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18화
미동도 없는 듯 보였지만, 그의 눈동자는 분명히 동요하고 있었다. 인애는 도발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단지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기만 했을 뿐, 그는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인애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무감한 얼굴, 건조한 표정,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서 입 안이 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같이 씻을까요?”
미지근한 반응조차도 보이지 않는 그를 자극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휘욱이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안쪽 침실을 쓰도록 해. 나는 현관과 가까운 쪽 침실을 쓸 거야. 욕실은 침실 안에 있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남편은 각방을 쓰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인애는 어깨를 귀밑까지 끌어 올리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어조로 묻자, 그가 ‘허’ 하고 얕게 헛웃음을 흘렸다.
“못 봐 주겠네, 진짜.”
읊조리는 말에는 연한 웃음기가 배어났다. 비웃고 있는 상황이 분명한데 그가 내비치는 감정의 결이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편이 못 되는 사람 같았다.
아니,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본인이 느낌을 정의하는 데 어리숙하고, 미성숙한 사춘기 소년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가 허우대 멀쩡한 성인이라는 거였고, 이상한 식욕이 감돌아 군침이 넘어가게 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겉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부정적인 비웃음이었지만, 그의 눈빛이나, 감출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은 긍정적인 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귀엽다고?”
인애는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그 황당함이 진심을 들켜서인지, 아니면 인애가 내뱉은 문장 자체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만해.”
그가 낮게 읊조렸다. 아까는 살짝 드러났던 그의 기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는 텅 빈 시선으로 인애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쓰럽고 불쌍해서 못 봐 주겠으니까, 적당히 해.”
그는 비수 같은 말을 내뱉고는 돌아섰다.
“여보.”
인애는 단단하고 너른 등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간드러진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춰 선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돌아보았다.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의 적응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그의 무심하고, 무미건조한 태도에 인애는 완벽하게 적응한 것 같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아슬아슬한 반응을 즐기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마치 전압이 낮아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전구처럼 연한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그 아스라함이 인애를 움직이게 했다.
자극을 더하면 그가 더 밝은 빛을 낼 것만 같아서.
인애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얼굴을 모로 기울인 채 인애가 다가오는 모습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잡아먹을까 봐 겁먹은 표정이네?”
놀리듯 과장된 어조로 말하자 휘욱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인애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격한 반응 하나하나가 인애의 세포 하나하나에 자극을 일으키는 것처럼 온몸이 짜릿했다.
“적당히 하라는 말 못 알아들었어?”
“나 되게 많이 자제하고 있는 거 모르겠어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각방 쓰자는 남편한테 엄청 관대한 거지, 이 정도면. 울고불고 난리 치면서 그렇게는 못 한다고 소리 지르고, 우리 집, 당신 집에 전화 걸어서 이런 결혼인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라고 일러바칠 수도 있는데?”
인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우뚝 멈춰 서 있는 휘욱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니면 당신이 내연녀 스캔들 잠재우려고 나랑 결혼 서두르는 바람에 나는 신혼집에 입성한 첫날부터 독수공방하며 외로운 밤을 보냈노라고 여성지와 인터뷰할 수도 있고. 그럼 우리 여보는 천하의 개새끼가 될걸?”
개새끼라는 상스러운 욕을 내뱉을 때는 마치 강아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장난스러운 어조를 강조했다.
“아니면 직접 책 한 권 써서 재벌가 막장 드라마의 불쌍하고 가련한 여주인공이지만, 끝내 넓은 아량으로 감싸 안았다는 식의 여장부가 되어서 인세 좀 벌어 볼까요?”
휘욱은 진심으로 못 볼 것을 봤다는 눈빛으로 인애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요? 내가 진짜 그렇게 할까 봐 겁이라도 먹은 거야?”
돌처럼 굳어 있는 그를 향해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꼭 성경에 나오는 사람 같네.”
“뭐?”
그는 헛웃음인지 되물음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쏟아지는 불과 유황 속에 있는 소돔을 돌아봐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가련한 롯의 아내 같다고요.”
“그럼 당신이 소돔이야?”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고 있었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인애의 화법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돔이 왜 그렇게 됐는지 알아요?”
“색욕에 빠져서 벌을 받은 도시였지, 아마?”
그는 성경적 지식을 건조하게 열거했다.
“그렇다면 내가 소돔이 맞다고 볼 수도 있고.”
“뭐라고?”
그는 이번에는 완전히 인애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인애는 가슴 밑에서 팔을 교차시켜 팔짱을 끼고는 걸음을 멈추며 그와 마주 섰다.
“나는 당신이랑 자고 싶거든요. 그냥 잠만 자는 거 말고. 신혼부부답게.”
명료한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유추해 보건대 야한 의미였지만, 그 어조는 우아했다.
그는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였지만, 귓불이 새빨갛게 익고 있었다. 인애는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지?”
인애가 왜 박장대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인애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손가락등으로 눈물이 찔끔 나온 눈가를 훔치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여보 귀가 너무 빨개서.”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고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커다란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다. 아까 각방을 쓰자며 차갑게 굴고,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던 남자의 무미건조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걱정 마요. 오늘은 안 덮칠 테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휘욱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되물은 순간, 인애는 발꿈치를 들어 올려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마찰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그는 혼이 나간 듯한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마주하는 게 심장이 거칠게 들썩일 만큼 만족스러웠다. 머릿속에서는 그가 불같이 화내서 상황을 악화시키기 전에 그만두라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가슴은 더 해 보라며 가쁘게 뛰어 댔다.
“새신랑이 이렇게 부끄럼이 많은 성격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준비되면 말해요. 언제든지 유혹해 줄 테니까.”
휘욱은 쓸데없는 짓은 집어치우라는 말을 하는 것에도 지쳤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쩐지 그가 먼저 등을 돌려서 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싶지만은 않았다. 인애는 다시 한번 발꿈치를 올려 그의 볼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잽싸게 옆으로 피해서 인애는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해?”
호기로운 어조에서 즐거움이 묻어나는 것은 착각일까?
그는 커다란 손으로 제 뺨을 감싸며 인애를 노려보았다.
“두 번 당한 거 맞는데? 이번이 세 번째 시도잖아. 기억 안 나요? 신혼여행 때는 기억하는 것 같더니?”
인애는 패배를 인정하라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찬란했던 여름날의 순수한 첫정에 관한 언급에 그의 얼굴 위로 낭패감이 어렸다.
기분을 드러내지 못하는 어리숙한 사춘기 소년 같았던 그가 갑자기 총천연색 속내를 드러내는 듯했다. 희미하기는 했지만, 그는 인애에게 희노애락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해 내고 있었다.
“아, 그만 놀려야지. 이러다 울겠네, 새신랑. 꼬마 신랑도 아니고 신혼집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건 곤란해요.”
인애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다독이기까지 했다. 손끝에 닿는 그의 등은 단단했다. 그 감촉이 심장까지 단번에 전해져 짜르르한 통각이 일었다.
“그럼 잘 자요.”
계속 그의 등에 손을 대고 있으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것만 같아서 인애는 얼른 돌아섰다.
“잠깐.”
그대로 있을 줄 알았던 그가 인애를 불러 세웠다.
“왜요?”
인애는 아까 그가 했던 것처럼 고개만 비스듬히 기울여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그 갤러리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야.’와 같은 상식을 얘기해 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향긋한 과즙으로 만든 말랑말랑한 거대 젤리로 가득했던 장난기 어린 공간이 순식간에 살얼음판 위의 전장으로 변모한 기분이었다.
그 간극에 인애는 잠시 머뭇거렸다. 휘욱이 지금 자신에게 무슨 요구를 하는 건지 가늠할 시간이 필요했다.
“걱정 마. 당장 내일 그만두고 오라고는 안 할 거니까.”
그는 아까 인애가 장난칠 때의 말투를 똑같이 따라 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갤러리에 사표 내고, 후임 구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뭐라고요?”
인애는 아까 그가 그랬던 것처럼 돌아서서 그를 황당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했던 적은 없었다.
조부에게 명례 재단을 받아 올 생각이었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 나한테 사표 내고 이 집에 들어앉으라는 거예요?”
“이설 자동차에서 설립할 재단에서 일해 줬으면 해.”
부탁 조였지만 강압적인 느낌은 배제할 수 없었다. 인애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섰다. 둘 사이에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