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33화
컨디션 리포트를 집어 든 인애는 엉망이 된 기분으로, 엉망이 된 전시관을 향했다. 전시 전 기록해 둔 내용과 비교하며 스프레이 페인트가 튀어서 망가진 작품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야만 했다.
작품 상태에 대한 전수 조사가 끝난 후에는 보험사와 전시관 원상 복구를 위한 보상 범위를 논의해야 했고, 휴관 안내와 언론 통제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우선은 밤새 전시 작품에 관한 개괄적인 전수 조사라도 마쳐야 했다.
컨디션 리포트에 기재된 상황과 태블릿 PC에 저장된 고해상도의 작품 사진을 살피며 페인트 방울이 하나라도 튄 게 있는지 확인했다. 만약 망가진 작품이 있다면 전시관 원상 복구뿐만 아니라 작품 복원과 배상 작업도 동시에 진행해야 하기에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일 컨디션 리포트를 토대로 컨서베이터(Conservator; 복원 전문가)에게 다각적인 분석을 맡기기 전에 전시 책임자로서 일차적인 검토라도 마치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전시 작품은 총 50점, 일주일을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 분량이었다. 밤새 매달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김 대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단칼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감정이 복잡해진 나머지, 일 욕심이 앞선 거였다. 인애는 컨디션 리포트를 손에 든 채로 갤러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은 어떻게든 해결하면 된다. 문제는 휴먼 에러, 반복된 감정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자신이었다.
인애는 재킷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시관 안에는 시계가 없어서 몇 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대략 새벽 4시쯤 되었겠거니 생각하며 화면을 터치했는데 반응이 없다.
아까 사무실에서 무선 충전기 위에 올려 두었기에 배터리가 그새 방전될 리는 없었다. 인애는 꺼진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로 전시관을 빠져나갔다.
“어? 윤 과장님, 아직 계셨어요?”
순찰 중이던 보안 팀 직원이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네, 전시품 확인하느라 남았어요. CCTV로 저 못 보셨어요?”
인애의 질문에 보안 팀 직원은 짐짓 당황했다.
“저한테 그 천장 카메라 볼 수 있는 권한이 없어서요.”
“아……. 아까 잠겼던 거 풀어 드렸는데…….”
“보안상 이유로 30분에 한 번씩 패스워드를 입력하지 않으면 다시 잠기더라고요.”
보안 팀 직원의 문제가 아닌 체계의 문제였다. 관장과 보안 팀장, 전시 책임자 그룹에 속하는 임원급 전부의 동의 없이 비밀번호를 알려 주면 직무 해제의 이유가 된다.
“그것부터 해결해야겠네요. 비밀번호 알려 드릴게요.”
지금 상황에서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체계 따위는 무용지물이다.
“아……. 제가 실수를 좀 한 것 같은데, 어쩌죠?”
비밀번호를 알려 주겠다고 하는데도, 보안 팀 직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실수요?”
괜히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갤러리 바닥과 벽을 물들여 놓은 이들이 쉽게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가 혹시 보안 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였을까?
새벽까지 잠을 청하지 못한 탓인지, 날카로워진 신경이 경계심을 발동했다.
“부군께서 다녀가셨는데, 제가 갤러리에 안 계시다고 했거든요.”
보안 팀 직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인애는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부군이라는 단어가 바로 와닿지 않았다.
“누구요?”
인애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남편 되시는 분이요. 최휘욱 대표님.”
그의 표정은 카메라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 말할 때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부부간에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경직된 모습이었다. 소규모 갤러리 보안 팀 직원과 재벌가 자제의 간극이 만들어 낸 공포심처럼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이야기할게요.”
“그게…….”
보안 직원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되게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어쩌죠? 여기 계신 줄 알았으면, 제가 바로 안내해 드리는 건데요. 확인 못 해서 죄송합니다. 당연히 들어가신 줄 알았어요. 사무실 CCTV에도 보이지 않으셔서요.”
“그럴 수 있죠. 제가 보통 이 시간에 갤러리에 남아 있는 일은 드무니까요. 저 올라가 볼게요. 집에 전화라도 해야겠네요. 연락 안 한 제 잘못이죠.”
“워낙 정신없으셨잖아요.”
보안 직원의 얼굴이 아주 조금은 풀어진 듯했다.
“그리고.”
결이 다른 목소리가 보태졌다.
“최 대표님이 과장님 엄청 아끼시나 봐요. 걱정 많이 하시더라고요. 혼비백산이 되셔서 가셨는데……. 죄송해서 어쩌죠?”
그럴 리가. 예의상 한 말일 수도 있는데……. 기대감에 젖은 되물음이 흘러나왔다.
“언제쯤 왔었어요?”
“자정 지나서 오셨었어요. 한 다섯 시간 됐네요. 밖에 비 많이 오는데, 우산도 안 쓰셨는지 흠뻑 젖으셔서.”
또다시 헛된 기대를 품은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인애는 다시 한번 괜찮다며 보안 직원을 달래고는 사무실로 향했다. 고속 충전기에 휴대전화를 연결하고 전원이 들어오기까지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화면이 켜지자마자 부재중 통화 알림과 함께 메시지가 정신없이 들어왔다.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메시지가 인애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발신인은 당연히 그 남자, 최휘욱이었다. 좁은 몸통이 답답하다는 듯이 심장이 크게 너울졌다.
그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휴대전화 화면이 깜빡거리며 수신 화면으로 바뀌었다.
까만 화면에 떠오른 세 글자가 선명하다. 최휘욱.
그가 끊임없이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낸 탓에 전원이 꺼졌었나 보다. 인애는 끊임없이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움켜잡고는 핸드백 안에 쑤셔 넣었다.
대체 뭘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건데?
갤러리를 빠져나온 인애는 차를 집에 두고 온 탓에 대로변 택시 정류장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고 난 뒤라, 물비린내 가득한 찬 공기가 폐부를 훑고 들어오자 기분 나쁜 멀미가 일었다.
또다시 제멋대로 심장을 뒤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매혹적인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복잡하게 사는 건 딱 질색이었다. 원하는 대로 살아온 심플한 삶에 그가 끼어든 순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총천연색이었던 삶을 그가 무채색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료하고 지루한 삶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명암이 짙어지고, 대조가 분명해지며, 질감이 점점 또렷해졌다. 가장 어두운 부분과 가장 밝은 부분의 대비가 극명했다. 그간 살아온 삶은 희망찬 서문에 불과했고, 그와 함께하기 시작한 시간은 생생하고 섬세하게 기록되는 삶의 역사 같았다.
그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일지, 아니면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적 결말일지.
몸도, 마음도 지친 나머지 지금 당장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택시에 올라탄 인애는 충동적으로 근처 호텔 이름을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가 죽도록 미워서 보고 싶지 않았다. 또 무슨 조건을 들이대며 설득하려고 들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하지만 동시에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그의 말에 희망을 걸고 싶어서, 드물게 보이는 따뜻한 미소가 그리워서 가슴이 아렸다.
애정을 얻기 전에 애증부터 피어났다.
*
쓰러지듯 호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생수를 한 모금 마신 뒤,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여러 가지로 지쳐 있던 새벽녘보다는 머리가 한결 맑았다. 마냥 피할 수만은 없었다. 몸이 지칠 대로 지쳐 있을 땐, 관계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감정에 치우쳐 그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새벽녘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인애는 호텔 앞에 정차해 있는 모범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모님, 오셨어요? 어제 친정에서 주무셨다고요. 사장님은 일이 많으신지 밤새 사무실에 계시다가 이제 막 들어오셨어요. 침실에 계세요.”
휘욱은 의심 많은 아주머니에게 완벽한 부부의 일과 보고를 마친 듯했다. 의심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아주머니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어려 있었다.
“잠자리가 갑자기 바뀌어서 그런지, 피곤하네요. 저 좀 쉴게요. 점심은 그냥 두세요.”
“네, 사모님.”
그래도 깍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침실로 향했다. 방문 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그가 외출복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 슈트 차림이 아닌, 니트에 맥코트를 입은 모습인 걸 보니 회사에 가는 건 아닌 듯했다.
“어디 가?”
그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굳어 있다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인애의 손을 잡아 침실 안으로 이끌었다. 거센 악력이 느껴졌지만, 악의는 없었다.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이 평소보다 훨씬 뜨거웠다.
등 뒤에서 침실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손목을 잡고 있던 손힘이 스르륵 풀어지는가 싶더니, 그가 인애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순식간에 맥코트의 매끄러운 천이 뺨에 닿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인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심장이 둥둥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상체를 꽉 끌어안은 두 팔이, 맞닿은 그의 단단한 가슴이, 너른 그의 품 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옷을 사이에 두고도 느껴지는 그의 체온은 평소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등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던 손이 어깨를 쓸고 올라와 양 볼을 감쌌다. 그의 온도에 뺨이 녹아내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