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36화
마치 동전을 뒤집듯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만 같았다. 집에 들어오면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했다. 그리고 그 살얼음은 두 사람을 에워싼 공기 속에서도 시린 온도 그대로 존재했다.
갑자기 누군가 두 사람의 시공간에 온풍기라도 틀어 놓은 것처럼 따뜻해졌다. 아니, 따뜻하다 못해 시시때때로 뜨거웠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인애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근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다. 그때 그 미소다. 서교동 골목길에서 오렌지빛 노을을 등지고 지었던 미소다. 세상을 단숨에 녹여 버린 건 그의 미소였던 걸까? 인애는 점점 다가오는 그의 웃음기 어린 입술을 바라보았다.
가라뜬 눈 아래로 보이는 것은 오직 그의 입술뿐이었다.
“오늘은 마음 놓고 밥 먹을 수 있겠다. 그치?”
그가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따뜻한 숨결이 입술을 간질이고 멀어졌다. 당연히 키스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갈망을 무참히 저버리듯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그동안 고단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밥 먹는데, 감시당하는 기분이었어. 우리가 먹는 밥알 수도 셀 것 같아, 그 아주머니는.”
인애도 일면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의 흐름은 동의할 수 없다.
“그래? 그랬지, 뭐.”
세련된 대응을 하고 싶었는데, 골이 났다는 것을 잔뜩 드러내듯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래?”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에 빈속이 요동친 것도 동시였다. 허기는 짜증을 부른다.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지금 인애에겐 그중 두 가지가 결핍되어 있었다. 식욕과 그리고.
“하아.”
그가 한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어쩌라고, 윤인애.”
인애가 하는 행동이 한스럽다는 듯이 그가 불평했다. 인애는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치킨 먹자고, 최휘욱 씨.”
인애는 그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일어난 입맞춤에 인애는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느낄 새도 없이 멀어지는 입맞춤은 불공정하다.
다가오는 사람이야 입을 맞출 의도로 입술을 내밀었으니, 짧은 순간의 짜릿함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그저 어린애들 장난 같은 접촉에 불과한 입맞춤이 만족스러울 리 없다.
그는 지금 인애를 놀리는 게 분명했다. 오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먼저 입술을 내밀고 싶지는 않아서 심통이 났다.
“왜 그렇게 골이 났어?”
그가 안쓰럽다는 듯이 물었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게 못마땅했다. 그와 인애는 나이 차가 제법 나는 편이었고, 어렸을 때 그는 인애를 완전히 애 취급 했었다.
“먹자고. 배고파서 그래. 나 배고프면 화낸다?”
인애는 일부러 더 유치하게 굴었다. 그러자 그가 물러섰던 거리를 좁히며 바짝 다가왔다. 또 이대로 당하는 건 싫어서 몸을 뒤로 물린 인애는 식탁 위에 걸터앉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내렸다. 느릿한 속도였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이 겹쳐졌다. 오랜 키스로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다시 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주무르듯 움켜잡았다. 그의 악력에 몸이 또다시 노곤해졌다. 피로감이 풀리면서 속성이 다른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인애가 받아들이는 힘보다 그가 밀어붙이는 힘이 더 컸다. 상체가 자연스레 뒤로 기울었다. 등 뒤에 차가운 대리석이 닿았다.
그가 목을 휘감고 있던 손바닥을 펼쳐서 뒤통수를 받쳐 주었다. 딱딱한 대리석 식탁에 머리가 닿지 않게 하려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흐음.”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입술이 떨어졌다. 당연히 여기서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입술이 인애의 턱을 타고 내려가 목덜미에 닿았다.
“흐읏. 휘욱 씨.”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가 입술을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쩌라고. 윤인애.”
살갗에 닿은 그의 숨결에서 퍼진 전율이 온몸을 관통했다. 인애는 저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었다.
“급한 건 싫다며.”
억눌린 욕망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밀도 높은 열정은 자꾸만 충동질을 부추겼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쩌라고.”
“어떤 얼굴?”
제 무덤을 판 것 같다는 생각은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들었다. 그가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리며 인애를 내려다보았다.
“갖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
직설적인 그의 발언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더 차오를 열기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물은 100℃에서 끓는데, 인간은 몇 번이고 거듭하여 끓어오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나 보다.
“삼키고 싶어서 미치겠다는 얼굴.”
인애가 당황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노골적으로 읊조렸다.
“먹고 싶어서 돌아 버리겠다는 얼굴.”
“그만……!”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친 순간, 그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이게 지금 무슨 소린가 싶어서 눈을 뜨자,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치킨.”
인애는 순간 그게 아니지 않으냐고 반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너무 밝히는 것 같아서.
결혼하자마자 자자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그의 짓궂은 장난에 신경질이 나서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아니 근데 좀 밝히면 어떤가? 신혼부부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인애가 급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입방정을 떨어 놨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을 저지르는 것은 사람의 입이라고. 그리고 사랑 앞에서 변덕이 심해지고, 감정이 널을 뛰는 것은 정상적인 사랑의 행로 아니던가.
“내가 치킨 먹자고 그랬겠어?”
인애가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그럼?”
그리고 뻔뻔히 되묻기까지 한다.
“최휘욱 씨, 당신이 갖고 싶은 거지.”
그는 인애의 이마에 경쾌한 마찰음이 나도록 입을 맞췄다.
“키스만 해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도발하는 재주는 있어, 또.”
“그 이상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이번에는 너무 솔직했던 것 같다. 인애는 괜히 억울해져서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질투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 여자랑 키스할 때도 이렇게 뜨거웠을까?
그 여자를 대할 때도 이렇게 매력적으로 굴며 장난스럽게 웃었을까?
그 여자를 안을 때도 원하는 대로 들어줬을까?
인애는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불려 가는 상념을 털어 버리려 가볍게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기분 나쁜 망상을 쉽게 떨칠 수가 없다.
완벽하게 정리한 걸까?
인애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바뀐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관능적인 분위기를 이어 가는 음소거가 아니었다. 적막한 공기를 먼저 깨뜨린 것은 그였다.
“왜 그래?”
그는 인애의 등허리를 끌어안고는 아이처럼 일으켜 앉혔다. 그가 인애를 다루는 방식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려하게 생긴 그 여자에게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또 불쑥 들어서 인애는 머리를 털어 내야만 했다.
“아니야. 배고파서 그래. 먹자.”
아무리 솔직해진다고 해도 지금 두 사람 사이에 그 여자를 끌어올 수는 없었다.
“윤인애.”
식탁에서 내려서자 그가 인애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 주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겨 주는 손길엔 그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친밀함이 가득했다.
인애는 대꾸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인애의 입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 입술에 입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그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이 재촉하는 투였다.
“그럼 이 입술은?”
인애가 그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며 되물었다. 그 여자의 존재감을 지워 버리라는 물음을 에둘러 하고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인애의 되물음이 흡족한 대답이 된 듯했다.
다시 한번 더 물으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모님, 근처에 대형 약국이 없어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 이 약이면 될까요?”
인애는 상냥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약이 든 봉투를 건네받았다.
“네, 이거면 돼요. 감사합니다. 이제 쉬세요. 알아서 먹고 치울게요.”
아주머니는 약국을 찾느라 꽤 지쳤는지 질척거리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어디 아파?”
“PMS.”
“아…….”
그가 PMS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졌다.
“PMS를 어떻게 알아?”
미처 감추지 못한 의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TV 광고에서 봤어. 그런 약 광고하는 거. 괜찮은 거야?”
인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PMS 탓에 예민해진 거다. 지금 그가 보이는 모습은 충실한 남편의 표본이었다.
“초콜릿 사다 줄까?”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인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웬 초콜릿?”
“청포도 맛 사탕 좋아하지 않아? 아니면 바닐라아이스크림?”
“단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스트레스 쌓일 때는 초콜릿 가끔 먹지?”
그의 말마따나 단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3 때까지 초콜릿은 가끔 먹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는 먹은 기억이 없다. 아이스크림도 밍밍한 바닐라 맛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먹는 식이었다.
그걸 다 알고 있는 그가 신기했다.
“내가 바닐라아이스크림만 먹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지난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마주쳤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팔뚝을 잡으며 야하게 웃었던 화려하게 생긴 여자의 얼굴도.
“조각은 살아 숨 쉬는 듯한 헬레니즘 양식의 조각상을 좋아해. 루브르 박물관 쉴리관에 종일 있을 수 있을 정도로.”
그가 다소 뿌듯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 어떻게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