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16화
“우리 인애 얼굴이 정말 좋아요. 다행이에요, 여보.”
아내가 윤 교수의 팔을 꼭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인애와 휘욱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결혼 당사자인 인애는 덤덤했지만, 아내는 식음을 전폐했었다.
‘여보, 우리 인애 어떤 애인지 알잖아요. 우리가 그 아이를 어떻게 낳고, 어떻게 키웠는데!’
결혼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었다. 불임 판정, 그 당시에는 난임이라는 용어 대신 불임이라는 인간 불능을 대변하는 듯한 단어를 사용했었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말에 아내는 큰 상처를 입었었다.
인공 수정과 시험관 시술을 거쳐 지칠 때로 지쳐 있을 때,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가 인애였다. 충만할 인, 사랑 애愛를 써서 이름을 짓고, 세상에 널리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두 사람의 바람대로 아이는 밝고, 맑은 아이로 자라났다. 솔직하고, 영특했으며, 선명한 기질을 가진 아이였다.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알잖아요. 휘욱이 그 애……. 기특하죠, 기특해. 부모 잃고, 최 부회장 내외한테 무시당하면서 산 거,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안쓰럽기도 하고, 혼자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 보면 기특한 아이야. 그런데 우리 인애 짝으로는 아니에요, 여보. 제발 아버님께 말씀 좀 잘 드려 봐요. 신효를 끼고도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왜 그 애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우리 인애가 대신 지켜요? 이런 억울한 경우가 어디 있어!’
평소의 윤 교수였다면 아내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친인 윤 회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휘욱과 인애의 결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거래였다. 다른 이들은 모르는, 휘욱과 윤 교수만이 알고 있는 모종의 거래.
그런데 휘욱이 거래 조건을 보기 좋게 어겨 버렸다. 윤 교수는 분노로 들끓는 가슴을 달래며 거실로 향했다.
“아빠!”
딸 인애가 환한 얼굴로 윤 교수를 맞았다. 아내의 말마따나 인애의 얼굴은 사랑하는 사람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여느 새 신부처럼 환하고 맑았다.
“잘 다녀왔니?”
인애는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녀왔습니다.”
딸의 옆에 서서 인사를 건넨 이는 당연히 휘욱이었다. 윤 교수는 인애가 눈치를 챌까 싶어 여상한 인사를 건넸다.
“오느라 고생 많았네. 일단 식사부터 하지.”
저녁 식사 시간은 화목한 가정의 표본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기애애했다. 아내는 휘욱에게 이 반찬, 저 반찬 권하며 살갑게 굴었다.
“최 서방이 예전부터 소꼬리찜 좋아했었잖아. 맞지?”
휘욱은 짐짓 놀란 눈을 하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접시에 소꼬리찜만 가득 담아서 먹었던 게 기억나서. 휘욱이 아니, 최 서방이 중학생일 때였나? 강화도에 한번 같이 간 적 있었잖아.”
휘욱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휘욱이 중학생이었던 때라면 그의 부모님이 살아 있을 때였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깍듯이 인사하는 휘욱을 윤 교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모가 살아 있었으면, 휘욱도 인애처럼 사랑받으며 자랐을 것이고, 지금처럼 냉소적이며 계산적인 사람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윤 교수는 휘욱의 옆에 앉아서 내내 생글거리고 있는 딸애를 바라보았다.
“아빠, 왜?”
시선을 느낀 인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다. 보기 좋아서.”
인애는 윤 교수가 사랑하는 선선한 눈웃음을 머금으며 대꾸했다.
“다행이다. 아빠 눈에 보기 좋아서.”
행복하다는 듯이 읊조리는 딸애의 말에 가슴에 기다란 선이 그어지는 듯했다.
자신의 안위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아무것도 모른 채 신혼의 단꿈에 젖어 행복한 얼굴을 한 딸애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죽음 같은 죄의식이 일었다.
“자네, 식사 끝내고 나 좀 잠깐 보지.”
수저를 내려놓으며 윤 교수는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사위에게 딸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건네려 하는 장인의 모습처럼 보여야만 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아빠, 휘욱 씨 너무 잡지 마요.”
인애는 휘욱의 팔짱을 끼며 사랑스럽게 말했다. 휘욱은 그런 인애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이내 시선을 거뒀다.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신혼여행 갔다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건가?
윤 교수는 혼란한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먼저 식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주관이 분명하다지만, 인애는 착한 딸이었다. 부모에게 말대답 한번 한 적 없는 효녀였다.
그래서 착한 딸애를 이용한 거 아니었나?
서재 책상 앞에 앉은 윤 교수는 두 손안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처럼 감정이 격하게 차올라,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는데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최휘욱.”
“들어오게.”
윤 교수는 얼른 안색을 바꾸며 가쁜 숨을 골랐다. 서재 문을 굳게 닫고 들어온 휘욱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 먼저 했다.
“앉게, 일단.”
서늘한 눈동자, 굳은 얼굴, 어떤 비난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휘욱의 태도가 윤 교수의 신경을 묘하게 건드렸다.
“약속과 다르지 않은가?”
서론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윤 교수는 휘욱을 비난하는 어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제가 윤 교수님과의 약속을 어긴 적은 없습니다.”
휘욱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딱딱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윤 교수는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전화 화면을 켜서 휘욱에게 건넸다.
“이래도?”
휴대전화 화면에는 두 사람이 파리의 한 호텔 앞에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화면을 한 번 본 휘욱은 눈빛만큼이나 무감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건 제가 당한 겁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당하다니? 그럼 인애가 먼저 달려들기라도…….”
윤 교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온몸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저녁 식사 하는 동안 내내 생글거리던 딸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나? 어디서 거짓말을! 자네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건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사진 속 키스는 제가 당한 일입니다.”
“두 사람, 그러면…….”
이보다 더한 것도 했느냐는 의미였다. 눈치 빠른 휘욱이 재우쳐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윤 교수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안도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딸애가…… 인애가 휘욱을 마음에 두고 있었나.
“파리에 있는 동안, 저는 따님이 잠든 시간에 호텔방에 들어갔고, 따님이 깨기 전에 호텔방에서 나왔습니다. 스위트룸이어서 침실이 두 개 있었고, 각자 다른 방을 사용했습니다. 낮에 따님은 주로 미술관을 관람했고, 저는 유럽 각지에서 근무 중인 이설 건설과 명례 건설 관계자들을 조용히 만나고 다녔습니다.”
윤 교수는 휘욱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휘욱이 각 인사를 만나고 다닌 이유는 윤 교수의 거취와도 관련이 있었다.
“떠나기 전날,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기자가 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길에서.”
잠시 숨을 고른 휘욱이 말을 이어 나갔다.
“가벼운 포옹 정도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따님께서 신혼여행 온 부부가 친구처럼 포옹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벌인 일입니다.”
“자네 혹시 인애에게 다 말하고.”
휘욱이 부정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에게 그런 것처럼 설마 휘욱이 인애에게도 교묘한 거래를 제한한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물어보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따님은.”
잠시 망설이는 듯 휘욱이 말을 멈췄다. 윤 교수는 비통한 심정으로 휘욱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희미한 근심이 어린다. 그 모습이 오래전 세상을 떠난 친우와 지독하게 닮아 있어서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인데도, 어릴 때는 윤 교수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아이였다. 맑은 눈동자는 총명했고, 밝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었다. 아이가 어른들 앞에서 표정을 지운 것은 윤 교수의 친우였던 휘욱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간 날이었다.
그날 이후, 아이는 표정을 지우고, 감정을 없애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지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살 줄 알았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휘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설다.
어린 시절의 모습도, 감정을 지워 버린 이후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온도가 지극히 낮아서 살갗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의 서늘함이 휘욱의 모습, 그 자체였다.
왜 하필 이런 일로 엮이게 되었을까, 한탄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동안 피해 오기만 했던 골치 아픈 일들이 한꺼번에 터진 건지도 모른다. 모른 척하지 않고 살았다면 달랐을까?
세상을 향해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놈에게 딸을 맡기는 것밖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걸까?
윤 교수에게 회사를 이끌 저력이 있다고는 한들, 아직 독단적으로 움직이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상황을 파악하는 데만도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 터져 나올 문제는 막아야만 했다. 더 큰 일을 도모하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윤 교수는 서늘한 휘욱의 성정을 믿었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줄 녀석이 아니었고, 감정에 휩쓸려 다른 이의 마음을 취하지도 않을 터였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감정놀음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짐승 같은 본능에 이끌려 딸에게 위해를 가할 인물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따님은 저와의 완벽한 결혼 생활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윤 교수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딸 인애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