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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먼저 26화 (26/68)

결혼 먼저 26화

인애가 자리를 비켜 달라는 눈짓을 보내자, 눈치 빠른 김 대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이유 없이 걸려 온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인애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전쟁터에 나갈 것도 아닌데, 전열을 가다듬는 병사처럼 비장해지는 기분이다.

“여보세요?”

― 잠시 통화 가능한가?

통화 여부를 묻는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감정을 섞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듯이 당연한 건조함이 묻어났다.

“가능하니까 받았겠지.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가 건조할지언정, 인애의 어조는 상냥하기만 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인애의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닐 텐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인애가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어 내어 화면을 한 번 확인했다. 통화 중이라는 표시와 함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어. 다름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이설 자동차 재단 설립 관련 사전 미팅이 있어. 세미 칵테일파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

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설 자동차에서 설립할 재단에서 일해 줬으면 해.’

마치 그때 대화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그는 재단 설립 사전 미팅에 참석하라고 말하기 위해 전화한 거였다.

“내가 참석하는 목적은?”

인애는 뻔히 알면서도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참석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다. 그가 고민에 빠진 듯 휴대전화 너머에서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인애 쪽이었다. 주관식이 어려우면, 객관식 문제를 내 줘야 했다.

“내가 당신 파트너로 참석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재단에서 일하길 바라고 부르는 거야?”

― 둘 다.

망설임 없는 그의 대답이 반은 마음에 들고, 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의 가능성은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 인애의 결정이 그러했다. 51 대 49로 그의 파트너로서의 자격이 더 깊숙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되는데?”

― 갤러리로 차 보낼게.

“나는 언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냐고 물었는데? 오늘 차 놓고 퇴근하면, 나는 내일 아침에도 당신이 배차한 수단으로 출근해야 하잖아. 그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알아? 서로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어.”

일부러 뜻한 것은 아니었지만, 딱딱하고 다소 날카로운 어조가 흘러나왔다.

― 참, 너는.

그가 다소 당황스럽다는 듯이 읊조렸다.

― 알다가도 모르겠다.

별말이 아닌데도 심장이 물결치듯 일렁거렸다.

인애는 소리 나지 않게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대꾸했다.

“뭘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이야?”

― 하루, 하루 너무 다른 사람이라.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그가 기민한 대답을 내놓으며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아무튼, 장소랑 시간 문자로 보내 줘. 알아서 갈 테니까.”

이제 더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도 순순히 동의하며 통화를 마쳤다. 아까부터 파도 위에 오른 듯 일렁거리던 심장이 진정할 줄을 모르고 흔들렸다.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그의 말을 인애는 몇 번이고 곱씹었다.

전부를 다 줄 수 있을 것처럼 사랑을 논했다가, 차갑고 건조하게 선을 긋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일까? 의도치 않은 간극이 그의 흥미를 조금이라도 북돋웠을까.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감정을 바삐 조절해야 할까.

생각은 망상이 되고, 망상은 집착이 되고, 집착은 끝내 처절한 후회가 되지는 않을까.

결국 나중에 후회하는 쪽은 누구일까, 사랑을 고백한 어리석은 아내일까,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무정한 남편일까?

태어나서 이토록 깊은 상념에 오래도록 빠져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은 때론, 너무 깊은 고뇌에 빠뜨려서 현실 감각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만큼 빠른 속도로 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 사전 미팅은 부부로서 처음 공식 석상에 나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허망한 거짓 연기인 줄 알면서도, 그의 남편 연기가 기대돼서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

그가 파티 장소라고 알려 준 건물은 경희궁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퇴근 시간대의 서울 도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막혔고, 인애는 예정된 시간보다 20분쯤 늦게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인애의 차가 멈춰 서자, 턱시도를 차려입은 모델 같은 남자가 다가와 운전석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주차는 제가 하겠습니다. 대표님께서는 미술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애가 아는 한 이곳에 미술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설 자동차에서 설립할 재단에서 일해 줬으면 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어렴풋이 짐작해 보건대, 이곳은 아마도 이설 자동차 소속 재단에서 운영하게 될 미술관인가 보다.

발레파킹을 도와줄 남자에게 묵례한 인애는 미술관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은 그 정교한 세공에서부터 사람을 압도했다. 계단 양옆에는 헬레니즘 양식을 빌린 천사 조각상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마치 밀로의 비너스가 허리에 두르고 있는 천처럼 정교하고 풍성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천사의 옷자락은 인애의 시선을 끌 만했다.

“마음에 들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계단참에 올라섰을 때였다. 시선을 돌리자 턱시도를 입은 모델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까 그 발레파킹 기사와 다른 게 있다면, 이 남자는 아무 관심 없는 타인이 아닌 심장을 뒤흔드는 남편이라는 거다.

“멋지네. 누가 보면 루브르에 있는 밀로의 조각상을 천사로 둔갑시킨 줄 알겠어.”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의도한 바를 정확히 인식했다는 표정이다.

“그럼 들어가지.”

인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주 출입구를 지나 전시관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들어가는 로비는 낮이면 채광을 충분히 받아 비싼 대리석 마블링의 결을 살아 있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 많이 들였겠네.”

인애는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고는 대꾸했다.

“파티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여 줄 곳이 있어.”

그는 메인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1층으로 향하지 않고 로비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파티장 안에서 퍼져 나오는 미디엄 템포의 팝 음악이 가슴을 둥둥 울렸다.

“어딜 가는데?”

왠지 불길한 예감이 앞섰다. 그가 집무실 같은 공간을 소개해 주며 앞으로 여기서 일하라고 말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어떤 말로 이 어마어마한 일을 거절하고, 소신껏 커리어를 지켜 나가야 할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인애는 불안한 호기심을 숨기고 그의 뒤를 따랐다.

2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컴컴한 어둠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잠시만.”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그는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창이란 창은 모조리 막아 놓은 듯 답답하고 퀴퀴한 공기가 느껴졌고, 적응되지 않는 어둠이 약간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뭐 하는 거야?”

크게 목소리를 내자,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짐작건대 전시실의 규모가 1층 전부를 합쳐 놓은 만큼 큰 것 같았다.

“잠시만, 불 좀 켜고.”

반대편 멀리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도 메아리처럼 왕왕 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눈앞이 밝아졌다.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탓에 인애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뭐.”

그가 곁으로 다가오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시야를 가다듬자,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거대한 전시물 쪽으로 향했다.

흉물스럽게 녹이 슨 쇳덩이들이 연구대로 보이는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공간을 빙 두른 연구대의 한가운데 뼈대만 남은 구조물이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묻는 순간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한가운데 놓인 뼈대는 자동차의 프레임이었다.

“1950년에 이설 자동차에서 처음 만들었던 자동차야. 안타깝게도 시험 운전도 하지 못하고 창고에 처박혔지만.”

그가 아득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녹슨 쇳덩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지금 복원하는 중이야. 복원이 완료되면 미술관 마당에 있는 유리 전시실 가운데 놓일 거고, 미술관의 상징이 될 거야.”

그가 자신의 일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게 설명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하긴 부부라고는 하지만 서로의 생각이나, 관심사, 직업적 사명감 같은 것을 논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애를 좀 먹고 있는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요.”

그는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대꾸했다.

“아니, 여기서 일해 달라는 게 아니라. 미술 복원 전문가를 섭외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혹시 도와줄 수 있어? 자동차를 복원하는 일도 오래된 작품을 복원하는 일과 같아. 여러 곳에 연락해 봤는데, 이런 복원은 처음이라 할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어.”

돈으로 움직이는 시장이라지만,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일에는 꿈쩍도 안 하는 법이다. 실험적인 일에 쉽사리 나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이쪽 일은 나보다 더 전문가잖아.”

“이러다 복원 작업 자체가 내 일이 되면? 나도 갤러리스트일 뿐이지, 복원 작업을 지휘해 본 적은 없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방어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우리 어머니가 하시던 작업이었어.”

그의 목소리에 어려 있던 그리움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당신이 마무리해 줬으면 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간절한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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