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먼저 8화
인애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켜고 발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바닥에 닿는 구둣발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릴 때마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치솟아 올랐다.
기척을 느꼈는지, 내내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인애를 향했다.
인애는 고개를 한 번 까딱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테이블 옆을 돌더니, 화려한 금장 장식과 민트색 벨벳으로 마감된 의자를 꺼내 주었다.
그는 앉으라며 오른손을 펼쳐 보이고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어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보았던 서슬 퍼런 남자가 아닌, 서교동 골목길에서 보았던 다정하고 근사한 미소를 가진 남자였다.
“고마워요.”
여상한 인사를 건넨 뒤 착석하자,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더욱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그는 가을의 달빛처럼 은은한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오롯이 내리쬐는 눈빛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온몸이 상서로운 기운에 꽁꽁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다. 위협이 담긴 것도 아니었고, 물리적인 강제성을 띤 것도 아닌 그저 눈빛일 뿐인데.
어두운 밤, 둥근 달 주변에 생기는 신비로운 빛인 달무리처럼, 그의 눈동자는 어둡고도 밝았고, 검고도 아름답게 빛났다.
어릴 때부터 그의 눈빛을 마주할 때면, 인애는 뜻 모를 무기력함에 휩싸여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늘 은밀하고도 깊은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고아한 그의 눈빛에 사로잡혀 잠시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귓가 솜털이 올올이 일어날 만큼 잔잔한 목소리로 감미롭게 속삭였다.
“이렇게 살면 돼.”
수학능력시험 고사장에 들어선 긴장감 가득한 수험생을 안심시키듯 다정하지만 단조로운 시험 감독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인애는 의문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아주 간단한 산수 문제를 풀어내는 것처럼 설명했다.
“사람들 보기에 아주 잘 어울리는, 사이좋은 부부인 것처럼 살면 된다고.”
그는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이내 매혹적인 덫 같은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인애는 그의 시선이 움직인 방향을 따라 주변을 훑었다.
이쪽 테이블을 흘끗거리던 여자들의 시선이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 인애의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비소가 어렸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그였다. 190cm에 육박하는 장신, 어릴 적부터 아이스하키, 골프, 수영, 승마 등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 그리고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특출난 얼굴까지.
그를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과거의 인애는 비단 그의 외모에만 끌렸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천지에 귀하고, 고운 것은 죄다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재벌가, 하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럽고 추악한 진창을 구르는 것처럼 지독했다. 위선, 불신, 거짓, 음모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고, 겉으론 우아한 척했지만, 속으론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 진창에서도 고아한 빛을 발하는 사람이 최휘욱이었다. 추악하고 더러운 진흙 속에 빠져 있어도 질퍽질퍽한 비위를 저지르지는 않는 남자, 그의 곁은 뽀얀 빛으로 물들어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아니면 세상이 그를 변하게 했나?
결국, 그도 불순물과 뒤섞여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일까?
“어려울 것 없어. 내가 의자를 빼 줬더니, 네가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한 것처럼. 그렇게.”
결혼에 대한 설명은 간결했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사람들 눈에 사이좋은 부부로 보이면 된다, 이건가요?”
인애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선명하게 되짚어 물었다. 그는 또다시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쉽게 통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는 얼굴인데, 인애는 속이 뒤틀렸다.
“쇼윈도 부부가 되자는 건가요?”
이어진 물음을 내뱉는 목소리가 뜻하지 않게 튀어 올랐다. 흥분한 탓에 잠시 이성을 잃어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에게 내연녀가 있다고는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했어야 했나?
아직 자신이 이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조했다. 또 앞에 앉은 남자만큼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등신 같은 생각을 하며 이 자리에 나온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가 찼다.
내연녀와의 스캔들을 덮고자 결혼을 서두르는 사람인데, 어련하실까.
“그런 과격한 단어 사용은 삼갔으면 좋겠는데.”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답을 해 주자면, 맞아. 방금 말한 그거.”
“결혼은 인륜지대사죠.”
흥분을 가라앉히려 한숨을 한 번 내쉰 인애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조건 맞춰서 하는 결혼이라고 해도, 허투루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이번에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든 허투루 진행되는 건 없을 거야.”
인애는 의문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조차 허투루 짓는 법이 없을 것 같은 남자다. 그의 시선, 어조, 행동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계산된 것처럼 완벽해 보였다.
그러니 결혼식을 허투루 진행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인애가 뜻하는 바와는 다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결혼식은 중림동에 있는 성당에서 혼배 미사로 진행될 거야. 따라서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는 비공개 예식이 될 거고, 혼배 미사 중에 스냅 사진으로 찍은 사진 몇 장을 언론에 보도 자료로 뿌릴 예정이야.”
그는 결혼을 앞두고 설레는 예비 신랑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중요한 업무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건조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갔다.
“신혼집은 얼마 전 이설 건설에서 성수동에 신축한 주상 복합 꼭대기 층이 될 거야. 웨딩드레스, 예물, 신혼여행 같은 건 원하는 대로 해.”
서늘하면서 촉촉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인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는 동생이 동대문에서 웨딩드레스 원단 사업을 해요. 웨딩드레스는 거기에 맡기면 되겠네요.”
잘생긴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명백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원하는 대로 하라면서요?”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재우쳐 물었다. 그러자 그가 일그러졌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되물었다.
“이 결혼이, 장난 같아?”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그의 눈빛과 어조는 꽝꽝 언 빙하를 단번에 가르는 쇄빙선처럼 위협적이었다.
“장난에 인생을 거는 사람도 있을까요?”
인애는 물러서지 않고 그와 맞섰다.
“최고의 결혼으로 보이길 바라는 거죠? 이목이 쏠리고, 세간의 화제가 될 결혼이었으면 하는 거잖아요.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릴 때, 그보다 더 완벽했던 결혼식은 없을 거라는 말이 듣고 싶을 거고요. 누구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이고 싶은 이유도 있을 거고, 대상도 있겠죠. 안 그래요?”
재벌 간의 결혼은 그것만으로도 화제성을 띤다. 그런데 그는 겉치레를 강조하며,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결혼식을 바라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목적 없이 움직이는 일은 없다. 스캔들을 덮기 위해 치르는 완벽한 결혼식이라니, 기가 막혔다.
“그걸 알 만한 사람이 동대문 원단 이야기를 해?”
“자극하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솔직하게 대꾸하자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표정이네요? 그럼, 그쪽이 원하는 바는 충분히 알았으니까,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해 보죠.”
호기로운 목소리를 내뱉고 나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턱 끝을 치켜들고 목을 빳빳이 세우며 당당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심장은 세차게 두방망이질 쳐 댔다.
그는 어디 해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투명한 강화 유리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그의 긴 다리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길게 뻗은 다리,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있는데도 무너지지 않는 고아한 자세, 우아한 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여 마침내 그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직업병인가?”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머무르는 미소는, 또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뭐가요?”
“작품 감상하듯 보는 거 말이야. 직업병인가 싶어서.”
능청스럽게 대꾸한 그가 그윽한 얼그레이 향을 풍기는 미색 찻잔을 집어 들고는 한 모금 머금었다. 인애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하게 구는 사람이 이런 농담을 내뱉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표정이네? 원하는 바를 잊을 만큼 내가 탐나는 작품처럼 생겼나?”
명백한 기 싸움이었다. 그런데 장난기가 어린 그의 매혹적인 표정, 살가운 웃음기를 머금은 눈가, 평소와 다르게 한 톤 올라간 다정한 목소리는 심장을 뒤흔들어 놓을 만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심장이 뛰어 댔지만, 인애는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입을 열었다.
“나랑 결혼하기 전에 그 여자랑은 끝냈으면 좋겠어요.”
다행히 떨리는 심장과는 다르게 이지적이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입가에 머문 장난기 어린 미소는 여전했지만, 눈빛은 어쩐지 점점 냉혹해지는 듯했다.
“싫다면?”
길게 대꾸하기도 싫다는 듯이 성의 없는 되물음이었다.
“최휘욱 씨가 완벽한 결혼식을 원하는 것처럼, 나도 완벽한 결혼을 원하거든요.”
날 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난잡하게 뒤섞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