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20화
“지금 뭐라고 했어?”
인애의 물음에 겸연쩍어하는 김 대리의 시선이 굳게 닫혀 있는 관장실 문으로 향했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길게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직원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관장은 평소 관장실 문을 열어 놓고 지냈고, 귀빈이 방문했을 때만 문을 닫았다. 그러니 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것은 관장이 지금 귀빈을 만나고 있다는 의미였다.
김 대리는 묵묵부답이었다. 인애는 답답하게 닫혀 있는 문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김 대리를 닦달하지는 않았다.
“사진보다 훨씬 잘생기셨더라고요.”
인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김 대리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인애는 황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김 대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김 대리는 니치 향수가 들어 있는 종이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일단 입을 떼기는 했지만,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3주간의 휴가를 다녀온 사수가 그사이 비밀리에 결혼하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것으로도 모자라, 상대가 굵직한 재벌가의 자제인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난감한 건 인애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매듭을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매듭 끝부터 찾아서 간단한 엉킴부터 끌러 내야 한다.
인애는 김 대리가 언급한 인물에 관한 질문부터 던졌다.
“누가?”
사실 확인 사살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저 방 안에 관장과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방식으로 갤러리에 들어와 직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것인지 궁금했다.
“이설 자동차 최휘욱 대표님이요.”
김 대리는 마치 친구의 잘못을 일러바치는 초등학생이 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애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천천히 새어 나왔다.
“사정이 있어서 미리 말 못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과장님께서 갤러리에는 알려야 할 것 같다며 곤란해하셔서 직접 왔다고 하셨어요. 뉴스 같은 데서 볼 때는 되게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엄청 자상하신가 봐요.”
이제 초등학생은 중학생 소녀로 자라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갤러리 차 낡았는데, 못 바꾸고 있었잖아요. 무진동 차량 지원해 주겠다고 하셨대요. 직원들 쓸 수 있게 캠핑카 무상 렌털 서비스도 해 주시고, 직원들 외근 나갈 때 쓰라고 최신형 세단도 여러 대 지원해 주신다고. 과장님 알고 계셨어요?”
김 대리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댔지만, 인애는 속이 뒤집히는 듯 울렁거렸다. 쉴 새 없이 떠들다가 인애의 표정을 흘끗 바라본 김 대리가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펴 댔다.
인애의 남편이 몰래 찾아와서 직원들 편의를 봐준 것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댔는데, 사수의 반응이 떨떠름해서 당황한 눈치였다.
“굳이 그러지 말라니까.”
인애는 그저 혼잣말인 듯 떠들었다. 마치 사전에 이야기가 된 것처럼 즉석에서 연기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서 하마터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릴 뻔했다.
인애의 입가에 머무는 미소가 새 신부의 수줍음이라고 생각했는지, 김 대리가 두 손끝으로 입을 가리고는 새된 비명을 질러 댔다.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안 그래도 은근히 인애에게 이목이 쏠려 있던 직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어 댔다.
“어쩜 그렇게 도둑 결혼을 했대?”
인사 총무를 총괄하고 있는 한 팀장의 말에 인애는 그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윤 과장, 이거 내일까지 프랑크푸르트로 보내야 하는 서류야. 검토하고 나한테 줘. 그리고 일은 제대로 할 수 있는 거 맞니? 후임 뽑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한 팀장님 엿 먹이지 말고, 미리미리 말해.”
그리고 평소 인애의 특진을 고깝게 생각했던 조 과장이 시비조로 말을 붙여 왔다.
“프랑크푸르트 건은 조 과장 업무 아닙니까? 그걸 내가 받아서 해야 할 이유가 있나?”
분위기에 편승해 인애를 은근히 깔보려는 조 과장의 수작에 넘어갈 리 없는 인애가 조용히 되물었다. 말 그대로 도둑 결혼을 하고 돌아온 인애에게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고 끈적거리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건조해졌다.
“윤 과장이 갤러리를 비운 3주 동안, 그 일은 누가 다 나눠서 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조 과장이 내 업무를 받아서 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나 파리에서도 업무 처리 다 했거든. 여기서 진행해야 하는 하드 카피 작업만 김 대리가 도왔고.”
인애의 업무 능력에 흠집을 내려는 심산인 듯했지만, 조 과장은 인애를 넘어서려면 멀어도 아직 한참 멀었다. 어설프게 말을 만들어 내고, 거짓 소문을 일궈 내는 게 조 과장의 특기였지만 그게 인애에게까지 통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기가 막혔다.
“아니, 윤 과장 선배 말이 우습니? 너 내가.”
급기야 조 과장이 인애를 두고 막말을 퍼부으려 했다. 건조해졌던 직원들의 이목에 또다시 불이 붙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다르기는 했지만, 일부는 진짜 인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했고, 일부는 조 과장의 비뚤어진 태도를 의심했다.
사람을 평가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 평판이라는 것이 그래서 무섭다. 특히 좁은 업계에서 그런 소문이 한번 굳어지면 독이 될망정 득이 되지는 않는다. 조 과장은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인애에게 예의가 없다고 질책했다.
“너 내가 이 갤러리에 너보다 3년은 먼저 들어왔어. 직급 같다고 막 기어오르네? 작가 몇 명 키웠다고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알아? 그거 순전히 네 능력 맞아? 집안 백으로 거물 컬렉터 구슬려서, 신진 작가 스타 만들기 프로젝트 같은 거 꾸민 거 아냐?”
직원들 앞에서 승강이를 벌일지언정, 조 과장은 인애의 감정을 건드리고 얼토당토않은 말로 커리어를 깎아내리는 짓을 저지르면 안 되는 거였다.
“말 다 했어?”
인애가 나직한 어조로 되물었다. 경고 조였지만, 조 과장은 제 의견을 다 피력하지 못했다는 듯이 열을 내며 떠들어 댔다.
“아니, 다 못 했어. 솔직히 그렇잖아. 어떻게 네가 손대는 작가마다 잘돼? 그 작가들 그림 비싼 값에 사 간 컬렉터들 너희 집안사람 아니라는 증거 있어? 집안 재단에서 활동하는 건 싫었니? 밑바닥부터 굴러서 성공한 갤러리스트라는 타이틀이라도 얻고 싶었어?”
차가운 분노가 일었지만, 인애의 표정은 지극히 차분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네요.”
인애는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조 과장을 바라보았다. 분노를 담아 노려볼 필요조차 없었다. 조 과장은 지금 모든 면에서 자신이 인애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열등감에 발악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먼저 짖으면 이길 거라는 유치한 생각으로 덤볐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인애는 입을 뗐다.
“내가 손대는 작가마다 잘된 건 맞고, 내가 집안 백으로 여기까지 온 건 틀리고. 내가 바닥부터 시작하고 싶었던 것도 맞고, 컬렉터들이 우리 집안사람들이라는 건 틀리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설명하자 옆에서 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김 대리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거였다. 조 과장의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김 대리를 향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비염이 있어서, 재채기가 나와서요.”
얼른 표정을 바꾸고 변명하는 김 대리의 얼굴은 웃음을 참느라 새빨개져 있었다. 인애는 조 과장과 유치한 승강이를 했다는 자괴감에 한숨이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사수가 유치한 싸움에서 승전고를 울리는 것을 보고 좋아서 웃음을 터뜨리는 팀원이라니……. 이보다 더한 촌극이 있을까.
그렇다고 유치한 싸움을 걸어왔다며 성인군자처럼 물러서서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라이를 제압하려면 또라이처럼 생각해야 하고, 유치한 싸움에는 유치한 대응을 해야 일이 마무리되는 법이다.
“너 진짜 내가 우습지?”
과장님 우습게 만든 건 과장님 자신이죠.
이렇게 말했다가는 조 과장의 영혼까지 털어 버릴 것 같아서 인애는 이내 선선히 웃어 보였다.
“제가 설마 과장님이 우스워서 그랬겠어요? 저 과장님 좋아해요. 과장님께서 많이 가르쳐 주셔서,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잖아요. 근데 과장님 덕분에 여기까지 열심히 달려왔는데, 제 커리어 무시하는 말씀을 하시니 제가 좀 발끈했나 봐요. 죄송해요.”
인애가 깍듯이 예의를 갖추자 조 과장은 잠시 머릿속이 멍해진 듯 입만 벙긋거렸다. 두 사람에게 모여 있던 시선의 밀도가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일단락될 거라고 생각한 이들은 각자의 업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뭐. 윤 과장이 나한테 배워서 일을 체계적으로 하긴 하지. 일단 프랑크푸르트 건은 윤 과장이 해결해. 나는 지금 미팅 있어서 나가 봐야 하니까.”
여기서 인애가 조 과장이 떠넘긴 업무에 말을 더 보탰다가는 피곤해질 게 뻔했다. 인애는 조 과장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 주고, 사무실에 평화가 깃드는 방법을 택했다.
조 과장이 지시한 업무는 인애를 얕보듯 아주 간단한 이메일 전송 업무였고, 그 일 하나 처리한다고 해서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녀오세요. 처리하고 말씀드릴게요.”
조 과장이 사무실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김 대리가 조용히 물어 왔다.
“진짜 조 과장님께 배운 게 많아요?”
“반면교사랄까.”
인애가 내뱉은 말에 김 대리는 못 말리겠다며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인애가 그런 김 대리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때였다. 마침내 관장실 문이 열렸다.
“윤 과장, 잠깐 좀 들어와.”
빠끔히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조 과장과의 대거리에서는 움쩍도 하지 않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