 빨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애는 얼음이 가득 담긴 콜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콜라 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탄산음료는 안 마셔?”
“어.”
“다른 거 가리는 건?”
“없어.”
“그럼 햄버거, 라면, 피자 같은 거 다 먹어? 즉석밥도 먹고?”
“그럼.”
인애는 새삼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런 거 다 안 먹고 어떻게 살아?”
“그런가.”
“근데 라면, 즉석밥 같은 건 즐겨 먹지는 않아. 안 먹지는 않는다 뿐이지.”
“아.”
인애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정말 먹을 거 없을 때만 먹었던 것 같아. 라면이랑 즉석밥은.”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기울었다. 인애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재벌가에서 귀한 도련님으로 자란 그에게 먹을 게 없어서 먹었다는 말은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그가 치킨을 먹다 말고 인애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야. 먹어.”
인애는 깎아 놓은 듯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고 싶다. 그 무엇도 아니고, 오직 그에 대해서만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단편적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는 마치 인애의 일부분을 알고 있어서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아이돌의 페르소나를 보고 열광하는 10대처럼.
“내가 루브르 쉴리관에 종일 있었던 건 어떻게 알았어?”
“나중에. 이것 좀 먹고.”
그가 치킨을 가리키며 대답을 회피했다. 오늘 대답을 듣기는 글러 먹은 것 같다.
*
“좋은 아침.”
환한 얼굴로 인사하며 출근하는 휘욱을 보고 정 실장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지난 주말, 그는 이설 건설 관계자와의 미팅을 깨고 귀가했다. 주말 내내 대표가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정 실장은 노심초사했다.
저러다 사고라도 쳐서 자신이 아닌 언론사에 먼저 흘러 들어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정 실장은 평소답지 않게, 수만 가지 가정을 하며 속을 끓였다.
그렇다고 그가 이제껏 사고를 몰고 다닐 만큼의 이슈 메이커였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일종의 정보원인 송가은 양과의 계략적 스캔들 말고는 지극히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아내인 윤인애 양을 데리고 집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을 본 정 실장은 이번에는 큰 사고가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때려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포악한 눈빛으로 귀가하던 대표의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가 출근하면 이내 풍겨 오는 향이 비강을 자극했다. 비서실 말단 직원이 그에게 가져다줄 블랙티와 크루아상이 오른 쟁반을 옮기고 있었다.
“다솔 씨.”
정 실장은 말단 직원을 부르며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의아한 얼굴로 다가온 직원의 손에 들린 쟁반을 받아 든 정 실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 봐. 이거 내가 갖고 들어갈게.”
확인이 필요했다. 정말 대표의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태풍의 눈 속에서 처절하게 화창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인지.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의류 관리기 안에 슈트 재킷을 넣다 말고 대표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그걸 직접 들고 들어오느냐는 물음조차 없었다.
“앞으로 빵은 빼라고 해요.”
그는 대체로 아침 식사를 거르고 출근했고, 초콜릿이 들어간 뱅 오 쇼콜라와 햄, 치즈만 넣은 크루아상을 번갈아 아침으로 먹곤 했다.
“네, 대표님.”
그런데 갑자기 빵을 빼라고 하는 건 이제부턴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하겠다는 의미였다. 윤인애 양도 출근하느라 바쁠 것이다. 출근하는 아내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켰나? 대표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정 실장은 잘 알았다.
그에게 윤인애 양만큼 아끼는 존재는 없었다.
“식사하고 오십니까?”
“본가에서 아주머니를 보내셨는데, 아침 식사 안 하면 잡아먹힐 것 같아서요.”
정 실장은 잠시 멈칫했다. 지금 대표가 저걸 농담이라고 한 거다. 이 사람이 아침부터 농담이나 늘어놓을 리가 없는데.
그리고 본가에서 아주머니를 보냈다는 말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릴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통제당해 놓고, 결혼 생활까지 보고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안쓰럽고 딱하기 그지없었다. 그에게 행해졌던 통제는 여느 재벌가의 자제들이 그런 것처럼 긍정적인 지향점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철저히 그가 망가지기를 바라고 벌인 반인륜적인 행태들이었다.
대표의 아버지, 최태헌 전 이설 자동차 대표가 살아 있을 때, 정 실장은 이제 막 이설에 입사한 신입이었다. 운 좋게 기조실 어시스트로 발령되었고, 그곳에서 그룹의 중심에 서 있던 최태헌 대표의 야망과 능력을 엿보았다.
이설 그룹이 더욱 성장하기 위해선 그의 존재가 절실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상황이 바뀌었고, 정 실장은 우연한 기회에 어린 최휘욱과 관련된 일에 배치되었다.
안쓰럽고, 안타까운 날들이었다. 광인들 사이에 껴서 망가지지 않고 멀쩡히 자라난 휘욱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이설 자동차 대표로 취임한 휘욱을 보필하기 위해 비서실장 자리에 오른 정 실장은 이제 그가 마음 놓고 쉴 곳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최씨 집안에는 그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독사들만 득시글했다. 결혼을 통해서 그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을 만났으면 했다. 하지만 정혼자였던 윤신효는 영 탐탁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편히 놓을 곳이 아니라, 또 다른 독사 한 마리를 품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스스로 스캔들을 터뜨리고, 파혼을 당하더니 윤신효의 사촌인 윤인애 양과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오늘 혹시 볼만한 공연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습니까?”
대체로 그는 출근하자마자 하루 업무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아침 회의를 한 후에 개인적인 일과에 관한 업무를 지시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공연이라는 단어가 생경했다. 아마도 티켓 선물을 염두에 둔 당사자와의 미팅이 있나 보다. 내가 모르는 그런 미팅이 있었나?
“저녁 식사도 하고, 공연도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뮤지컬이면 더 좋고요. 소극장 말고 대극장 쪽으로.”
“선물하실 겁니까? 메시지 미리 작성해 둘까요?”
“선물이라면 선물이죠. 메시지는 제가 직접 작성하겠습니다.”
대표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떠올랐다. 정 실장은 하마터면 두 눈을 비빌 뻔했다. 휘욱은 이렇게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버거운 유년 시절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버려서 웃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웃는 데 인색한 사람이었다.
“아내랑 갈 겁니다. 피폐한 공연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낭만적인 내용이었으면 합니다.”
대표의 언어 구사에 정 실장은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낭만의 니은 자도 모를 것같이 살던 사람이 태연하게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부정적인 변화는 아닌 것 같았다. 가슴이 뭉클 차오를 만큼 긍정적인 전향이었다. 늘 침울하고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진한 감정은 행복에 대한 방어 본능이지 싶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현 상황을 지키고 싶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깃든 행복을 만끽하면서도, 행여 깨질까 봐 조심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죽은 최태헌 대표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났다. 이제 편히 눈 감으셔도 될 것 같네요, 대표님. 정 실장은 새삼 감격스러워서 모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휘욱은 혼이 나간 듯 보이는 정 실장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느라 저렇게 들뜬 얼굴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향긋하게 우러난 블랙티를 한 모금 머금은 휘욱은 집무 책상 첫 번째 서랍 잠금쇠를 열고 그 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처음 이 편지를 받았을 때는 라벤더를 닮은 보랏빛이었는데, 조심히 간직했음에도 색이 바래 지금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휘욱은 오랜만에 편지를 펼쳐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