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30화
“그건 안 돼.”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웃었다. 미소 띤 입가와 그늘진 눈가가 섬뜩할 정도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 위험하리만큼 유혹적인 얼굴에 매료된 나머지, 인애는 잠시 전의를 상실했다.
나는 무슨 목적으로 이 남자를 자극하고 있는 걸까.
단지 화풀이를 하고 싶어서?
사사로운 감정을 풀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인생의 모든 것이 거대한 목적을 향해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 적당한 화풀이는 정신 건강에 좋다고 수많은 의사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왜 안 되는 거지? 당신은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뭐야?”
“너라서 안 되는 게 아니라, 네가 만날 상대들 때문에 안 된다는 거야.”
경악하는 그의 눈빛과 어우러진 매혹적인 미소를 보고 슬쩍 풀리려던 화가 다시금 치솟아 올랐다.
“그 여자는 되고?”
그는 보란 듯이 긍정했다.
“가은이는 어디 가서 나와 있었던 일을 떠들고 다닐 성격이 아니니까.”
그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심장을 할퀴고 흩어졌다.
“그 여자를 어떻게 믿고?”
감정이 흔들리는 탓에 인애의 가느다란 목소리도 위태롭게 흘러나왔다.
“무조건 믿어.”
갑자기 가슴이 확 조여드는 것처럼 답답해서 인애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하필 벽에 걸린 결혼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혼배 미사를 집전한 신부님이 서 계셨고, 그 뒤로는 마리아상이 자리했다.
인애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신 앞에 무릎 꿇고 백년가약을 맺은 그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더 믿음직스럽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분명히 지옥에 갈 거야.”
당장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마당에 사후에 일어날 일을 저주하는 것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가슴에 머무는 치욕스러운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남자가 좋다고? 이런 남자를 사랑하겠다고?
인애는 스스로 반문했다. 눈물이 왈칵 치솟을 것만 같아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마음이다. 인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차오른 물기가 안구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기자, 그는 감정을 지운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나도 믿을 만한 남자랑 하면 되겠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울리지 않는 짓 하려고 애쓰지 마. 너만 힘들어.”
“걱정해 주는 척하는 말, 가소로워.”
“너희 부모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해 봐. 그분들이 얼마나 상처받으실지.”
인애의 아킬레스건인 부모를 끌어들이는 그는 지나치게 영민했다.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야, 최휘욱.”
“알아.”
그의 말투, 목소리 톤, 눈빛, 긍정하는 고갯짓에 진정성이 어려 있어 당황스러울 정도다.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에 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동의했다.
더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인애는 무참한 기분이 되어 돌아섰다. 그와 침실을 함께 쓰면 관계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남편과 함께 나누어 쓰는 공간, 침실이 지옥 불구덩이처럼 처참하게 느껴졌다. 악마가 고문하듯 그는 인애를 들쑤시고 괴롭혔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마음이 부피를 부풀려 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순수한 사랑에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뒤틀린 욕망일까.
*
카페테라스로 나가자 미풍이 얼굴을 부드럽게 스쳤다. 불어온 바람 탓에 흐트러진 머리가 뺨을 간질여서, 인애는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주말 이른 오전, 사무실이 밀집된 동네의 카페테라스는 텅 비어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재빨리 돌아보려고 했는데, 필원이 더 빨랐다. 필원은 단단한 무릎으로 인애의 뒷무릎을 툭 쳤고, 그 바람에 몸이 갸우뚱 기울었다.
“야, 너 이 장난 좀 하지 말랬지!”
인애가 중심을 잡으려고 손을 버둥거리자, 필원이 인애의 가느다란 팔뚝을 잡아서 바로 세워 주었다.
“나쁜 새끼.”
눈을 흘기며 욕설을 내뱉자, 필원이 예전과 같은 얼굴로 웃었다. 변함없는 얼굴을 마주하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결혼식 날 이후로 첫 만남이었다. 필원이 신부 대기실에서 털어놓았던 말은 고백에 가까웠었다.
이제 더는 친구로도 지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도 필원은 예전처럼 인애를 대해 주려는 듯했다.
“잘 지냈어?”
필원이 인애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다정한 접촉에 인애는 몸을 슬쩍 뒤로 빼며 대꾸했다.
“어, 잘 지냈어.”
“뭐야? 내가 더러워? 왜 피해?”
필원은 대놓고 인애의 행동을 지적했다. 이제 기혼이니까 조심해 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필원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고백을 받았지만, 연인 사이는 될 수 없는 처지고, 그렇다고 친구를 잃고 싶지도 않은데…….
어제 그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아붙였지만, 이기적인 건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필원을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만나자는 필원의 연락에 응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이기적인 것만 같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인애는 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아까는 본능적으로 예전과 같은 모습이 나왔지만, 생각이 복잡해질수록 가장 편했던 친구인 필원을 대하는 게 어려워졌다.
“이제 유부녀라고 몸 사리는 거야? 그래, 조심해야지. 재벌가 사모님이신데. 잘 지냈어? 얼굴 살이 쏙 빠졌네?”
물음이 이어질수록 필원의 얼굴이 안쓰럽게 변해 갔다. 인애는 거리가 가까운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대꾸했다.
“신혼여행 때 좀 무리했는지, 몸살이 났었어. 너는?”
필원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한 번 휙 지나가는 바람처럼 허무한 헛웃음 소리를 냈다. 신혼여행 가서 무리했다는 말을 다른 의도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니, 내 말은.”
“됐어. 나 너랑 불편해지기 싫어. 그냥 편한 대로 해.”
“네가 편하지가 않잖아, 지금.”
속이 상해서 말투가 곱지 않게 나갔다.
“네가 편하면 됐다고, 윤인애. 그냥 너 편한 대로 해. 나도 거기에 적응할 테니까. 너 7년 짝사랑이 쉽게 접힐 것 같아? 여태까진 친구라는 관계에 얽매여 고백조차 못 하는 게 싫었는데, 지금은 친구라도 하고 싶은 마음 알아?”
필원이 안쓰러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라면 안 되는 애정을 갈구하는 필원의 모습이 자신과 닮아 있는 듯해서 마음이 아렸다.
얼마나 아플지 알아서. 얼마나 고될지 알아서.
“남편이 잘해 줘?”
필원은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제발 잘해 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아니길 바라는 양가감정이 필원의 안쓰러운 표정에 녹아 있었다.
못되게 구는 남자와 함께 있는 상황이 지옥 같으면서도 더 다가가지 못해 안달이 난 자신의 모습과 그런 필원의 모습이 겹치는 건 왜일까.
인애는 한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잘해 준다는 거짓말이 쉽사리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 아이스아메리카노 시켰는데, 바람이 차네. 따뜻한 거로 바꿀까?”
말을 돌려야겠단 생각에 엉뚱한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그 소문 진짜야?”
필원이 철제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무슨 소문?”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를 바랐는데, 되묻는 어조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 묻어 있다고 느껴질 만큼 어색했다.
“윤인애가 이렇게 당황할 때도 있네.”
내내 테이블을 바라보던 필원의 시선이 인애를 향했다. 검은 눈동자가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오랜 친구를 속이는 건 쉽지 않은 법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알고 있는 친구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네 남편이라는 새끼가 내연녀 정리 안 하고 스캔들 무마하려고 결혼했다는 소문. 너는 사촌 언니 대신 팔려 간 거라는 소문.”
“어떻게 너까지 알아, 그 소문을.”
인애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시선을 돌렸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며, 인애의 머리카락이 또다시 흐트러졌다. 필원의 손이 닿기 전에 재빨리 머리카락을 넘기려는데, 파르르 떨리는 손이 작은 손을 끌어 잡았다.
인애는 당황한 눈빛으로 필원을 바라보았다. 우정이 아닌, 이성을 향한 뜨거운 욕구가 가득한 손길이었다.
“다른 여자한테 빠진 놈이 아내한테 잘할 리가 없잖아?”
필원은 다그치듯 묻고 있었다. 위로의 말을 건넨 것도 아닌데, 감정이 왈칵 치솟았다.
“내가 해 줄게.”
“뭘?”
인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필원을 바라보았다.
“억울하지도 않아? 평생 그러고 살 거야? 그놈은 다른 여자 만나는데, 너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어? 다른 데 소문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이놈이 내 등쳐 먹으려고 이러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가 필요하지 않아?”
필원은 미리부터 생각을 정리하고 나온 것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나보다 널 더 잘 아는 남자가 세상에 있어? 너랑 결혼한 그놈은 네가 얼어 죽을 추위에도 얼음 가득 넣은 아이스아메리카노만 마신다는 거 알아? 영화 예고편은 보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스포라도 하면 세상천지 제일 나쁜 사람 취급 하잖아. 그러면서 막상 영화 보는 건 좋아하지도 않고.”
필원이 늘어놓는 말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내가 해 줄게.”
필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너 혼자 두고 외롭게 하는 나쁜 놈 옆에 있는 게 힘들면 나한테 와. 언제든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어서, 시선을 피해 버렸다.
“못 들어 주겠네, 진짜.”
마치 신부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이 되풀이되는 것만 같았다. 환청처럼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는, 그가, 혼자 두고 외롭게 하는 나쁜 놈이, 남편 최휘욱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