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14화
“같이 있는 사진이 찍히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거야.”
휘욱이 비난조로 읊조렸다. 키스하는 사진이 찍혔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난 나머지,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분노하는 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운 인애는 감정이 시소를 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울감이 엉덩이를 대고 있는 쪽은 그가 사랑을 말한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희열감에 도취된 반대쪽은 그에게서 일말의 감정을 끌어냈다는 데에 만족한 듯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왜 굳이 입을 맞췄지? 그렇게 무모한 성격이었어, 원래?”
이어진 그의 질문에 인애는 잠시 당황했다. 그가 입맞춤의 이유를 묻는 직설적인 질문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마치 수년 전에 들었어야 할 질문을 지금 당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그를 도발하고 싶은 마음에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궁금해졌다.
정확히는 그날의 감정에 관해서.
결혼식을 치르던 날, 신부 대기실에서 두 사람은 사진작가의 요구로 입을 맞추었었다. 그때 인애는 기묘한 안온함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안정감에 도취되었었다.
전부 소멸한 세상에 입술을 맞댄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
다시금 그와 입을 맞춰도 그 순간의 감정이 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마침내 그의 입술을 머금자 복잡한 의도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아득하게 녹아내렸다. 부정할 수 없는 강한 이끌림, 그 끌림이 육감적인 것인지, 아니면 승부욕에 취한 정신적인 희열인지는 확언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결론은 그에게 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도 진한 키스 한 번에 무자비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숨결은 거칠고 뜨거웠고, 손길은 그녀를 갈급하듯 성마르게 움직였다.
인애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동안 그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는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리며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인데도 불구하고 심장이 잠시 기민하게 반응할 만큼 근사한 모습이기도 했다.
과거 어느 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만큼.
“몸을 내던져 매달려야 할 정도로 날 원하는 거야?”
휘욱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더 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높다란 콧대에는 꾹 눌러 주고 싶은 오만함이 걸려 있었고, 검고 투명한 눈동자에 맺힌 날카로운 비난은 긁어내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인애는 대답 대신 윗입술을 들썩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데 어떡하지? 나는 윤인애한테 줄 게 없어.”
그는 미소를 풀고 이내 얼음장 같은 얼굴로 돌아가 말을 이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무엇이든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이 인애에게는 그 여자를 가리키며 사랑을 언급했던 것만큼이나 파급력 있게 작용하는 듯했다
가슴이 또다시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면 곤란한데? 모르고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
휘욱이 인애의 감정이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말했다.
“비열하게 굴기로 작정했어요?”
기 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는데, 인애는 속마음을 들켜 당황한 나머지 그의 태도를 지적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팩트를 예로 들지 않고, 상대의 고까운 태도를 꼬집으며 감정적으로 꼬리를 무는 것은 이미 졌다는 증거다.
그는 인애가 자신의 수에 완전히 말려들었다는 게 마음에 든다는 듯이 대놓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중 절반만 원해? 마음 아니고, 몸? 그래서 길에서 그렇게 달려든 거야? 아, 생각해 보니까 윤인애 씨가 내 허락 없이 나한테 입 맞춘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잖아?”
순간 인애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때는.”
인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당시의 사건을 변명하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인애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윤인애 첫사랑이라도 돼?”
그는 진지한 답변을 요구한다는 듯이 엄정한 눈빛이었다. 이제야 그가 자신이 오래전에 보낸 고백 편지를 보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내뱉으면 결코 여상한 어조가 흘러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숨을 고를 때였다.
“설마 그때부터 지금껏 나만 짝사랑한 건가? 그래서 이 결혼이 기회다 싶어서 덤빈 거고?”
그는 과장된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눈빛만큼은 여전히 진지했다.
“몸으로 덮치면 내가 넘어갈 거라는 싸구려 같은 생각이라도 했어?”
그는 조금 전에 인애가 했던 물음을 되받아치기라도 하듯이 ‘싸구려’를 힘주어 강조했다.
“안타깝네. 나는 사랑 없이 몸만 섞는 건 야만적인 짓이라고 생각하는 낭만주의자라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아마.”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인애는 한숨이 흘러나올 것만 같아서 입술이 가늘어지도록 앙다물었다.
“이제부터 나는 윤인애가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 해.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단죄하듯 읊조린 그는 냉기를 풍기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거친 한숨이 속절없이 흘러나왔다.
인애는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비벼 댔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 어깨에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그와 승강이를 하면서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목과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나 보다.
대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 걸까?
인애는 스위트룸의 푹신한 응접실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와의 결혼을 앞두고, 만만치 않은 생활이 될 거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견고한 철옹성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을 통해 인생의 동반자를 얻은 게 아니라, 최대의 적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것도 심리전에 지나칠 정도로 능통한 적.
내내 찬밥 신세였던 그가 이설 그룹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는 인애가 미세한 반응을 보이는 부분까지 정확하게 집어내서 공격했다. 마음을 더 단단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은 이미 끝났고, 두 사람은 세상이 다 아는 부부가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 계속 지금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날 난 것처럼 냉랭하게 굴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주저앉아서 한숨지으며 우울해하고 눈물지을 수야 없다.
인애는 굳게 닫힌 그의 방문을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날에도 무심히 문을 닫아 버렸었다.
*
찬란했던 그 여름날.
정원수에 매달린 매미가 왕왕 울어 대는 늦여름이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뜨거운 햇볕이 붉은 벽돌을 녹여 버리겠다는 기세로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실내는 쾌적하고 시원했다.
“할아버지께 고맙다고 말씀드리렴.”
“네, 그럴게요.”
인애는 조부의 심부름차 이설 그룹 본가에 방문한 참이었다. 원래는 사촌 신효가 오기로 한 자리였는데,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서 앓아눕는 바람에 인애가 오게 되었다.
조부는 이설 그룹 최 회장에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보이차를 선물했다. 평소 차를 즐기는 최 회장은 흡족한 얼굴로 재차 인애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귀한 선물을 내어 주어서 참으로 고맙구나.”
인자한 웃음을 띤 최 회장은 내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큰며느리를 향해 자상한 투로 말했다.
“아가, 다구茶具 좀 내 다오.”
이윽고 팔팔 끓는 물이 담긴 주전자와 함께 투박한 다구가 응접실 테이블 위에 놓였다. 상석에 앉은 최 회장은 며느리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차를 직접 우리시네요?”
인애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물었다. 조부인 윤 회장은 물 한 잔도 직접 받아 마시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인자한 얼굴로 차를 우리는 최 회장이 마냥 신기했다.
“내가 마실 차는 내가 우리는 게 제일 맛있거든.”
최 회장은 큰 비밀을 알려 주겠다는 듯이 속삭이고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기까지 했다. 이런 자리에는 처음 오는 인애였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단단하게 굳었던 어깨에서 힘이 스르륵 빠지는 기분이었다.
인애는 최 회장이 차를 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건 자사호라고 부르는 다관이다. 자사호는 숨 쉬는 법을 알아서 차의 그윽한 향을 만들어 내지.”
최 회장은 뜨겁게 우려낸 찻물을 작은 찻잔에 차례대로 부었다. 그러고는 잔을 들어 자사호에 끼얹기 시작했다.
인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왜 버리는지 궁금한 눈치로구나.”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인애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빛내며 최 회장을 바라보았다.
“이걸 세차라고 부른다. 무슨 의민지 알겠니?”
“차를 씻어 낸다는 의미인가요?”
인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단다. 뜨겁게 우린 물로 잔과 자사호를 데우고, 차의 이물질을 제거해서 더욱 순수한 차를 즐기기 위함이지.”
최 회장은 황갈색 수색을 띤 찻물을 다시금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첫 번째 잔을 인애에게 권하려는 순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었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 궁금했던 휘욱이 일과를 마치고 귀가한 듯했다.
“이리 앉아라.”
“운동 다녀오는 길이라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일단 좀 씻겠습니다.”
최 회장에게 딱딱하게 대꾸하는 그의 태도로 인해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최 회장은 마뜩잖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아버님이 이해하세요. 녀석이 워낙 딱딱해야죠.”
최 회장의 큰며느리이자, 휘욱의 큰어머니인 조 여사는 휘욱의 역성을 드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꼬는 어조였다. 그리고 휘욱의 삐딱한 태도가 상당히 흡족한 눈치였다. 분위기가 오묘해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선이 인애에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