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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먼저 31화 (31/68)

결혼 먼저 31화

주말인데도 그는 회사에 나가 봐야 한다며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었다. 아주머니 앞에서 완벽한 애정을 지닌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하느라, 그의 주말 출근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현관 앞에서 그의 슈트 재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고, 넥타이 매무새도 만져 주었었다. 하지만 그는 꽉 옭아맸던 넥타이를 풀어 손에 든 채로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어떻게 왔어요?”

인애가 다소 황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필원이 꽉 잡고 놓아 주지 않으려는 손을 간신히 빼냈다.

들었을까? 필원이 털어놓은 말을 다 들은 걸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을까?

큰 잘못을 저지르다가 들킨 어린아이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인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태연해지려 노력했다.

그는 전형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기분 나쁜 망상을 한 듯 눈빛에는 불쾌함이 어려 있었다.

“지나가던 길에, 감히 내 아내 얼굴에 손을 대는 남자를 봐서.”

필원이 머리카락을 넘겨 주던 모습을 그가 본 듯했다. 삐딱하게 내뱉은 그의 어조에는 사랑에 눈이 멀어 질투를 표출하는 남자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타인의 눈에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의 부정을 대면한 지고지순한 남편의 모습처럼 보일 것 같았다.

“별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머리카락 몇 가닥 넘겨 준 것뿐입니다.”

조금 전까지 처절한 마음을 드러내던 필원은 감정의 찌꺼기를 완전히 비워 낸 얼굴이었다. 지금껏 애정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호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건조하다.

“다른 남자 아내가 된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누가 보면 머리카락 몇 가닥이 아니라, 서로 부둥켜안고 주무른 줄 알겠다. 그의 눈빛과 어조에는 지나칠 정도로 거만한 비난이 뒤섞여 있었다.

“그만해요. 여기 탁 트인 공간인데.”

테라스엔 세 사람 이외의 다른 무리는 없었지만, 행여 길을 지나가는 사람에게라도 이상한 치정극으로 비칠까 봐 겁이 났다.

“그래. 여긴 탁 트인 공간인데, 결혼한 사람이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지. 지나가다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가 언뜻 상처받은 눈빛을 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픈 사람이 지을 법한 눈빛이 당황스러웠다.

“그만하죠. 내가 당신한테 그런 소리 들을 만큼 잘못한 일은 없으니까.”

급격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뜻하지 않은 신경전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와 결혼한 이후로 하루도 마음 편히 보내는 날이 없다.

자극하거나, 자극당하거나.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고작 상대를 기죽이는 신경전을 벌이며 얼굴을 맞대는 것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동할 리가.

인애는 씁쓸한 기분을 집어삼켰다. 첫사랑이었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고, 친한 친구의 고백으로 인해, 우정도 관념적인 단어가 되어 버렸다.

“필원아,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우리 다시 보자.”

친한 친구와 남편, 표면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 안에 얽힌 정서와 마음이 비정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상으로 돌릴 수 있을까?

인애는 가늠할 수 없는 가정을 떠올리며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11시에 회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벌써 10시 반인데, 늦겠어요. 어서 가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은근한 신경전이 피로했다. 감정을 삭이지 못한 필원을 너무 일찍 만났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왜 하필 필원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아이스아메리카노 포장해 달라고 할게. 아까 추운 것 같다며, 따뜻한 거로 바꿀까? 근데 너 아이스아메리카노 말고는 안 마시잖아.”

그를 의식한 듯 필원이 다정하게 굴었다.

“아냐, 그냥 아이스아메리카노 마실래.”

“그래, 그럼.”

그가 어떤 얼굴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필원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포장해 오겠다며 안쪽 주문 데스크로 향했다.

“기분이 좋건, 나쁘건 말 놓겠다더니, 저 친구랑 같이 있을 때는 꼬박꼬박 존대하네?”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가 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위한, 무엇에 의한 방어 기제인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아마도 누군가 상처받거나,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것이 두려워서 튀어나온 방어 기제였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앞에 있는 남자가 아닌 오랜 친구인 필원이었다. 어쨌든 이 남자와는 결혼했지만, 필원과는 친구 사이마저 위태로워진 상황이다. 필원은 비뚤어진 관계조차도 괜찮다며 절절한 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해 왔다.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가 향한 방향을 그도 눈치챈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군가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상처받은 눈빛을 했다.

어째서?

인애는 은연중에 드러난 그의 뜻 모를 속내 때문에 가슴속이 갑갑해졌다.

쇼윈도 부부로 지내자던 남자가, 절대 함께 자는 일은 없을 거라던 남자가, 다른 여자를 곁에 두고 있는 남자가, 어째서?

희망 고문이라는 고통스러운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가슴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밖에서 부부 관계를 드러내는 말투를 굳이 쓸 필요는 없으니까.”

“누가 볼까 봐 두려운 건 아니고?”

휘욱의 물음에 인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진심으로 질투하는 것처럼 보여서 목구멍이 뻐근할 정도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내 눈에 보일 정도면, 다른 사람 눈에는 더 쉽게 보일 수 있다는 의미야. 앞으로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그는 이내 표정을 지우고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읊조렸다. 그러곤 보란 듯이 인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단단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눈길이 닿아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겨 보니, 필원이 종이봉투와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너 아침도 안 먹었지? 와플 하나 포장해서 넣었어. 가져가서 먹어. 너 여기 와플 좋아하잖아.”

필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인애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인애가 손을 뻗기도 전에 필원이 내민 종이봉투와 테이크아웃 잔을 그가 받아 들었다.

“내 아내에게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이 사람이 신혼여행 다녀온 뒤로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제가 이만 데리고 가죠.”

그가 마치 벌레를 떼어 내는 듯한 표정으로 필원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게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친구한테까지 제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많이 바쁘신가 봐요? 주말인데도 출근하셔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인애한테는 신경 못 쓰실 만큼.”

한껏 예의를 갖춘 어조였지만, 비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출근하신 게 아닌가?”

이번에는 명백한 시비조였다.

“필원아.”

인애가 나직한 목소리로 필원의 이름을 부르자, 필원이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인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필원이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그가 더 빨랐다.

“치기 부리느라 한 치 앞을 못 보는 친구네.”

휘욱이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일갈하고는 돌아섰다. 인애가 버티려고 하자, 어깨를 잡은 손에 악력이 더해졌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믿을 만한 사람이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저런 어설픈 놈이랑 만난 건가, 오늘?”

인애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몰라주면서, 자극하는 방법은 기가 막히게 깨우친 남자다. 인애는 고개만 비스듬히 돌려서 필원을 바라보았다. 손을 살짝 들어 전화하겠다는 시늉을 하자, 필원이 애써 덤덤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카페에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남편과 친구를 나란히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며 이목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지금은 물리적인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심적으로는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카페를 빠져나가자, 그의 수행 비서진이 비상등을 켜 놓고 도로가에서 대기 중인 차 앞에 서 있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서초동으로 이동하셔야.”

그가 미간을 구기자, 정 실장이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눈치 빠른 정 실장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인애가 고맙다는 미소를 지으며 뒷좌석에 오르려는데, 그가 막아섰다.

인애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여전히 문을 잡고 서 있는 정 실장을 향해 읊조렸다.

“먼저 들어가지, 정 실장. 미팅은 다음 주 중으로 미룹시다.”

휘욱의 말에 정 실장이 한 발짝 물러서서 묵례하고는 운전기사와 함께 돌아섰다. 정 실장의 뒷모습에 머물던 그의 시선이 이내 인애를 향했다. 분노를 드러내기 시작한 그의 눈동자를 인애는 쏘아보듯 했다.

그는 화를 낼 때조차, 인애에게 뜨겁지 않은 남자였다. 감정을 고조시킬 가치조차 없다는 듯한 남자의 서늘함과 반대로 뜨겁기만 한 인애는 거친 화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치기 부리느라 한 치 앞을 못 본다고 비꼴 땐 언제고, 정 실장님은 왜 들여보내?”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탁 소리가 나도록 뒷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피로 섞인 목소리를 냈다.

“일단 타. 집에 가서 이야기해.”

“집에 가면 아주머니 눈치 보느라 무슨 얘기나 할 수 있겠어?”

사실 그대로를 지적하자, 그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건 인애도 마찬가지였다.

“가면서 이야기하자, 그럼.”

그의 감정은 제로를 지나 마이너스로 향하는 듯했다. 어쩜 저렇게 감정을 지우고, 감추고, 비워 내려고만 하는지. 섭섭하고, 속이 상했다.

“그래, 무슨 이야기든 해 보자.”

그의 진심을 묻고 싶어졌다. 대체 왜 이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건지 따지고 싶었다.

대체 뭐가 두려워서 그렇게 감정을 비워 내는 건지도.

왜 그렇게 질투에 눈이 먼 남자처럼 구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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