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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먼저 17화 (17/68)

결혼 먼저 17화

한번 마음먹은 것은 끝내 해내고야 마는 딸애의 성격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얼토당토않은 일에 고집을 피운 적은 없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적도 없었다.

전부를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래를 하면서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결혼 당사자인 인애였나 보다.

허울뿐인 결혼을 위해 휘욱은 내연녀까지 만들어 가며 불신의 감정을 심어 놓은 상태였다.

“자네한테 여자가 있는 것을 인애가 알고 있지 않은가?”

혀끝에 쓴맛이 감돌았다.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그 여자와는 끝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더군요.”

윤 교수는 잠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가장 중요한 항목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미지의 값이 눈앞에 뻔히 있는데도 옳은 답을 구했다고 자만한 나머지 일을 그르친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네는 뭐라고 했나?”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에서는 서늘한 온도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대답처럼 들려서 질릴 정도였다.

저런 목소리로, 저렇게 사람을 질리게 할 정도의 말라비틀어진 태도로 딸애를 대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허망했다.

“그래서 인애가 받아들이던가?”

휘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인애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윤 교수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윤 교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서재 책상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의 결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따라 나무의 결이 기이하게 보였다. 자연의 무늬가 좋아서 직접 목재를 골라 만든 책상이었는데,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그대로 있을 때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인간이 가공한 것에는 부자연스러움이 깃들기 마련이다. 하물며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부자연스러운 것투성이의 결혼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딸애는 순서가 뒤바뀌었을지언정 자연스러운 이치를 찾고 있는 거였다.

대체 왜?

책상이 된 나무에 아무런 무늬가 없다고 뒤늦게 결을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억지스러운 행동이 아니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나무가 아닌 재료, 혹은 집합목 등으로 만든 가구에 나무 무늬 필름을 씌워 나무처럼 보이게 하는 예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무늬가 아닌, 억지였다.

한 걸음 양보해서 정략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겉보기에 화목한 가정을 이루자는 의도라고 여기기엔, 휘욱의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다.

인애가 휘욱에게 이성 간의 사랑이라도 바라고 있다는 것인가. 나중에 휘욱과 이혼하고 나서 딸애가 상처를 받기라도 하면, 그 상처는 아비인 내가 자초한 게 되겠구나.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듯했다. 사랑으로 가슴이 들끓었던 때는 벌써 잊은 지 오래다. 그런데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뼈저린 이별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침울해졌다.

보이지 않는 딸애의 마음이 가슴에 스며든 것만 같았다.

“물어볼 게 한 가지 있네.”

새까맣게 타 버린 아비의 속을 대변하듯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결혼 전에 물었어야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당연히 배제되었던 상황이었고,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사업적 논의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저놈의 태도가 애초에 저렇게 생겨 먹은 건지 딱딱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만약 상황이 좋게 풀린다면, 자네는 평생을 내 사위로 살아갈 생각이 있는가?”

만약 인애가 자네에게 마음이 있고,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 가고자 한다면, 그 아이와 평생 함께할 생각이 있는가.

묻고자 하는 말은 접어 두고, 윤 교수는 주체를 자신으로 돌려 질문했다.

“없습니다.”

“왜?”

윤 교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사업적 파트너로서도 훌륭한 위치에 놓이게 될 사이였다. 그런데도 단칼에 거절하는 휘욱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씀드릴 이유 없습니다.”

“자네, 설마 내연녀 연기 한다는 그 여자한테 진심인가?”

“아닙니다. 평생 제 곁에 그런 사람을 두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감정이 없는 로봇을 대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소름이 확 끼쳐서 불쾌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심장은 뛰는 게 버겁다는 듯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런 녀석에게 인애는 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윤 교수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마른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얼굴에 닿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당부할 게 하나 있네.”

“듣고 있습니다.”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금 살갑게 굴었다면 나았을지.

아니다. 그랬다면 혹여 딸에게 여지를 주어 더 큰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을 것이다. 차라리 냉랭하고 딱딱한 성정이 낫지 싶다.

“나는 인애와 자네가 복잡해지는 것은 원치 않네.”

상처 주지 말라는 말을 에둘러 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아비가 보기에 마음을 갖기 시작한 듯 보이는 딸애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제가 인애 양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는.”

휘욱은 고심하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윤 교수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거래로 이루어진 사이라고는 하나, 사위를 대하는 자신도 이렇게 긴장하는데 인애는 오죽할까 싶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윤 교수님 상황부터 걱정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휘욱은 쓸데없는 감정놀음에 치우친 대화는 그만 접자는 듯이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치켜세우며 물었다.

“이 결혼의 정체를 알았을 때, 인애 양에게 상처를 주는 대상이 저일까요? 아니면 평생을 사랑으로 키워 주셨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이용일까요?”

윤 교수는 말문이 턱 막혀 버려서 멍해진 눈으로 휘욱을 바라보았다. 독하고 무서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휘욱은 윤 교수가 염려하는 부분을 집어내면서, 사업적 거래에 빈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굴었다.

뭐든 깊어지기 전에 초반부터 매섭게 대하라는 부탁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명례 건설 유럽 지부 임원진 중에 이번에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인원은 전부 윤 교수님을 지지할 겁니다. 그리고 두바이와 아부다비에 있는 인사들과도 파리에서 접촉했는데, 일주일 후에 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윤 교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 교수님께서 명례 건설 대표 이사직에 오르시면, 이설 건설 매각 뉴스가 돌 겁니다. 이설 건설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현재 매각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명례 항공은 제가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명례 건설이 이설 건설과 합병한다면 국내 건설사 도급 순위 1위도 노려 볼 수 있는 거대 기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재무적 부실을 이유로 시장에 내놓으려는 항공을 가져간다는 말은 의아했다.

“항공을 가져가는 데, 따로 뜻이 있나?”

휘욱은 아까 질문을 던졌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아, 또 말씀드릴 수 없다는 대답을 할 것 같은 표정이구먼.”

윤 교수는 대답을 가로채고는 또다시 한숨을 집어삼켰다. 독하고 무서운 놈인데, 한편으론 어딘지 모르게 끌리는 구석이 있는 믿음직한 놈이다.

적이 되면 두 발 뻗고 잠들기 어려울 만큼 거추장스럽겠지만, 같은 편이 된다면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없는 인물.

갑자기 생경한 욕심이 불쑥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생을 사위로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딸애도 이런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전여전이라고 똑같은 탐욕이 발현했나.

저런 아들을 두고 친우는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유럽 지부 인사들이 귀국하는 대로 연락드리겠…….”

말을 채 맺기 전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빠, 아직 멀었어?”

문밖에서 인애의 활기찬 음성이 들려오자,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부딪쳤다.

“아니다. 곧 나가마.”

윤 교수가 바로 대꾸했음에도 서재 방문이 빠끔히 열렸다. 문틈 새로 고개를 내민 인애가 맑게 웃었다.

“휘욱 씨 너무 잡지 말라니까, 아빠.”

역성을 드는 딸애는 무한히 사랑스러웠다. 온 세상을 다 녹여 버릴 것처럼 따뜻한 미소에도 앞에 앉은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독한 놈.

“잡기는 누굴 잡았다고.”

윤 교수는 자상한 아버지의 얼굴로 돌아가 서재를 나섰다. 인애는 휘욱의 팔에 팔짱을 끼며 웃고 있었다. 목구멍에 숨이 걸린 것처럼 날숨이 흘러나오질 않았다.

*

두 사람이 신혼집에 나란히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결혼 준비 기간이 짧았고, 일일이 신경 쓰기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집 안을 꾸미는 일은 휘욱의 측근에게 맡겼다.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인애의 본가부터 방문한 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녹초가 되어 앞으로 자신이 살게 될 집에 발을 들였다.

이설 건설에서 새로 지은 주상 복합 아파트의 꼭대기 층, 부채꼴로 휘어진 거실 통 유리창 밖으로 성수대교 북단과 한강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N 타워의 불빛이 초록빛인 걸 보니 오늘 미세먼지 농도는 양호한 편인가 보다.

아, 내가 라디오 생활 정보에나 나올 것 같은 감상을 늘어놓고 있다니.

인애는 거실을 둘러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선 그는 슈트 팬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어울리지 않는 불량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나 씻고 싶은데, 욕실이 어디예요?”

나른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섬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인애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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