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19화
“그럼 최휘욱 씨는 내일 이설 자동차 대표 이사직 그만두나?”
인애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자신이 휘욱의 뜻대로 일을 그만두면, 휘욱도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궁리를 하는 거냐는 의미였다.
물론 인애는 휘욱이 그럴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가 이번 결혼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방금 당신도 말도 안 되는 소리 한 거 모르나 보네?”
결혼하고 난 뒤, 일상에 변화가 일 것을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와서 사람을 당황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인애의 커리어에 손을 대는 일부터 시작되는 것은 예상 밖의 진행이었다.
인애는 마뜩잖다는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말했다시피 갤러리는 그만둬. 그런 소규모 갤러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 텐데.”
내내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내연녀가 있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자고 했을 때도, 신혼여행 기간 내내 불쌍한 하비샴을 떠올리게 할 만큼 자신을 내버려 뒀을 때에도, 그러다 뜬금없이 나타나 끌어안았을 때도.
인애는 그보다 한술 더 떠서 그를 골탕 먹이고, 그에 대한 희열감에 도취되기까지 했었다. 불같은 분노가 일어야 할 상황에 웃었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껏 견고하게 유지했던 고아한 평정심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틈새로 숨길 수 없는 노기가 검은 연기처럼 새어 나왔다.
“당신과 결혼했다고 해서 내 커리어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인애는 입을 크게 벌리지 않은 채로 읊조리듯 물었다.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분노가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고까운 물음을 던지자 그는 슬슬 짜증이 난다는 듯이 미간을 구겼다. 그의 짙은 눈썹과 눈썹 사이에 깊은 골이 팼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
그는 인애가 물은 말에 대답할 의무 따위는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일면 귀찮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설득할 의지가 있기는 한 걸까? 그냥 화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가 내뱉은 말은 인애를 자극했다. 이제까지는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술 작품을 돈으로 다뤄야 하는 바닥에서 유연한 사고는 필수 불가결이었다. 게다가 그 속에 완전히 속했다고는 못 할지언정 재벌가에서 나고 자랐다.
결혼을 통한 거래가 횡행한다는 것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애가 하는 일을 가볍게 대하는 그의 태도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설 그룹에서 그가 자리 잡기 위해 용을 썼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인애도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각고의 노력을 해 왔다. 그런데 그는 그걸 아주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당신이 이설 그룹에서 이루려는 일은 중요하고, 내가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아 보여?
“뭐라고요? 어린애?”
그는 미세한 표정 변화조차 없이 인애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컴컴한 눈빛은 다분히 도발적이었다.
그리고 가슴속부터 분노가 들끓는 상황에서도, 도발적인 남자의 시선은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빨려 들어갈 듯 깊은 시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는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질 것 같았다.
인애는 고개를 잠시 옆으로 돌렸다. 저도 모르게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고민했다.
무슨 일이든 양측이 해결을 바란다면 타협점은 분명히 나타나는 법이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결이 다른 문제가 툭 불거져 나오고야 말았다.
일의 해결을 방해하는 요소 중에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은 감정이다. 감정이 얽히면, 양보가 사라지고, 첨예한 대립 끝에 타협점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인애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지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남자가 내가 하는 일을 우습게 본다는 거잖아.
분노가 치밀었다. 본인이 하는 일은 중요하고, 인애가 하는 일은 같잖다는 논리가 인애를 분노케 했다. 워낙에 처음부터 인애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자존심을 짓밟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긴 재벌가의 결혼은 돈으로 얽힌 이해관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커리어는 고이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던 걸까?
그렇다고 순순히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타의에 의해 결혼했다고 한들, 같은 방식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 하는 소리가 나도록 한숨을 툭 내뱉은 인애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인애는 어두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낮고 고아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한테 뭘 해 줄래요?”
원하는 것을 얻기 직전의 오만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더욱 짙게 끌어 올리며 유혹하듯 속삭였다.
“이설 자동차에서 설립할 재단을 줄게.”
인애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였지만, 입가엔 미소가 머물렀다.
그는 인애의 감정을 종잡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잘생긴 얼굴은 구겨져도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인애는 낮게 깔린 음성을 내뱉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당신은 내가 원하는 걸 해 줘야지. 그게 거래의 기본이죠.”
“그래서 원하는 게 뭐…….”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전에 인애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당신이랑 자고 싶거든요.’
그는 흠 하고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벽에 걸린 그림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벽면에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화가가 그린 추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는 거친 붓놀림의 결을 세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시선은 그림을 향해 있기만 할 뿐 허공 어딘가에 멈춰 있는 것도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면 저런 시선으로 딴 데를 보게 될까?
인애는 그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기로 했다.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아야 성립되는 게 거래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건 당연히 부당하다. 그는 그 부당함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그의 시선이 마침내 인애를 향했다.
“내가 너랑 자는 일은 없을 거야.”
차갑고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그가 시선을 잠시 옮긴 채로 거래의 부당함에 대해 고민한 게 아니라, 감정을 숨기기 위해 애쓴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내가 갤러리를 그만둘 일도 없겠네요.”
인애는 그의 건조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촉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다시 그에게 인사했다.
“그럼, 잘 자요. 방문은 꼭 잠그고요. 내가 마음 바뀌어서 밤에 그 방으로 건너갈지 또 알아?”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표정 하나가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설마 진심으로 겁먹은 건가?
단언컨대 그는 오늘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잘 것 같았다. 그의 감정을 하나둘씩 끌어낸 것만 해도 꽤 성공적이었다고, 인애는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분노도 여과 없이 드러내고 말았지만 말이다.
*
“좋은 아침입니다.”
갤러리 사무실로 들어서는 인애의 발걸음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과장님, 오셨어요?”
3주간의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지만, 인애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인애와 휘욱의 결혼식은 비공개로 치러졌고, 휘욱의 경우 언론 보도를 통해 결혼 사실이 밝혀졌지만, 상대인 인애의 신상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졌다.
신혼여행에 따라붙은 기자가 찍은 사진이 기사로 실리기는 했지만, 결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진 속 인물이 인애라는 걸 알아볼 만큼 화질이 선명하지도 않았다. 기사는 순식간에 내려졌고, 신상 보호 조치는 강화되었다.
사업적 이유에서 그런 것이지 인애를 보호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결혼 사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라도 밝혀질 수 있었다.
그와의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원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지난밤 생각이 많아진 탓에 잠자리에 들기가 힘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다 결국 해가 뜨고 나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그가 내연녀를 두고도 결혼을 감행한 데는, 인애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밤새도록 인애를 괴롭혔다.
지금도 머릿속에는 미처 털어 내지 못한 생각의 잔재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인애는 먼지 같은 생각들을 불어 내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어, 김 대리. 별일 없었지?”
인애는 의자에 앉으며 오래 자리를 비워서 미안하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이거 김 대리가 부탁했던 거.”
니치 향수가 담긴 봉투를 건네주자, 김 대리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읊조렸다.
“감사합니다. 바쁘셨을 텐데…….”
“바쁘긴 3주 동안 푹 쉬다 왔는데, 뭐.”
3주간의 휴가를 받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긴 휴가 한 번 없이 일한 인애에게 관장은 흔쾌히 휴가를 다녀오라고 승인해 주었다. 휴가 전에 강 화백과의 계약을 해결한 게 크게 작용했고, 또 파리에서 신진 화가의 작품을 물어 오겠다고 했더니 관장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었다.
“그래도요. 결혼도 하시고.”
김 대리가 내뱉은 말에 인애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김 대리를 돌아보았다. 혹시 급하게 내려간 기사를 보고, 인애를 알아보기라도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