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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먼저 25화 (25/68)

결혼 먼저 25화

어떻게 대답을 해야 이 남자가 더 당황해서 재미있는 표정을 보여 줄까?

어떻게 대답을 해야 이 남자가 마음을 닫으며 물러서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올까?

휘욱을 당황하게 할 대답을 내놓고 존재를 분명히 할 것인지, 그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대답을 내놓고 아양을 떨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둘 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인애는 그의 기분을 재지 않고, 솔직해지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사랑 없는 섹스……. 나도 싫어.”

그가 방어 기제를 발동하면 물러서곤 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휘욱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인애를 내려다보았다. 인애는 포근한 이불을 허리께까지 올려 덮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실크 슬립을 입은 탓에 앙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지만, 그의 곧은 시선은 인애의 눈동자를 벗어나지 않았다.

저런 남자가 내연녀를 두고 결혼을 했다고?

결혼했는데도, 내연녀를 끼고돈다고?

올곧은 눈빛으로 사랑 없는 섹스는 부당한 짓이라고 말하는 듯한 남자가?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 섹스할 생각 없어.”

인애는 그의 곧은 시선을 받아 내며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눈동자가 동요를 일으켜 일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닌 것 같다.

기 싸움 같은 강렬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 섹스할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인애는 그와의 섹스를 언급했고, 결론적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 거나 다름없었다.

휘욱이 인애의 말에 담긴 속뜻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그래서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이.

세상에 대꾸 없이 무시하는 것만큼 상대의 뜻을 쉽게 뭉개 버리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인애가 덮고 있는 이불을 들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 등을 돌리고 모로 누운 그의 뒤통수를 인애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쏘아본다고 내 뒤통수가 뚫리겠어? 아니꼬우면 그냥 한 대 치든가.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거, 화나지 않아?”

그가 너는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격해진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인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대꾸 없이 무시하는 것만큼 상대의 속을 쉽게 끓어오르게 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휘욱이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고심해서 세운 작전이 통하지 않아 낭패감이 어린 지략가의 눈빛 같기도 했고, 아직은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소년의 눈빛 같기도 했고, 세상을 전부 알아 버려서 지친 어른의 눈빛이기도 했다.

인애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고운 미소를 머금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성숙한 어른의 목소리가 청명하고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그와 벌인 대거리는 가벼운 장난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니 당신도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고 가벼이 넘기라는 것처럼.

그렇게 인애는 그에게 감정적 면죄부를 건네주듯이 잠자리 인사를 건넸다. 충격을 받은 듯 감정을 쏟아 낸 그가 혼란을 겪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사랑이 뭐라고, 아내의 고백이 이토록 버거운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보통의 경우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이 남자의 혼란조차도 안쓰럽다 느끼는 나는 또 얼마나 미련한 외사랑에 빠진 것인지.

인애가 전형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무감한 근육의 움직임이었다. 순간 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 담겨 있던 생각이 중력을 이기고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는 돌연 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일인가 보다. 그를 향한 집념과 고민이 인애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인애는 잠을 청하려 먼저 눈을 감았다. 그가 곁에서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천과 천이 닿아 스치는 소리가 야릇하게 들려왔다.

*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다가도 인애가 등장하면 뚝 멈추었다. 요즘 갤러리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인애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유치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조 과장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뒤에서 수군거렸다. 앞에서 대놓고 시비를 거는 조 과장은 양반이라고 해야 하나. 인애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갤러리를 그만둔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고 했다.

정작 인애 본인은 아직 거취를 정하지 않았음에도, 뜬소문은 여러 가지 카테고리로 정형화되어 그럴싸한 사실인 것처럼 퍼져 나갔다.

“과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헛소문이니까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웃으며 인애를 위로하려 애쓰는 착한 김 대리였지만, 요즘 김 대리를 두고도 괴소문이 돌아서 마음고생을 하는 눈치였다.

“김 대리.”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도 오늘도 역시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오는 김 대리를 인애가 나직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불렀다.

“네, 과장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김 대리는 잔뜩 긴장한 듯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인애를 바라보았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인애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과 귀를 열고 있는 이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사무실에서 나눌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회의실로 들어서자 김 대리가 어두운 낯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김 대리의 눈동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염려가 묻어났다. 인애는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일단 이야기를 하자고 불러내기는 했지만, 자신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고 있는 직원에게 섣불리 말을 했다가는 상처를 입히게 될까 봐 두려웠다. 고심하며 말을 고르고 있는데, 김 대리가 먼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과장님, 혹시 갤러리 그만두세요?”

어쩐지 목소리가 젖은 것처럼 느껴져서 눈을 맞췄더니, 아니나 다를까 김 대리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니. 내가 왜?”

“자꾸 다른 직원들이 과장님 그만두신다고 해서요. 진짜 그만두시는 줄 알고……. 아, 다행이다.”

김 대리는 그제야 긴장한 얼굴을 풀며 특유의 귀염성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있잖아, 김 대리.”

“네, 과장님. 말씀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대꾸하는 김 대리를 마주하자, 인애도 어쩔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 때문에 괜한 욕 먹지 말고, 좀 거리를 두는 게 어떨까? 커피도 이제 그만 사 오고.”

김 대리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혼낸 게 아닌데, 혼난 것 같은 얼굴이다.

“김 대리 언짢아지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애가 잠시 머뭇거리자, 김 대리가 얼른 말을 받았다.

“과장님, 저 처음 갤러리 출근한 날부터 첫 월급 받는 날까지 한 달 동안 과장님이 밥 사 주신 거 기억하세요? 저 학자금 대출 다 갚고, 월세 보증금 마련해서 갤러리 근처에 방 얻을 때까지 출퇴근길에 차로 태워 주신 거는요? 기억하시는 거죠?”

김 대리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기억하지.”

“저 과장님 덕에 돈 아껴야 할 때 아낄 수 있었고요. 몸이 고생해야 할 때, 편하게 다녔어요. 지금도 제가 저지른 일은 다 과장님이 수습해 주시잖아요. 제가 갤러리스트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알려 주신 것도 과장님이셨고요.”

김 대리는 울컥하는지 입술을 꾹 한 번 다물었다가 재빨리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솔직히 갤러리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심미안은 없는 사람이었어요. 이 일이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들었는데, 운이 좋게도 정말 멋진 과장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없던 심미안도 이제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어떤 게 아름다운 건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과장님 덕분에요.”

“낯간지러워서 못 듣겠다.”

인애가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김 대리가 막아섰다.

“갤러리스트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삶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알려 주신 과장님께 감사하면서 살 거예요. 사소한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은 우울할 일도, 고독할 일도 없을 거고. 스스로 삶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일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셨죠?”

에둘러 말하는 듯했지만, 김 대리의 내면 깊숙이 들어 있는 아픈 과거를 고백하는 것 같아서 말을 멈추게 하기가 어려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햇살이 비추는 곳마다 생생히 살아나는 색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나면, 하루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던 거 기억나세요? 저는……. 그래서 살았어요.”

기회가 되었으니 다 털어놓을 작정인가 보다.

“제 생명의 은인 같은 분한테, 커피 한잔 사 드리는 것도 안 되는 일인가요?”

김 대리의 진심을 저버리는 것은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처럼 느껴졌다. 인애는 너무 쉽게 긍정하거나, 부정하면 어렵사리 내뱉은 진심을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보일까 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근데 지금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제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저 사람들이 무슨 헛소리를 하든 저는 상관없는데요? 과장님은요?”

급기야 씩씩거리기 시작한 김 대리를 달래려 인애가 상냥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짧게 대꾸했다.

“나도.”

“물론 월급 주시는 관장님은 빼고요.”

김 대리의 솔직하고도 유쾌한 발언에 인애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많이 컸네, 우리 김 대리.”

“키워 주셨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죠. 컸다고 밀어내시는 거 아니에요.”

입술을 샐쭉 내밀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김 대리를 나무라려는데 휴대전화가 보란 듯이 울렸다. 발신인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화할 일이 없는 남편이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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