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22화
통화를 마친 그는 물을 한 잔 따라서 인애에게 권했다. 인애는 그가 내미는 유리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딱딱한 얼굴, 퉁명스러운 말투,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그는 인애를 보살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고마워요.”
인애는 그가 건넨 유리잔에 든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텁텁했던 입 안이 씻기고 목구멍을 타고 맑은 물이 흘러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일단 좀 더 자.”
그가 빈 유리잔을 받아 들고는 소파 세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흰색 드레스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뒷모습은 그답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다. 드레스 셔츠를 팔뚝 중간까지 걷어 올리고, 넥타이를 하지 않은 모습은 또 처음 봐서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소파 가운데에 걸터앉은 그가 테이블 위에 유리잔을 내려놓고는 태블릿 PC를 집어 들었다.
“안 가요?”
아까 비서실장과 통화했던 내용을 돌이켜 보면 그는 오늘 이곳에 머물 생각인 듯했다. 다 알면서도 인애는 확인 사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물어보았다.
그의 입에서 이곳에 머물겠다는 말이 나오는 걸 직접 듣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왕이면 왜 머무를 생각인지도 자세히 말해 줬으면 좋겠다.
“안 가.”
그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당연한 것을 귀찮게 왜 묻느냐는 듯한 어조였다.
“왜요?”
태블릿 PC 화면을 향해 있던 그의 건조한 시선이 마침내 인애에게로 옮겨 왔다. 그는 대꾸 없이 인애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눈에는 무심함을 가장한 옅은 속내가 스며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입 안이 또다시 버석하게 말라 버렸다.
내가 걱정돼요?
묻고 싶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인애는 마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가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시선이 깊어지며 연한 감정은 사라지고 가슴이 아릴 정도로 단단한 무심함이 자리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내가 쓰러졌어. 그런데 남편이 그 자릴 안 지키면 어떤 소문이 돌 것 같아?”
그는 애먼 소문이 나는 것이 저어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애처가라고 소문이라도 났으면 해서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나쁠 거 없지.”
병원에 남은 것은 두 사람의 관계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대외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말을 하는 그가 야속하고 얄미워서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인애는 대꾸 없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을 덮고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인애는 이불을 걷어차며 도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애먼 소문 나면 막으면 되잖아?”
그가 시선을 툭 던지듯 인애를 바라보았다.
“그런 수고로운 일 안 하려고, 결혼한 건데?”
“결혼해서, 쓰러진 부인 병실에 와 있는 건 안 수고롭고?”
비꼬듯 되묻자 그의 얼굴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적당히 해.”
인애는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뭐라고 덧붙여서 자극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넌 꼭 네 기분 나쁠 때, 반말하더라?”
황당하다는 듯이 묻는 휘욱의 어조에 장난기가 묻어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언젠가부터 그에게는 꼬박꼬박 높임말을 써 왔었다. 그런데 화가 날 때는 혼자 높임말을 쓰는 게 억울했는지 반말이 잘도 튀어나왔다.
“그럼 앞으로 기분이 좋을 때나, 엿같을 때나 똑같이 반말할게.”
인애가 호기롭게 대꾸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미는가 싶더니, 재미있다는 듯이 반짝이는 눈빛이 인애를 향했다.
“왜, 뭐?”
괜히 찔려서 되물음이 툭 튀어나왔다.
“좋을 대로 해.”
찰나의 순간 그의 얼굴에 근사한 미소가 걸렸다. 불과 2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미혹되기엔 충분했다. 갑자기 그가 지금은 무엇을 요구해도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 마시고 싶어.”
그런데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이것이었다. 보일 듯 말 듯 하면서 사람의 혼을 빼놓는 그의 미약한 감정 때문에 기갈이 난 탓도 있었다.
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리잔에 물을 가득 따라 주었다. 인애는 오랜 시간 굶주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또?”
물을 또 마시고 싶으냐는 물음인 것 같아서 인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또 뭐 필요한 거 있냐고.”
이어진 그의 말에 심장이 갑자기 크게 울렸다. 인애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든 말하면 다 들어줄 거냐는 듯이 쳐다보자, 그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병원에서 같이 자는 건, 안 되는 거 알지?”
그는 자신이 내뱉어 놓고 아차 싶었는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의 목덜미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불긋해 보였다.
“내가 병실에서 자자고 할 사람처럼 보여?”
인애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어, 충분히 그래 보여.”
“의외네.”
“뭐가?”
“나를 되게 잘 알아. 어, 나 병원이지만 당신이랑 자고 싶어.”
낭만을 품은 사람처럼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셔츠를 걷어 올린 그의 팔뚝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게 자극해도 소용없는 일인 거 알잖아?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쉬어. 그래 봤자 본인만 힘들어. 정 실장한테 짐 받으러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병실에 얌전히 있어.”
인애는 병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쏘아붙였다.
“같이 자는 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먼저 자극한 게 누군데?”
그의 대꾸 대신 병실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사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만약 깨어났을 때, 아무도 없이 병실에 혼자 누워 있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외로움을 쉽게 느끼는 성격은 아니지만, 몸이 약해졌을 때의 감상은 다르다. 무미건조한 병실에서 홀로 나약한 생각을 하며 땅굴을 팠을지도 모른다.
애먼 소문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병실을 지켜 준 그가 고마웠다. 그리고 남편을 짝사랑하는 처지에서 생각해 봤을 때, 처절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타인의 이목이 쏠리는 것이 두려워서,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병실에 남았을까?
심장이 또다시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속에 품은 사람이 버겁다는 듯한 움직임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인애는 문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새까맣게 물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밝은지 주변에 무지개색 달무리가 져 있었다. 그가 보여 주는 미소는 보름달이 뜨는 밤에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달무리처럼 아름다웠다.
달무리를 오래도록 바라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지? 달무리를 닮은 그의 미소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소원이 이루어질까.
달빛이 스민 상상 속의 세상은 요원하기만 했다.
뺨을 스치는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꿈을 꾸고 있는 거란 착각이 들었다. 누군가 새털같이 가벼운 손짓으로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병실에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왔나.
혹시 엄마가 오신 건가.
눈을 뜨고 싶었지만 뜰 수가 없었다. 가볍게 닿아 있던 손길이 아스라이 사라졌다. 인애는 약 기운에 취해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 식사가 놓인 테이블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나서 뭣 좀 먹어.”
그는 침대 위에서 뒤척이고 있는 인애를 한 번 흘끗 보고는 읊조렸다.
“어제 혹시 엄마 다녀가셨어?”
“장모님?”
인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안 다녀가셨어. 어제 잠깐 통화만 했어.”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사위 된 도리는 다하고 있었나 보다.
“장모님은 어제 부산에 내려가 계시더라고. 오늘 아침에나 올라올 수 있다고 하셨고, 장인어른도 같이 부산에 계신다고 하셨어.”
엄마가 관장으로 있는 갤러리에서 부산에 기획 전시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잠깐이라도 올라오셔서 얼굴 보고 가시겠다는 걸, 안심시켜 드렸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는 식사용 테이블을 끌어다 환우용 침대를 가로지르도록 놓아 주었다. 수저까지 손에 쥐여 주는 친절이 어색했다.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어?”
인애가 무심코 던진 말에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오늘부터 집에 아주머니가 한 분 오실 거야.”
“아주머니?”
의미를 알 수 없는 호칭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당신 쓰러졌다고 하니까, 본가에서 사람을 보냈어. 진작 보내겠다고 하는 걸 내 선에서 막았는데, 이번에는 나도 막을 재간이 없었어. 손님방 내어 줘야 할 거야.”
그는 다소 미안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아, 집안일을 도와주겠다는 건 핑계고, 우릴 감시하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
인애의 질문에 그는 맞게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내어 줘야 할 손님방은 그가 침실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이제 각방 쓰는 건 때려치워야겠다, 그치?”
호기로운 어조로 말하며 공깃밥 뚜껑을 열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밥이나 먹어.”
오늘따라 밥 냄새가 평소보다 더욱 구수하게 느껴졌다. 밥 한술을 떠서 입 안에 넣는데, 문득 지난밤에 뺨을 어루만진 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있잖아. 나 잘 때 간호사나 의사 다녀갔어?”
“체온 재러 두어 번 왔었어.”
그는 간호사가 두어 번 다녀가는 와중에도 깨어 있었나 보다. 하지만 지난밤 부드러웠던 손길의 정체가 간호사는 아니지 싶었다.
간호사가 그렇게 애틋한 감정을 담아서 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은 이상한 일 아닌가.
“있잖아, 어제 혹시.”
지나치게 방어적인 그의 시선이 인애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