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32화
차 안 공기는 적막했다. 그동안 기사 없이 움직인 일이 드물었기에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생경했다.
사무실 밀집 지역인 거리의 토요일 오전 분위기 또한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산한 회색 빌딩 숲의 정경과 살을 엘 듯 차가운 그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나머지 인애는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카페테라스에서 차가운 감정을 드러내던 그와 마주했던 순간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매 순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요원한 존재였다.
노을을 등진 채 눈부신 미소를 보여 주기도 했고, 철저히 계산적인 결혼을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기도 했고, 아픈 인애를 밤새 보살피기도 했고,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따뜻했다가, 차가웠다가.
차가운 가운데 한 번씩 보이는 햇살 같은 미소가 지독하게 따뜻해서 그에게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휘욱이 짙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기어를 옮겼다. 그를 향해 혼란스러운 감정을 마구 쏟아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틀린 답이라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또 갑자기 어려워졌을까?
인애 역시 짙은 한숨을 집어삼켰다. 그러자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친구랑 당분간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내 남편이라고 해서, 내 인간관계까지 정리해 줄 필요는 없어.”
인애는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읊조렸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지금 너한테 다른 마음 품고 있는 거 알면서 그래?”
인애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아내의 외도를 걱정하는 지고지순한 남편인 줄 알겠다?”
어쩔 수 없이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당신도 그 여자랑 끝내는 게 좋겠네. 안 그래?”
비소를 뒤섞어 묻자, 그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지겨워. 그런 얼굴.”
인애는 한숨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운전대를 쥔 그의 손등에 파란 핏줄이 불거졌다. 인애는 그에게 화를 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매달리고 싶은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평생을 살아온 서울이라는 도시가 낯설게 다가왔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아서 익숙했던 도시마저 생경하게 만들었다.
그와 나눠 마시는 답답한 공기, 함께 자리한 숨 막히는 공간, 메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틈새.
그를 원한 것 자체가 섣부른 바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념에 가까운 정리를 끝냈을 무렵, 차는 어느새 지하 주차장에 다다랐다.
더는 나눌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아서 차에서 내리려는데, 차량 블루투스 시스템에 연결된 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발신인의 이름이 떠올랐다.
[가은]
성을 빼놓고 이름만으로 저장해 놓은 두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가 연결 종료 버튼을 누르자, 화면은 이내 지도로 물들었다.
왜 안 받느냐, 내 앞에서는 받기 싫었냐, 혹시 미팅 핑계로 만나려던 사람이 정말 저 여자였던 거냐.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인애는 입을 다물었다.
“들어가, 먼저.”
이럴 줄 알았다며 인애는 자조했다. 대꾸 없이 차에서 내렸다. 이제 그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졌다.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시작부터 틀어진 관계여도, 아주 느린 속도로 진전된다 할지라도.
명백한 오판이었다. 시작부터 틀어진 관계는 나아질 수 없다. 아주 느린 속도의 진전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지치게 할 뿐이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다다랐을 때,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혹여 그가 신경이 쓰여서 전화를 건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발신지는 갤러리였다.
“네, 윤인앱니다.”
― 과장님, 갤러리로 좀 와 보셔야겠어요.
짬이 찬 인애는 주말에 출근하지 않았지만, 김 대리는 주말 출근이 잦은 편이었다. 김 대리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야? 아니, 지금 바로 출발할게. 기다려.”
김 대리의 대답에 의한 일의 경중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지나치게 뾰족해진 신경을 분산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 인애는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 망연자실했다.
“누가 이랬다고?”
“일단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분명히 입구에서 가방 검사도 했고요. 보안 검색대 통과할 때도 반응 없었거든요. 안티스키밍 천으로 가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고요.”
전시된 작품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갤러리 바닥과 벽에 엄청난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몇 명이서 이런 거야?”
“모르겠어요. 일반 관람객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품 안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를 꺼내서 움직였대요. 놀라서 갤러리에 항의한 사람들도 있고요, 그냥 퍼포먼스인 줄 알고 멀찍이서 구경한 관람객도 있고요.”
“작품은 전부 멀쩡한 거지?”
“네. 그나마 다행이죠.”
인애가 기획한 전시 구역만 엉망이 되어 버렸다. 갤러리 흰색 벽에는 미술계 동향을 비웃는 듯한 그래피티가 기가 막힌 작품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거요.”
김 대리는 울상이 된 얼굴로 쭈뼛거리며 흰 종이 한 장이 담긴 지퍼 백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골치 아픈 짓을 저지른 놈들이 남겨 놓고 간 메시지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발견하자마자 편의점 뛰어가서 지퍼 백부터 사 와서 넣었어요. 제 지문 남아 있겠지만, 경찰에 넘기면 뭐라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인애는 펼쳐진 채로 지퍼백 안에 고이 들어가 있는 A4용지를 들여다보았다. 유치하게 잡지에서 글자를 하나씩 오려서 만든 퍼즐 같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술가인 척하지만, 돈에 미친 기획자의 편협한 전시]
얼굴 없는 예술가는 인애의 전시를 비방하기 위해 그래피티를 새겨 놓고 간 듯했다. 본 전시관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도 같았다.
“경찰은 왜 안 와?”
“오고 있대요, 지금.”
“일단 갤러리 문부터 닫아.”
부인과 다낭으로 골프 여행을 떠난 관장은 지금 비행기 안에 있었다. 부관장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알아서 하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돌아왔을 뿐이다.
인애는 갤러리를 폐쇄하고 경찰의 연락을 기다렸다. 갤러리를 방문한 경찰은 CCTV 녹화본부터 조사했다.
“사각지대에서 손만 뻗어서 화면부터 칠했네요.”
용의주도한 범인들은 정체를 들킬까 봐 두려웠는지, 제일 먼저 CCTV 카메라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렸다.
“갤러리 천장에 360도 촬영 가능한 카메라가 있어요. 그건 못 건드렸을 겁니다. 그것부터 보죠.”
인애는 갤러리 관장과 보안 팀장, 그리고 과장급 직원들만 알고 있는 녹화본에 접근하기 위해 PC에 보안 코드를 입력했다.
다행히 해당 카메라를 통한 기록은 남아 있었다. 무리는 전부 세 명, 겁도 없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아 카메라엔 범인들의 전신이 또렷이 찍혀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갤러리 바닥과 벽을 도배한 그들이 빠져나가기 직전, 무리 중 리더로 보이는 한 명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화면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전화하겠다는 건가? 혹시 아는 사람들입니까?”
인애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저들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했다. 인애에게 아니, 전시 책임자와 연락이 닿기를 바라는 듯했다.
“일단 이 녹화본 가지고 가서 추적해 보겠습니다.”
경찰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작품이 도난당한 것도 아니고, 인명 피해도 없을뿐더러, 화면에 다 찍혔으니 쉽게 잡힐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경찰이 돌아간 후, 인애와 김 대리 그리고 보안 팀 직원 세 명이 갤러리에 남았다. 보안 팀 직원들은 흔적을 더 찾아보겠다며 갤러리를 수색했고, 김 대리와 인애는 전시관을 폐쇄한 채 사무실로 올라왔다.
“전시 도록에 내 이름이랑, 사무실 전화번호 있지?”
“네, 전시 책임자로 과장님 이름이랑, 사무실 대표 번호 적혀 있어요.”
그들이 인애에게 어떻게든 접촉해 올 것 같은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이번 전시 컨디션 리포트(전시 전 작품의 상태를 기재해 놓은 보고서) 좀 출력해 줘. 그리고 이번 전시에 초청된 작가님들한테는 갤러리 내부 사정으로 며칠 휴관할 수도 있다고 연락해야 하니까, 연락처 리스트도 같이 부탁해.”
인애가 하는 말을 받아 적는 김 대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계속 휴대전화를 만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선약이 있는 모양이었고,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난감해 보였다.
“김 대리.”
“네?”
갑작스러운 부름도 아니었는데, 김 대리는 흠칫 놀란 얼굴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김 대리는 쭈뼛거리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인애가 달래듯 되묻자, 김 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 아버지 생신이라, 오늘 식구들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괜찮아요, 과장님. 안 가도 돼요.”
“프린트 내가 할게. 어서 들어가.”
“그래도…….”
“오늘 안으로 해결될 문제 아니야. 아버지 생신이 더 중요하지. 이깟 낙서가 중요해?”
인애는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는 김 대리를 달래서 퇴근시켰다.
보안 팀도 당직 직원을 제외하고는 퇴근했고, 결국 사무실에는 인애 혼자 남았다.
인애는 밤이 늦도록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 갤러리 내부 사정에 의한 휴관이라는 말에 일부는 수더분한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손해 배상을 청구하겠다며 펄펄 뛰어 댔다.
마지막 작가와의 통화를 끝냈을 때, 인애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PC 화면 하단에 찍혀 있는 시간을 보니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무선 충전기 위에 울려 둔 휴대전화가 스르륵 움직이며 진동했다. 작가나 갤러리 관계자 중 한 명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발신인을 마주하자 심장이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덜컥거렸다.
[최휘욱]
남편의 이름을 이렇듯 무정하게 저장해 뒀으면서 그에게 무엇을 바란 걸까?
인애는 통화 거부 쪽으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고는 휴대전화를 재킷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