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28화
질투는 사랑에 확신이 없는 자의 불안을 먹고 자라난다. 가슴속이 걷잡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감각으로 뒤덮였다.
인애는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시작되었던 멀미증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래서 루앙프라방에 가면 말이야. 수공예로 만든 가방이…….”
상기된 목소리로 재잘거리던 여자의 말이 뚝 끊겼다. 인애가 걸어오는 방향을 마주 보고 서 있던 여자가 자연스럽게 인애를 발견한 것이다. 여자가 단단한 어깨 너머를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심기가 불편한지 미간을 구긴 채였다. 아마도 문 앞에서 마주친 경호 요원에게 이곳의 출입을 통제하라고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한 듯했다.
그것도 보통의 침입자가 아닌 두 사람의 밀회를 정통으로 훼방 놓을 수 있는 아내라는 불청객이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두 사람을 마주한 순간, 온 신경이 전투태세를 취하는 것처럼 올올이 일어났다. 예민하고, 강렬한 움직임이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어둠 속에서도 시야는 더욱 또렷해졌고, 청각은 기민해졌으며, 산란했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어.”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도 당연했다. 인애의 반응이 생각보다 싱겁다고 여겼는지, 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약간은 당혹스러움이 어리는 듯했다.
“왜 나왔어? 어련히 알아서 들어갈 텐데.”
휘욱이 옆에 있는 여자를 의식한 듯 냉혹하고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목소리로 심장을 벨 수 있다면, 지금 그의 목소리는 인애의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뚫린 구멍으로 휑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가슴이 시렸다.
“당신이 파티 주최자인데,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것 같아서 나와 봤지.”
인애는 보란 듯이 그의 곁에 서서 팔짱을 꼈다. 그러자 그가 재빠르게 팔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이제 인애보다 그 여자와 더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들어가.”
그가 명령하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같이 들어가자.”
인애는 상냥하지만 명료한 어조로 대꾸했다.
“저기, 나는 투명 인간인가?”
타이밍을 엿보던 여자가 해사한 웃음을 머금으며 끼어들었다. 밤공기를 가르는 여자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맑았다. 퇴근하고 바로 이곳으로 온 탓에 오피스 슈트를 입고 있는 인애와 달리, 그녀는 한껏 치장한 모습이었다.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을 의식하는 어리석고 낡은 의식에 기반을 둔 질투가 아니었다. 아마 인애는 파티가 있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오피스 슈트 차림으로 참석했을 것이다.
인애는 오늘 오후에서야 파티에 초대되었지만, 그녀는 미리부터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을 알고 공들여 준비한 것 같았다.
그녀가 인애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게 기분이 나빠진 원인이었다.
“반가워요. 또 보네. 예전에 내 소개 했던가? 송가은이에요.”
인애는 이 상황이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그쪽이 썩 반갑지는 않네요. 내 이름은 말 안 해도 알죠?”
마주한 여자의 얼굴에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어린 감정은 분명한 호감이었다. 마치 학기 초에 마음이 맞을 법한 친구를 앞에 두고 가슴 설레어 하는 여고생의 눈빛 같았다.
여과 없이 드러내는 여자의 반응이 당황스러워서 인애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세상에는 도무지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에게 호감을 느끼는 여자라,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다.
저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기에 결혼한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종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세계의 복잡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예술계에 몸담은 인애지만, 여자의 사랑 방식은 이해 불가였다.
그리고 그 여자와 인애가 인생을 대하는 방식에서 오는 간극은 불편한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 남편 꼬시는 년을 곱게 볼 여자가 어딨어?
“먼저 들어가.”
인애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눈치챈 것과 더불어 분노 표출을 예상했는지, 휘욱이 심각한 얼굴로 인애를 다그치듯 말했다. 인애는 뾰족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짜증과 신경질이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같이 들어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 좋은 그림은 아니라는 거 알지?”
인애는 두 사람을 비난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사람들 이목도 있는데, 조심해야지. 좋은 일 앞두고 여러 사람 불러 놨는데,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어?”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걸린 학생을 다그치는 선생이 된 기분이었다. 반항심이 가득한 어린 학생은 자신이 왜 혼나는지 모르겠다는 따분한 얼굴로 선생을 바라보곤 한다. 남자의 눈빛이 딱 그랬다.
학생의 심술궂은 눈빛은 선생을 화나게 하기 마련이다.
“들어가자고.”
인애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우쳐 말했다.
“윤인애 씨, 알고 보니 되게 이기적인 사람이었구나.”
여자의 천진한 목소리가 호쾌하게 흘러나왔다.
“나 지금 남편 있는 여자 꼬셔 내는 내연녀 취급 받는 거 맞지, 자기?”
그녀가 유혹적인 손길로 그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요?”
인애가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봐요, 윤인애 씨.”
그녀가 빨간 스틸레토 힐을 얄밉게 움직이며 다가왔다. 납작한 플랫 로퍼를 신은 인애와 눈높이가 맞는 것을 보니 인애보다 키는 조금 작은 것 같다.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걸로 보여? 착각하지 마. 우리 둘 사이에 윤인애 씨가 끼어든 거야. 전후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어요?”
누가 먼저였는지를 논하는 여자의 말에 기가 찼다.
“내가 먼저였어요.”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큼 충동적인 말이 툭 튀어나왔다.
“뭐?”
여자는 신선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최휘욱이라는 남자를 알아본 건, 내가 먼저였다고.”
때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진심이 흘러나오거나, 진실이 드러나곤 한다. 세상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고, 우연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기자의 실수에서 비롯된 오보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내연녀의 도발로 남편에게 오래된 짝사랑이자 첫사랑을 고백하는 날도 오는 것이다.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배를 쥐고 폭소했다. 낄낄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후원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소음처럼 느껴지는 리듬에 소름이 돋아났다.
“자기 부인 지금 뭐래?”
여자의 음성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혼자 자기 짝사랑하기라도 했나 봐. 어머, 안쓰러워라.”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읊조렸다.
“들어가라고 했잖아, 아까.”
여자의 말은 아무런 상처도 되지 않는다. 인애에게 의미도, 존재 가치도 없는 인물의 공격은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아프다.
“같이 들어가자고 했잖아.”
“가은이랑 할 얘기 남았어. 먼저 들어가.”
그가 인애에게 등을 돌리며 일갈했다.
“꽤 똘똘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재벌가에서 순진하게 자라셔서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 같네. 내가 무슨 일 하는지 정 여사가 알려 주지 않았어요? 내가 뭐 우리 자기랑 섹스라도 하려고 여기 나와 있는 것 같아요?”
“가은아.”
그가 말을 가려서 하라는 듯 다독이는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
“미안, 자기. 사태 파악 못 하고 징징거리는 어리고 순진한 친구한테는 꼭 집어서 말해 줘야 알아듣는 거야. 자기 너무 물러 터진 거 아냐?”
사태 파악 못 하고 징징거리는 어리고 순진한 친구?
여자가 제멋대로 규정한 날 선 단어들이 인애를 옭아매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 왕왕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가 여자를 다독이는 목소리도 듣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자리를 피해 줘야 한다는 사실 자체도 역겨웠다. 그렇다고 버티고 서 있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최휘욱.”
인애는 더러운 오물을 내뱉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서 뚝뚝 묻어나는 끈적끈적한 애증이 건조한 대기를 적시는 듯했다.
“집에서 봐.”
인애는 그를 향해 산뜻한 인사를 건넸다. 이대로 집으로 향할 생각이다. 그를 위한 파티 자리에 남아 있을 이유가 더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부탁했던 그 일도 맡고 싶지 않다고, 여자의 말마따나 어리고 순진한 애처럼 골을 내고 싶은 심정이다.
나에게도 관심을 달라고 울먹거리기라도 할 건가.
나는 대체 이 남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걸까.
세상 끝에 서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처절한 기분이 들 만큼 순식간에 빠져 버린 것일까.
인애는 표독스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유쾌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모습이었다. 인애는 한걸음에 여자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너.”
그가 저지할 틈도 없이 인애가 여자의 묶어 올린 머리를 움켜잡고는 뒤로 확 잡아당겼다. 억 소리를 낸 여자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입은 가죽이 모자라서 뚫어 놓은 게 아니야. 함부로 떠들지 마. 나이 많은 어른이면,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쯤은 알아야지.”
빠르게 할 말을 내뱉은 인애는 손에 쥐고 있던 여자의 머리카락을 내팽개치듯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원을 빠져나갔다.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오라는 정 여사의 말을 듣길 잘했다.
아주 얼마간은 속이 후련했다. 지독하고 잔인하게 짧은 시간 동안 말이다.
“와, 네 마누라 보통 아니게 사랑스럽네?”
가은은 혀를 내두르며 휘욱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내가 사랑스럽냐고 물었을 때, 웃음을 머금으며 사랑스럽다고 대답했던 남자. 이보다 안쓰러운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