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13화
갑작스러운 포옹에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가 이내 가쁘게 솟구쳐 올랐다. 꽤 두께감 있는 야상 점퍼를 입었음에도 허리에 닿은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떨림에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인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분위기로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려 있다.
하지만 짐작건대 색다른 빛의 정체는 육감적 본능에 의한 충동이 아닌, 이성적 사고에 의한 계산 같았다.
목적을 두고 철저히 계산된 행동.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결혼이 결정되고 나서 그가 인애에게 요구했던 것은 단 하나, 쇼윈도 부부였다.
세상 앞에서는 사이좋은 부부인 척 연기하는 것.
그가 인애에게 갑작스러운 스킨십을 해 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줘야 할 만한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기자라도 붙었어요?”
인애는 조용히 읊조리며 물었다. 그가 한쪽 입술 끝에 웃음을 물었다. 눈치가 빠른 게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다.
“그래.”
신혼여행 기간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남자가 귀국 전날 갑자기 나타나서는 기자가 붙었다며 허리를 당겨 안는 모습이라니.
어쩌겠는가, 이 결혼에 뛰어든 당사자가 자신인 것을.
인애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겨우 포옹으로 되겠어요? 신혼여행 온 부부인데?”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업적인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는데, 세상이 주목하는 남녀 간의 러브 라인에 대해서는 영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남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남자가 내연녀를 숨기고, 나와 정략결혼을 했다고?
인애는 의구심을 애써 갈무리하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 기자가 왜 붙었는지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방에 들어가서 설명해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마른 입술을 머금었다. 그는 당황하는 듯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지 밀어 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인애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고,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놀라서 두근거렸던 것과는 확실히 결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와 입술이 닿아 있어서 육감적 끌림에 의해 심장이 두근대는 것인지, 아니면 당황한 그를 보고 묘한 승리감에 도취해 쾌감이 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입술을 슬쩍 벌려 더욱 깊숙이 머금자, 어깨를 가볍게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작은 머리를 그러쥐는 그의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졌다.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손도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애는 손을 올려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벌어진 그의 트렌치코트 속에 인애의 몸이 폭 파묻히다시피 했다. 옷자락이 스치고, 천이 쓸리는 밀도 높은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단단한 그의 가슴이 온몸으로 느껴져서 본능적으로 얕은 전율이 흘렀다.
서로의 뺨 위에서 무섭게 온도를 높여 가는 숨결이 조심스럽게 흩어졌다. 인애가 고개를 살짝 비틀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더욱 깊숙이 다가왔다.
더는 다가설 곳도 없는 것 같은 기분.
길거리에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상황인데,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모든 것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은밀하게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인애에게서 가쁜 숨결이 가까스로 새어 나왔고, 그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댔다.
정말 다른 사람이 보면 서로에게 푹 빠진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지에서 키스를 나누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인애는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그의 입술이 본능적으로 인애가 물러나는 허공의 길을 따라붙었다.
인애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감았던 눈을 뜬 것은 메마른 찬 공기가 입술에 닿는 게 느껴졌을 때였다. 그도 그제야 잠시 일었던 불꽃을 갈무리한 듯했다.
“미쳤어?”
까맣다 못해 푸른 기운이 돌 것만 같은 눈동자가 인애를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내가요?”
인애는 일부러 더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지켜보는 누군가의 눈에는 사랑하는 남편과 키스를 나눈 뒤, 황홀경에 젖어 있는 아내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도록.
“지금 길에서.”
발꿈치를 한 번 더 들어서 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짧게 입을 맞추고 얼른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인애를 내려다보았다. 혼이 나간 것 같은 눈빛을 마주하자, 통쾌함이 밀려들었다.
“누가 보고 있는 거면 아무나하고 할 수 있는 포옹보다, 프렌치 키스가 더 낫지 않나 해서요. 결혼 전에 나한테 바랐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요? 완벽한 쇼윈도 부부?”
마지막 물음을 내뱉을 때는 인애의 목소리에서도 날카로운 냉기가 흘렀다. 그는 일단 들어가자며 인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인애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자연스럽게 풀어 내리며, 그와 나란히 걸었다.
그는 마치 아내에게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듯 귓속말을 해 왔다.
“앞으로 이런 돌발 행동은 하지 마.”
어금니를 꽉 물고 내뱉는 걸 보니, 화가 많이 난 듯했다. 인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를 올려다보며 유치하게 도발했다.
“왜요? 그 여자가 볼까 봐 겁나요?”
그는 못 하는 소리가 없다는 듯이 나무라는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신경 좀 쓰셔야겠다, 우리 남편.”
인애는 한껏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읊조리며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뒤따른 그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한숨을 몰아쉬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기자가 붙었어. 지금 손쓰지 않으면, 아마 인터넷이 당신과 내 키스 사진으로 도배가 될 거야.”
“그거 알아요? 사람들은 재벌 커플 키스 사진에는 관심 별로 없을걸요? 차라리 비리나, 횡령 같은 거로 걸려서 포토 라인에 서는 걸 더 보고 싶어 할 거야.”
“내 말은.”
그가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사진을 당신 가족이나, 다른 사람이 보면.”
가족? 신혼여행 중인 딸이 남편과 키스하는 사진이 찍힌 게, 큰일 날 일인가?
다른 사람이 보면……?
인애는 갑자기 속이 뒤틀려서 되물었다.
“진짜 그 여자가 볼까 봐 겁나서 이러는 거예요?”
휘욱은 끝내 감정을 지운 채로 인애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웠던 포옹 이후로 몇 분간 표정이 기가 막히게 읽히던 남자가 지금은 태어날 때부터 무미했던 사람처럼 건조해졌다.
“그 여자는 당신이 결혼하는데, 아내하고 아무것도 안 할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나 보죠?”
인애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한껏 빈정거렸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할지라도, 신혼여행까지 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괘씸한 그를 도발하고, 자극하고 싶은 감정이 자꾸만 용솟음쳤다. 그 원인은 처음부터 자신을 건드린 이 남자에게 있다고 탓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뛰고 있었다. 생경한 감각이 무섭도록 일어났다.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 만큼, 이상한 갈증이었다. 목구멍이 꺼끌꺼끌하고, 심장이 버석거릴 정도로 솟기는 기갈이 두려울 정도다.
“아니. 내가 그러기로 약속했거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면서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그는 서늘한 눈빛을 한 번 보내고는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의 뒤를 따라 긴 복도를 걷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결혼 전에 내연녀에게 아내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는 말을 배설하듯 내뱉는 남자.
심장은 거칠게 두근거렸고, 속이 메스꺼워서 구토가 일 것만 같았다.
보폭이 넓고, 걷는 속도가 빠른 그가 호텔방 문 앞에 먼저 도착했다. 그는 방문을 열고 서서 인애를 기다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요?”
인애는 방문을 들어서며 그를 흘겨보았다. 발톱과 이빨을 한껏 드러낸 맹수처럼 인애는 여과 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못 할 게 뭐가 있어? 이런 상황인 거 모르고 결혼한 것처럼 말하지 마.”
이번에는 그가 도발적으로 되물었다. 단번에 전세가 역전된 것 같은 기분은 역겨웠다. 그는 인애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지만, 미소의 온도는 차갑기만 했다.
“최소한의 신의나 예의는 있는 사람인 줄 알았죠.”
인애가 남편으로서 그의 불성실을 탓했다. 그러자 그가 호텔방 문을 닫으며 인애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아까 길에서 허리를 당겨 안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공격적인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인애는 그의 위압에 주눅 들지 않으려 턱을 추어올렸다.
그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고요히 속삭였다.
“나한테 없는 걸 바라지마. 응?”
주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여자한테 지키는 건 그럼 뭔데?”
내내 존대를 하던 인애의 말투가 짧아졌다. 그러자 그가 신선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한테 약속했다며? 약속이 곧 신의 아닌가?”
인애는 팔짱을 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눈빛, 목소리, 숨결까지 거칠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호화찬란한 파리 팔라스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서 있는데도, 안락함이나 부드러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처럼 심장이 아슬아슬하게 박동했다.
“그건 신의가 아니라 사랑이겠지.”
내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심장이 뾰족한 바늘 끝을 관통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의 입이 다른 여자를 사랑이라 부르는 소리를 읊조렸을 때, 심장은 뛰기를 포기한 것처럼 침잠했다.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꼭 연인한테 상처받은 것처럼, 엿같은 기분이 될 필요는 없잖아.
서러운 기분이 왈칵 치솟을 것 같아서 인애는 티 나지 않게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