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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먼저 5화 (5/68)

결혼 먼저 5화

“안녕하셨어요?”

조부는 마른 시선으로 인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깐 눈길을 주기만 할 뿐, 조부가 인애를 오래도록 바라본 적은 없었다. 인애는 초연해지려 애쓰며 조부의 시선을 받아 냈다.

“인애, 잠깐 할아비 좀 보자.”

낮게 읊조린 조부는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조부가 의미 있는 말을 꺼내기도 전인데, 애원하듯 안타까운 목소리를 낸 것은 인애의 모친이었다. 조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인애는 무지근한 시선으로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서 조부를 따라가라며 눈짓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인애는 조부의 서재로 향했다. 흐느끼는 신효의 울음소리가 등 뒤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앉아라.”

조부의 서재에 들어와 본 것은 태어나서 오늘이 처음이었다.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길 거라고 상상했었는데, 조부의 서재는 의외로 모던하고 심플하게 꾸며져 있었다.

유리문이 달린 검은색 장 안에는 색깔별로 정리된 책이 꽂혀 있었고, 검은색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데스크와 가죽 리클라이너 의자는 최소한의 선을 이용한 디자인이었다. 데스크 위에 놓인 조명,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하다못해 문진으로 사용하는 듯 보이는 몽돌까지 전부 검은색이었다.

무채색의 단순한 인테리어 속에서 책을 책등 색깔별로 정리해 놓은 서가는 인애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책의 카테고리를 주제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닌 눈에 들어오는 색감의 이미지에 따라 나눠 놓은 게 흥미로웠다.

“갤러리에서 일한다지?”

책등을 살피던 인애의 시선이 데스크 위로 옮겨 왔다. 인애는 시선을 내리깔았을지언정, 비굴하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네, 갤러리스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 벽에 걸린 그림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긴장감 가득한 인애의 시선이 조부가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였다. 갤러리스트로 일한다 하더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을 다 깨우칠 수는 없다. 그러니 조부의 질문에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었다.

다행히 시선 끝에 걸린 그림을 마주하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사현파진백만대병도입니다.”

8폭 병풍에 그린 그림을 축소 모사 한 그림이 벽 한쪽에 걸려 있었다. 인애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작자 미상의 그림으로 숙종의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가 실려 있습니다.”

“전진의 왕 부견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 정벌에 나섰다가, 8만의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는 그림이지.”

조부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뜸을 들였다.

“부견이 그리 못난 왕은 아닌데, 참 볼썽사납게 그려 놨지? 나는 평생 백만 대군을 물리친 동진의 사현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쫓기듯 물러나는 부견이 될까 봐 두렵구나.”

속내를 드러내는 조부의 마른 눈가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인애는 잠자코 조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감히 첨언을 할 수 없는 분위기다.

이제껏 기업을 이끌어 온 조부의 업적은 존경받아 마땅한 정도였다. 정치권과의 유착이나, 불법적인 거래 없이 바른 경영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 온 조부였다. 신의를 우선시했고, 사람을 중요시했다.

조부가 귀애했던 신효가 휘욱과의 정혼을 약속할 수 있었던 것과 인애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성질은 다르지만, 조부의 가치관과 궤를 같이하는 것들이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이복형제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큰할머니께서 큰아버지를 출산하다가 돌아가셨고, 이후 십수 년을 홀로 지내시던 조부가 고심 끝에 큰아버지를 위해 재혼하셨다고.

어릴 때는 그래도 사이가 좋았던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조부께서 후계 구도를 정리하던 때부터였다고 했다. 조부는 두 아들의 건설적인 경쟁을 바랐지만, 큰아버지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배다른 형제인 아버지를 완전한 적으로 간주해 버렸다.

하나밖에 없는 형을 잃기 싫었던 아버지는 회사에는 뜻이 없다며 학계에 남아 교수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아버지가 진로를 확고히 정했을 때는 이미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회복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조부의 얼굴에 회한이 묻어났다. 조부는 미풍 같은 한숨을 몰아쉬고는 그림 한 점을 인애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 역시 원본이 아닌 축소 인쇄 된 그림이었다.

“무슨 그림인지 알아보겠느냐?”

“이건李健이 그린 연화백로도입니다. 이 그림 역시 숙종의 어제가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

인애의 실력을 시험하려 묻는 말이 아니라는 듯 조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다정했다. 인애는 알고 있는 바를 차근차근 되짚으며 대꾸했다.

“그림을 즐기고, 뛰어난 그림을 모으는 일이 취미가 되었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조부는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뛰어난 그림만큼이나 주변에 두면 이로운 것이 뛰어난 사람이다.”

조부의 남다른 인재 경영 가치관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기업 경영 가치관을 손녀에게 설명하고자 18세기에 그려진 그림을 꺼내 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논하며 잠시 풀어졌던 긴장이 바짝 조여 왔다.

“휘욱이 녀석, 아깝구나.”

조부가 내뱉은 이름의 존재감이 생경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은 탓에 안구가 뻑뻑하게 말라 버렸고, 목구멍도 타들어 갈 듯했다.

“이설 최 회장 보기도 면구스럽고 말이다.”

심장이 불안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그 자리에 가 다오.”

시공간이 멈춘 듯 인애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숨을 내뱉는 방법도 잊은 것처럼 호흡도 멈추고 조부를 응시했다.

“신효가 고집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집안끼리 정혼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내 뜻하는 바가 있어서 신효랑 휘욱이를 짝지어 주려고 했는데……. 어차피 집안끼리의 정혼이니 상대가 바뀐다고 한들 이설에서는 트집 잡을 일 없을 게다.”

“할아버지, 그래도 신효 언니의 정혼자였던 사람과 결혼하는 건.”

내내 자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림을 보는 눈은 가졌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없는 게냐? 내 너를 과대평가했구나.”

차갑게 내뱉은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응도 없었다.

“네 아비는 평생을 그림자 뒤에 숨어서 살았다. 네 어미는 평생을 그런 지아비와 산 것이지. 너는 부모를 따라 숨은 게냐, 아니면 도망간 게냐?”

어쩌면 도망친 것인지도 모른다. 재벌가에서 태어났지만,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배경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부의 차선이 아닌 길을 달리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인애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는지도.

그런데 조부는 부딪쳐 보지도 않고 자유를 빙자해 속한 세계에서 도망친 인애의 선택을 비난하는 것처럼 물었다. 가슴속에 있는 발작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숨은 것도 아니고요.”

“그럼 어디 증명해 보지 그러니?”

조부가 입가를 끌어 올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제가 증명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혹은 제가 증명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자신이 휘욱과 결혼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는 거냐고 물었다. 또 휘욱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들, 달라질 게 있느냐고 물었다.

“네 부모의 처지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

인애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비겁하시네요.”

겁도 없이 조부를 폄훼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들의 선택은 존중하지만, 조부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부가 원한 것은 잘난 두 아들의 건설적인 경쟁이었는데, 차남은 시작도 전에 기권해 버렸으니까.

“그래도 할 수 없구나. 내가 못 한 일을 네가 해 준다면.”

역정을 낼 줄 알았는데, 조부는 회한 섞인 대꾸를 내놓았다.

인애는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마주 앉은 조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명례 그룹 총수인 윤명견 회장이 아닌, 차남 내외의 안위를 걱정하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내가 천년만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뜨고 나면, 네 부모가 어떻게 살게 될지 생각해 보거라.”

“만약 예정되었던 결혼을 그대로 진행했다면요? 그럼, 저는 제 부모를 지키지 못한 불효자가 되었던 건가요?”

조부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그때는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

“그 방법이 왜 지금은 통하지 않는 건데요?”

“이설과의 신의를 지켜야 하고, 휘욱이도 놓치고 싶지 않구나. 그리고.”

조부가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구나.”

인애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결혼을 통해 제가 얻는 건, 부모님의 안위뿐인 건가요?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가는 심청이도 아니고, 전래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십수 년 동안 사촌 언니의 정혼자였던 사람한테 시집가면서요? 그 사람.”

살림을 차렸다는 말은 어쩐지 저속하게 느껴져서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조부가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휘욱과의 결혼은 거스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명례 재단 너에게 주마.”

인애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조부는 거래를 제안했다. 오래도록 예술계에 몸담은 어머니도 차지하지 못한 자리를 고작 스물일곱인 인애에게 주겠다고 했다.

“이 정도면 할 만한 거래 아니냐?”

갑자기 평생을 눈치 보고 산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선연했다. 재단 경영이라면 엄마가 훨씬 탁월하게 수행할 것이다.

그 자리를 엄마에게 드리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그로 인해 큰아버지 내외에게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엄마는 큰어머니의 호된 시집살이를 지금까지도 견뎌 내는 중이었다.

“더 주세요. 그 누구도 저랑 제 부모님 우습게 보지 못할 만큼 많이.”

큰아버지 내외와 신효뿐 아니라 그 누구도.

신효를 대신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남자에게 시집가야 하는 자신을 무시 못 할 만큼 많은 것을 손에 넣지 않는 이상, 호락호락하게 식장으로 끌려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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