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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먼저 3화 (3/68)

결혼 먼저 3화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윤 교수가 황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검은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식당 앞 모퉁이에서 마주친 여자의 눈빛과 지나치게 닮은 모습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윤인애 양과의 결혼을 원합니다.”

“없었던 일로 하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휘욱이 아니었다. 휘욱은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윤 교수가 헐벗은 상태로 강남 모처의 모텔 침대에서 여자와 함께 누워 있는 사진이었다.

테이블 위에 오른 사진을 곁눈질로 보던 윤 교수의 눈빛에 공포감이 어리는가 싶더니,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설마 자넨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한 작자가?”

얼마 전부터 윤 교수는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 그 당사자가 휘욱이냐고 묻는 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휘욱은 범인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 사진을 언론사에 넘기려고 한 놈을 잡았을 뿐입니다.”

윤 교수의 안색은 이미 희게 질려 있었다.

“이걸 언론사에 제보하려고 했다고?”

“모자이크 처리 된 사진을 언론사에 먼저 흘린 뒤, 모 대학 교수의 사진이라는 기사를 게재해 윤 교수님을 겁박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한숨을 내쉬는 윤 교수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아마 이건 시작에 불과할 겁니다.”

이어진 휘욱의 말에 윤 교수는 허망한 얼굴을 했다.

“내 평생 이런 일은……. 이날도, 이건.”

“압니다. 명례 건설 관계자와 이설 건설 관계자를 함께 만나는 자리였다고 들었습니다. 깨어나시고 보니, 모텔 침대 위였겠죠.”

윤 교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휘욱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닙니다. 이설 건설은 제 큰아버지인 최태진 부회장의 큰아들이 사장으로 있는 곳입니다. 제가 그쪽에 우호적일 리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을 전달하는 휘욱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명료했다.

“그건 내 알고 있다만, 그래도 핏줄 아닌가.”

휘욱은 비소를 머금지 않으려 노력하며 되물었다.

“명례 건설의 사장직은 윤 교수님의 조카가 맡고 있지 않습니까?”

윤 교수를 함정에 빠뜨린 사람도 핏줄이 아니냐는 의미였다.

“하아, 자네 정말.”

짙은 한숨을 내쉰 윤 교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사진은 시작에 불과할 겁니다. 이것부터 보시죠.”

휘욱은 태블릿 PC 화면을 켜고, 암호화된 보안 문서를 실행한 다음 윤 교수에게 건넸다. 윤 교수는 피로한 눈빛으로 문서를 훑기 시작했다. 안쓰러운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국가로부터 지원받은 연구 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금융 기록이지만, 보시다시피 감쪽같습니다. 수사가 시작되면 검찰에서 가족들의 금융 기록까지 전부 조사할 겁니다.”

“아니, 이건 아니지 않은가?”

“수년 전 진행된 명례 그룹의 병원 건설 건과 관련하여서는, 윤 교수님께서 압력을 넣어 부실 공사를 했다는 증거 자료도 있습니다. 모두 허위 자료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탓에 검찰에서도 거짓 자료라는 것을 밝혀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윤 교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자네는 이걸 어떻게 얻었나?”

“이설 건설 임원진 중에 제 사람이 있습니다.”

휘욱이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바닥 생리를 잘 아는 윤 교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자네가 날 도와서 얻는 게 뭔가?”

스산한 목소리로 되묻는 윤 교수의 어조에서 휘욱은 거래가 거의 성사되었음을 감지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따님인 윤인애 양과의 결혼입니다.”

“자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딸에 대한 윤 교수의 각별한 애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같은 편이 되려면 뼛속 깊이 동류의식이 박힌 사이이거나, 아킬레스건을 쥔 사이여야 한다. 갑자기 없던 동류의식이 생길 리는 없고, 휘욱은 윤 교수의 아킬레스건을 잡는 방법을 택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윤 교수의 아킬레스건은 가족이었다.

“진심입니다.”

윤 교수는 허망한 얼굴로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선택은 윤 교수님이 하시면 됩니다. 허위 스캔들과 비리는 제가 막겠습니다. 대신 저는 윤 교수님의 사위가 되는 겁니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휘욱은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포토 라인에 서시게 될 겁니다.”

윤 교수는 돈보다 명예를 중시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내와 하나뿐인 딸을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사진이 공개되면 아내의 신의를 저버린 남편이 될 것이고, 비리가 공개되면 불명예 퇴진은 물론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할 것이다.

“제 큰아버지인 최태진 부회장과 윤 교수님의 맏형인 윤동근 부회장은 포토 라인에 서신 윤 교수님이 죄를 인정하게 만들 겁니다.”

이미 검찰 수뇌부에까지 그들의 힘이 닿아 있었다. 두 사람의 협공이라면 윤 교수 하나쯤 없애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대체 우리 인애랑 결혼해서 자네가 얻는 것이 뭔가?”

윤 교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는 윤 교수님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원합니다.”

뜻밖이라는 듯이 윤 교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연대를 저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저는 앞으로 최태진 부회장과 맞설 생각입니다. 그런데 저 혼자 싸우기에는 힘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윤 교수님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네는 권력을 얻고, 나는 내 자리를 지키고?”

윤 교수가 씁쓸한 어조로 물었다.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는 하나, 윤 교수 역시 재벌가의 사람이었다.

“명례 그룹 내에서 윤동근 부회장을 견제할 세력으로 윤 교수님이 꾸준히 거론되는 것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주식을 보유하신 것도 사실이고요. 명례 건설의 사외 기술 고문을 비롯한 명례 산업 개발의 사외 이사직도 맡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나는 경영 일선에 나설 생각이 없네.”

“이젠 그럴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휘욱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경영 일선에 나서시기 전에 저들이 먼저 움직여 공격을 해 왔습니다. 평생을 윤동근 부회장의 그림자처럼 사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십니까?”

윤 교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윤 교수님을 무너뜨리는 데 실패한다면 그다음 차례는 누가 될 것 같습니까?”

낯빛이 어두워진 윤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 생활은 2년간만 유지하겠습니다. 허울뿐인 결혼이 될 겁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명례 그룹 부회장직이 바뀌어 있을 것 같습니다.”

휘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자, 윤 교수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근데 자네는 신효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지 않은가?”

윤동근 부회장의 딸인 신효와 정혼이 이루어진 것은 수년 전의 일이다. 신효가 윤 회장에게 조르고 졸라서 이루어진 정혼이었다. 당사자인 휘욱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정혼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휘욱은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었다. 최태진 부회장이 휘욱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윤동근 부회장을 향하는 거나 다름없는 신기한 구조였다.

“신효와 결혼하는 편이 자네가 얻을 게 더 많지 않겠는가?”

윤 교수의 낯빛에 진심 어린 의문이 떠올라서 휘욱은 기분이 슬쩍 상하고 말았다.

“그렇게 과소평가될 만큼 윤 교수님께는 제 저력을 보여 드릴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대꾸하자, 윤 교수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생을 윤 부회장에게 맞서지 않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도 같았다.

“제가 신효와 결혼한다면 아마 평생을 이설 자동차 사장으로만 살아야 할 겁니다. 윤 부회장의 사위가 되었으니, 저를 쫓아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다만?”

윤 교수는 스산한 어조로 되물었다.

“윤 부회장의 친우인 큰아버지에게 대들 수 없으니, 더 높이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할 겁니다. 물론 큰아버지는 제가 더 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테고요. 하지만 친우의 사위이니 깎아내리지는 못하시겠죠.”

“그래서 자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뭔가?”

휘욱은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맑은 시선으로 윤 교수를 응시했다. 윤 교수 역시 진중한 눈빛으로 휘욱을 바라보았다.

“저는 기업 경영의 정상화를 원합니다.”

윤 교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헛웃음을 지었다. 지나치게 선량한 기업가 정신이었다.

“그럼 지금은 두 회사가 비정상이란 말인가?”

“이설 그룹에서는 제가, 명례 그룹에서는 윤 교수님이 경영의 정상화를 위해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공리주의적 견해에 심취한 이들이 기업의 최고 통수권자가 됐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무분별한 대량 감원, 비정규직 양산 등 사회 병폐의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비정상 맞습니다.”

휘욱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고 사회적 책임만을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 경영의 목표는 이윤 추구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불법적이고, 경영자 개인의 영리를 위해 일부가 착취당하는 구조라면 비정상 맞습니다.”

윤 교수는 조금 전 헛웃음을 내비쳤을 때와는 다르게 진중한 눈빛으로 휘욱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효나 윤 부회장 쪽에서 파혼을 받아들이고, 인애와 결혼하는 걸 잠자코 지켜본다는 게 말이 되나?”

맹점을 집어내는 윤 교수는 이미 휘욱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 신효가 먼저 결혼할 수 없다고 나올 겁니다. 윤 교수님의 부친이신 윤 회장님께서는.”

“아마도 내 딸 인애를 그 자리에 대신 세우려고 하시겠지. 최 회장님과 집안끼리 약조한 사항을 지키고, 이익을 도모하려면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실 걸세.”

“따님 털끝 하나 건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윤 교수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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