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21화
또다시 직원들의 시선이 인애에게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인애는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정적일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걸 노린 거였구나.
이제야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생각에 인애는 가슴속이 갑갑해지는 것만 같았다. 조 과장과의 승강이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조 과장이 인애에게만 까탈스럽게 구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동안에는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다.
다만 오늘과 같은 인신공격성 발언은 처음이었다. 대꾸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침묵은 때론 수긍으로 오해받곤 한다.
그렇다면 부드럽게 대했어야 했던 걸까. 아마 그랬다면 인애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 약하게 나오는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인애가 오해를 살 만한 상황. 승강이가 무마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뒷말이 나올 게 뻔했다. 그리고 좁은 미술 시장 바닥에서 그 소문이 어떻게 퍼져 나갈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소문에 흔들릴 만큼 나약하지는 않았지만, 평판은 중요했다. 그동안 쌓아 온 커리어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게 평판이었다. 인애는 이 모든 오해의 주동자가 앉아 있는 방으로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그는 잘생긴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상한 목소리를 냈다. 하마터면 그의 이중성에 혀를 내두를 뻔했다.
인애 역시 얼른 얼굴을 달리하며 미소를 드리웠다.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듯 그의 검은 눈빛이 호기롭게 빛났다. 그가 공격적으로 눈빛을 빛내는 모습이 지나치게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저 남자는 모르지 싶다.
그러니 마음에 없는 아내에게도 저런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지.
“어떻게 된 거예요?”
미리 말해 주면 좋았을 거라는 듯이 그를 부드럽게 나무랐다.
“일단 앉아, 윤 과장. 아니, 나는 우리 윤 과장이 그런 줄도 모르고. 나 참 서운해. 어떻게 결혼식에도 안 부를 수가 있어?”
관장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결혼식을 비공개로 진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인애가 휘욱의 옆에 앉는 사이 그가 말을 받아쳤다. 관장은 겸연쩍다는 듯이 웃으며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문을 닫고 있던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무슨 말을 전했는지 모르지만, 관장은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관장의 좁은 이마가 땀으로 흥건해져 앞 머리카락 몇 가닥이 안쓰럽게 달라붙어 있을 정도였다.
“모쪼록 제 아내 잘 부탁드립니다. 이 사람이 갤러리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아시죠?”
헛웃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인애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가 인애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한 지 열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뻔뻔하게 갤러리에 대한 인애의 애정을 두둔하고 있었다.
“알다마다요. 윤 과장은 저희 갤러리 보물입니다.”
“이제 저한테도 귀한 보물이거든요.”
그가 손을 뻗어 인애의 손을 꼭 움켜잡으며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를 냈다. 그의 목소리에 깜빡 속은 심장이 가쁘게 뛰어 댔다. 귓속에서 심장이 구르고 있는 것처럼 심박동 소리가 울려 댔다.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처럼 굴 필요는 없잖아, 잔인하게.
인애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아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따뜻한 그의 손길, 소유권을 주장하듯 꽉 움켜쥔 악력, 연인을 대하듯 애정이 가득한 눈빛,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
이 모든 게 연기인 줄 알면서도 심장이 애처롭게 반응했다. 가슴 근육이 뒤틀리는 것만 같아서 숨을 내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순간에 그가 보이는 말과 행동에 완전히 말려 버렸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데도, 그새 나는 이 남자가 좋아진 건가.
감정에 대한 깨달음은 거창한 순간에 찾아오지 않는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사랑인 법이다. ‘나는 앞으로 이 사람을 죽도록 사랑하겠어!’라고 마음 먼저 다지고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없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불확실성 안에서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다는 데 안도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
이토록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그에 대한 마음만은 분명한 것을 보면 의심할 여지 없는 순수한 감정이었다. 기쁨, 슬픔, 노여움, 분노 그리고 사랑. 수많은 감정 중에 사랑만큼이나 복잡하면서도 순수한 감정이 있을까?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도록 복잡한 게 사랑이면서도, 애정의 대상을 향한 방향성만큼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 사랑이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인애에게는 복잡한 감정과 지고지순한 방향성, 그게 사랑이었다.
그동안 그에게 쏠리는 관심을 그저 잘난 피사체에 대한 욕망의 일종으로 치환해 왔었다.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부 사이의 당연한 요구라고만 여겼었다.
어쩌면 스스로 그렇게 설득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남자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는 거였구나. 첫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물밑에서 깊이 일렁이고 있었나 보다.
심장이 빠르고 무겁게 뛰어 댔다. 입 안에 심장을 물고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그와 입술이 닿았을 때 느꼈던 깊은 안도와 안정감, 그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는 것을 하필 지금 깨닫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그와 입술을 뒤섞었을지언정, 따뜻하고 다정하게 손을 붙잡았던 기억은 없었다.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인애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갔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면, 무감해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어디 불편해?”
그가 인애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제 파리에서 돌아와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데다가 밤을 꼴딱 지새우고 출근했다. 출근하자마자 그가 갤러리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조 과장과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평소의 인애라면 무던히 견뎌 냈을 스케줄이다. 그런데 꼭꼭 숨겨 두었던 첫사랑의 지독함을 깨닫고 나니 피로감이 온몸을 지배할 듯 밀려드는 기분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인애를 힘겹게 만들고 있었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인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꾸하며 그에게 꼭 움켜잡힌 손을 빼내려 손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그의 굵직한 손가락 사이에 인애의 연한 손가락이 갇혀 버렸다.
손깍지를 낀 그는 다른 손으로 인애의 손등을 감싸며 되물었다.
“오늘은 조퇴하는 게 어때?”
휘욱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고, 관장은 펄쩍 뛰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윤 과장, 안색이 말이 아니야. 들어가, 응? 그런 얼굴로 사무실에 있으면 다들 불편해해. 나 아픈 사람 부려 먹고 그러는 인색한 사람은 아닌 거 알잖아, 응?”
관장은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야단법석이었다. 급기야 말릴 틈도 없이 관장이 김 대리를 호출했고, 오늘까지만 수고해 달라는 당부가 이어졌다.
결국, 휘욱과 나란히 갤러리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 출입구를 빠져나오자,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 만큼 컨디션이 엉망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사랑을 자각한 후에 찾아온 허탈감과 뜻 모를 패배감에 기분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날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인애의 건조한 음성은 낮게 쉬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주 쉬운 싸움에서 이겼다는 듯이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걸 증명하고?”
언제든 그만두게 만들 수 있다는 위력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봐. 갤러리에서 계속 일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얼마나 불편해할지. 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는 인애의 상태를 살피듯 얼굴을 한 번 훑고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당신한테 어울리는 자리는 따로 있는 거 알잖아.”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콤한 온기가 목덜미를 스치자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나는 분명히 말했어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등가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뒷말을 제대로 내뱉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까무룩 눈이 뒤집히는 게 느껴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카메라가 움직이는 장면을 본 적 있다. 뿌옇던 사위가 눈을 깜빡거리자 이내 선명해지는 장면들. 감독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똑같은 미장센을 취하는지, 그러한 장면들을 볼 때마다 진부하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연출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갔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뿌옇게 물들었던 눈앞이 점차로 선명해졌다.
“정신이 들어?”
환청처럼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목구멍은 타들어 가는 듯했다.
“지금 몇 시예요?”
그가 손목에 있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대꾸했다.
“저녁 8시.”
어쩐지 창밖이 어두웠다. 무거운 팔을 들어 올렸더니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고, 서울 이설 병원이라는 글씨가 줄줄이 이어진 하늘색 무늬의 병원복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상체를 일으키자 눈앞이 다시 새까맣게 물들었다.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
“어떻게 된 거예요?”
인애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중얼거렸다.
“갤러리 앞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왔어. 단순 과로래.”
“그럼 이제 집에 가도 되겠네.”
아직 그와 사는 신혼집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편할 것 같았다.
“퇴원은 내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가 다소 엄정한 눈빛으로 인애를 내려다보면서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어, 정 실장. 긴급 출장 대비용 캐리어랑 내 랩톱 좀 이설 병원으로 가져다줘.”
인애가 의문 어린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