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23화
부릅뜬 눈이 애처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인애는 질문을 마저 던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그는 채근하는 투로 물었지만, 질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본인에게 곤란한 질문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한 얼굴이다.
“아니야. 그냥.”
인애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들며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대거리가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예상 밖의 대응이라는 듯 그는 아주 약간은 당황한 눈치였다.
마치 고도의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고지를 점령하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새벽녘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꼭대기에 깃발을 꽂는 이는 자신이 될 거라고 인애는 생각했다.
새털처럼 부드러웠던 손길, 그 손길의 주인이 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약하게나마 그도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를 지켜본 결과 그는 기분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성장 환경에 비추어 보건대, 그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고 죽이는 데 더 익숙할 것이다. 사사로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사람이 느끼는 생경함을 콕 집어내서 지적하면 역효과가 날 게 분명했다.
당신도 나에게 끌리지 않았느냐고, 그래서 내 뺨을 어루만진 것 아니냐고.
이렇게 물었다가는 그는 철벽을 치며 물러날 게 뻔했다.
기다려야 했다. 그가 온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아니면 스스로 폭발할 때까지.
그리고 그의 손길이 맞는지, 아닌지는 곧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고 자연스럽게 같은 방을 쓰게 되면,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이다.
협소한 공간에 함께 있어도 서로를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게 인간관계라지만, 무언가 싹트기 시작한 남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의 마음을 아직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봐 온 동생 같은 사람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르고, 그로 인한 미안함의 일부일 수도 있다. 어릴 적 그는 올곧은 성정과 정의로운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외양이 차가워졌다고 한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했던 그의 뜨거운 가슴만큼은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질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인애에게 미안함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게 남녀 간의 호감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갖는 연민 내지는 동정이라고 치더라도 그가 무미건조한 상태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신경이 쓰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이렇게 된 이상 그의 마음이 두 사람의 관계에 발전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이끌어야만 했다.
그가 아내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
옅은 감정에 젖어 드는 것조차 오랜 시간이 걸리는 그를 인애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출근 안 해?”
식사를 마친 인애는 소파에 앉아서 랩톱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로 화면을 응시하다가 이내 표정을 풀며 인애를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이 붉은 노을로 물드는 찰나 같은 눈길.
“퇴원하는 거 보고 갈 거야.”
미묘한 그의 표정 변화는 인애에게 놀라운 몰입감을 안겨 주었다. 이내 그가 랩톱 화면으로 다시 시선을 옮겨 갔음에도 인애는 그의 얼굴을 계속해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풀어졌던 그의 미간이 다시금 좁아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 듯했다.
“일이 잘 안 풀리나 봐?”
방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좀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그리 대답한 그가 인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일이 안 풀리는지는 어떻게 알고 물어봐? 설마 내 일이 안 풀리길 바라는 건가?”
그는 자신이 질문을 내뱉어 놓고도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나한테 사사건건 날 세우려고 노력하면, 안 피곤해?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볼 때 짓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물어본 거야.”
인애의 대답에 그는 건조한 얼굴로 변해 갔다. 이제 알겠다. 저런 건조한 표정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한 그의 방어 기제라는 것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인애는 한숨 쉬듯 읊조렸다.
“의사 한 번 보고 바로 퇴원 절차 밟을 거야. 조금만 참아. 본가로 데려다줄까?”
그는 인애를 배려하여 말한 듯했지만, 인애로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늘부터 남편 품에 안겨서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친정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나?”
휘욱은 이제 포기했다는 듯이 얼굴조차 구기지 않았다. 더는 대거리를 할 의지조차 없는 것처럼 무감하게 업무에 집중한 그를 바라보며 인애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러서지 말고, 부지런히 다가가자고.
지금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쪽을 바라볼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 보자고.
한번 결심한 일에서 물러서 본 적은 없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된 마당에 물러설 이유도 없다. 사랑에 사로잡힌 인애의 입가에는 호기로운 미소가 오래도록 머물렀다.
*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나 뜻하지 않게 회사를 비운 탓인지, 휘욱은 늦은 밤이 되어서 집에 들어왔다. 퇴근하는 그를 인애는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하고 다정하게 맞았다.
“왔어? 피곤하지? 저녁은?”
그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묻자, 그가 왜 그런 가식적인 말투를 쓰는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인애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먹었어.”
짧게 대답한 휘욱이 인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인애는 부엌 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더 진하게 웃었다. 때마침 부엌에서 나온 아주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다녀오셨어요, 사장님. 내일부터는 퇴근 시간 미리 알려 주시면, 저녁 준비와 다과 준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한테 전화 줘. 아주머니께 전해 드리는 건 어려운 일 아니니까.”
그는 지금 본의 아니게 인애에게 퇴근 보고까지 하게 된 것이 마뜩잖은 눈치였지만,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알겠다는 대답을 순순히 내놓아서 오히려 인애는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병원에서 잤더니, 좀 피곤하네요. 일찍 잘 겁니다.”
그가 이제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말하자, 아주머니는 눈치껏 묵례를 하고는 물러났다. 곧장 침실로 들어가는 그를 인애는 달가운 마음으로 뒤따랐다.
“샤워부터?”
인애는 침실에 딸린 욕실 문 앞을 지나쳐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그를 향해 물었다.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인애는 그가 슈트 재킷을 벗어서 옷걸이에 거는 동안, 서랍에서 그의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옷장 문을 닫은 휘욱은 해사한 미소를 얼굴에 걸고 그의 속옷과 파자마를 들고 있는 인애를 노려보듯 했다. 그러고는 서랍 쪽으로 손을 뻗었다.
“유치하게 내가 꺼내 준 옷은 싫다. 다른 옷 꺼내 입을 거다. 이런 거?”
밝게 웃으며 물었는데도, 그는 묵직한 시선으로 인애를 바라보기만 했다.
“있잖아, 휘욱 씨. 우리 괜한 거로 힘 빼고 그러지 말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낫지 않아? 일일이 싸우는 것보다는 그게 편하지. 안 그래?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해코지하려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내 남편 챙기려고 이러는 거지.”
인애는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를 그를 향해 내밀었다. 그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인애가 내민 옷을 받아 들었다.
“괜한 거로 힘 빼는 일은 너도 하지 마. 이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이미 많이 달라졌는데?”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인애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쓰러졌을 때,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줬잖아. 그건…… 내가 앞으로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줘야 한다는 의미 아니야?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당신이 힘든 일을 겪게 되면, 내가 무조건 함께 있어 줄 거거든.”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누가 때린 것도 아닌데 마치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위로를 바라는 표정이기도 했다.
휘욱은 여태껏 자신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의 부모가 죽은 뒤, 세상에게서 처절하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퍽퍽하고 건조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제 내가 당신 편이 되어 줄게.”
인애가 쐐기를 박듯 던진 말에 그는 또다시 무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방어 기제가 발동되면, 그만해야 한다는 것을 인애는 이미 깨우쳤다.
“난 그럼 서재에서 책 좀 보다 올게요.”
두 걸음쯤 움직였을 때, 팔뚝에서 뜨거운 악력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팔뚝을 부드럽게 움켜잡고 있었다.
“그만 포기해.”
그가 한숨을 내뱉듯 읊조렸다.
“네가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아, 이 바닥에서 제일 먼저 깨우쳐야 하는 단어가 포기라고 했지? 그럼, 휘욱 씨는 포기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거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떡하지? 나는 평생을 살아도 포기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할 것 같은데. 휘욱 씨는 그걸 잘 아니까, 나한테 말한 거지?”
이번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눈빛이었다. 인애는 진중한 마음을 담아 힘주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잘 아는 사람이 하는 편이 더 편리하겠네. 휘욱 씨가 포기해 줘. 나는 이 결혼 잘해 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