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모든 것이 꿈일까 봐
1개월 후.
리아가 왕성에 머무른 지도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며칠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정은 기약 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제법 왕실 생활이 익숙해진 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두드리며 무릎 위에 올려놨던 책을 내려놓은 뒤 소파에서 일어났다. 벌써 몇 시간째 한자리에 앉아 책을 읽다 보니 눈이 뻐근하고 허리가 아파 왔다.
-엘리시아 역사의 기록
지난 며칠간 리아가 읽던 책이었다. 바벨로프의 반역이 수포가 되고 첫 일주일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가 그동안 저질러 놓았던 일들을 수습하고 엉망이 된 왕성을 보수하고 반역자들을 처벌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은 넘쳐났다.
바벨로프는 처형됐다. 반역자의 끝은 죽음밖에 없었다. 제시카는 왕비 작위를 박탈당하고 수도인 르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척박한 땅에 유배되었다. 평생을 저택 안에 갇혀 나올 수 없는 벌을 받았다.
던컨이 어떤 마음으로 제시카를 살려 두었는지 리아는 알 것도 같았다. 모두가 제시카의 처형을 원했지만 리아는 아니었다. 유배된 제시카는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총사령관이었던 피어스와 함께 도망친 백여 명의 병사들은 모두 실종됐다. 그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리아는 걱정하지 않았다.
발레포르가 깨끗하게 해결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발레포르가 사라진 이유를 전해 들은 리아는 그의 등짝을 한 대 때려 준 뒤 용서했다.
라이언은 바빴다. 왕인 던컨보다도 할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물론 그보다 더 바쁜 사람은 매튜였지만.
엘리시아의 왕실이 제자리를 찾아갈 동안 리아가 한 일은 엄마를 잃은 앤 공주를 돌보는 것이었다.
앤은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아직 4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그날 밤 제시카가 앤을 안고 있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지만 아이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리아는 밤이 되면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발버둥 치고 우는 아이를 안아 주었다. 그녀 말고도 앤을 돌봐 줄 사람은 많았지만 직접 하고 싶었다. 여리고 가여운 아이를 달래 주고 싶었다.
던컨은 앤을 돌봐 주는 리아에게 늘 고마워했다.
아무도 안아 주지 않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리아는 앤에게 넘치는 사랑을 줬다. 앤의 불안한 정서가 안정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왕성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리아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나라가 궁금해졌다.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감정이었다.
궁금증이 깊어지자 리아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엘리시아에 관련된 책이라면 전부 다.
그런 리아에게 던컨은 왕실의 역사가 기록된 책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리아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리아는 벨로트와 앤의 결혼에 대한 기록을 읽고 또 읽었다. 첫째 아이로 던컨을 낳고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기록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왕비 앤의 죽음도 사산된 둘째 아이가 딸이라는 것도.
리아는 던컨이 발레포르를 통해 모든 진실을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사람인지를 전부.
하지만 던컨도 리아도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조금 어색하고 조금 친밀한 어딘가 이상하고도 묘한 관계로 지낼 뿐이었다.
리아는 그 관계가 마음에 들었다. 던컨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는 리아면서도 레오니였고 그건 평생 변하지 않을 거였다.
“레오니!”
앙증맞은 목소리가 리아의 정신을 깨웠다. 앤이었다. 요즘 앤은 그녀를 레오니라 부르고 있었다. 이제 익숙한 이름이었다.
리아는 더 이상 레오니라 불리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녀를 리아라고 불러 주는 사람은 라이언 한 명으로 족했다.
“우리 예쁜 아기 공주님 어딜 다녀오셨나요?”
발그레한 볼이 귀여웠다. 리아는 앤의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양이!”
“응?”
“고양이가 아기를 낳았어요.”
얼마 전 왕성에 갑자기 쥐가 들끓었다. 놀란 시종들은 고양이를 여러 마리 풀어 두었고 그중 한 마리가 새끼를 낳은 모양이었다. 리아는 나쁜 놈들을 몽땅 쥐로 만들어 버리겠다던 발레포르를 떠올렸다. 설마 진짜 그랬을 리 없겠지.
“이제 쥐가 없어져서 배가 고픈가 봐. 엄청 울어요.”
앤은 비밀이라도 되는 듯 고양이가 운다는 말을 작게 속삭였다. 아기 고양이가 쥐를 잡을 일은 없겠지만 리아는 앤이 귀여워 맞장구를 쳐 주었다.
“큰일이네. 너무 배가 고프겠다. 우리가 우유라도 줘야 할까?”
앤은 한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 고양이를 직접 만져 보고 싶었지만 유모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심술이 났는데 직접 고양이에게 우유를 줄 수 있다면 몰래 만져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메리!”
리아는 습관처럼 메리를 불렀다가 이내 그녀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메리는 어제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갔다. 더는 장미 비누 사업을 미뤄둘 수 없는 탓이었다.
라이언을 두고 떠날 수 없는 리아는 지난 한 달간 메리에게 비누에 관련된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이제 메리는 리아보다 더 전문가였다.
“메리가 없다는 걸 깜빡했네.”
리아는 다시 시녀를 부르려다가 그냥 앤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나가 보자.”
리아는 소파 위에 내려놓은 책을 돌아보았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뒷장을 떠올리며 리아는 던컨에게 책을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비어 있는 그곳이 채워지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멈춰 있는 던컨의 시계가 움직이길 바랐다.
그의 사랑스러운 딸 앤의 출생이 기록되기를. 리아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미소가 가득했다.
***
푹신한 침대가 출렁이며 흔들렸다. 설핏 잠이 들었던 리아는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떴다.
“왔어요?”
이마에 닿은 그의 손이 좋아서 리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보드랍게 이마를 쓸어내리며 콧잔등을 타고 내려온 온기는 그녀의 입술에서 멈췄다.
“나 때문에 깼군.”
“그러니까 일찍 좀 와요. 한밤중에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들어오지 말고.”
리아의 투덜거림에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도둑고양이?”
검은 사자 라이언에게 도둑고양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리아가 유일했다. 그는 리아의 어깨 뒤로 손을 집어넣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리아는 라이언의 가슴을 파고들며 그의 체향을 가득 삼켰다.
“메리에게 편지가 왔어요.”
“그래?”
라이언이 리아의 정수리에 키스를 하며 대답했다.
“레몬이 가득 열렸대요.”
베드포드 성에서 리아가 종종 타 주었던 새콤한 레몬차를 떠올리니 침이 고였다. 라이언은 리아의 얼굴을 들어 올려 곧바로 입을 맞췄다.
촉촉한 입술을 빨아들이며 잇새를 가르자 레몬보다 더 상큼하고 달큰한 리아의 혀가 그를 맞이했다.
금방 열기가 피어올랐다. 보드라운 리아의 몸이 그의 품 안에서 아찔하게 움직였다. 습관처럼 리아의 손가락이 라이언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레몬차를 마시러 가자.”
입안에서 웅얼대는 라이언의 말에 리아가 황급히 몸을 떼어내고는 그의 눈을 쳐다봤다.
“어디로요?”
동그랗게 뜬 눈을 바라보며 라이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벌써 왕성에 머무른 지 1년째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왕실은 안정되었고 던컨 또한 평온했다. 그가 늘 함께 있지 않아도 모든 것이 평탄할 것이었다.
라이언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물론 앞으로도 1년에 몇 개월은 왕성에서 머물러야 하겠지만.
“우리 집으로.”
그는 리아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왕성의 생활은 화려하고 즐거웠지만 그녀는 늘 베드포드 성을 그리워했다.
“라이언. 난 괜찮아요. 여기 생활도 익숙해졌고….”
그건 사실이었다. 베드포드 성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몇 달뿐이었다. 그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이곳 왕성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허전했다.
“내가 가고 싶어.”
라이언이 리아의 콧잔등을 문지르며 투정을 부렸다.
“이곳은 너무 바빠. 내가 지쳤어.”
그 정도로 라이언이 지쳤을 리는 없지만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투정에 리아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요즘 들어 더 베드포드 성이 그리운 참이었다. 메리에게서 레몬이 가득 열렸다는 편지를 받고 나서는 더 그랬다.
베드포드 성의 정원이 그리웠고 라이언과 함께 거닐었던 장미 넝쿨이 그리웠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길지도 않은데 어째서일까?
“우리 도망치자.”
라이언이 자신의 코로 그녀의 콧잔등을 비볐다. 리아는 키득 하고 웃음이 났다. 도망치자니.
“당신 오빠는 독재자가 될 기질이 다분하더군. 일을 시키지 못해 안달이야.”
던컨은 깨어나서 다시 잠들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원래 왕의 자리가 그렇다지만 그는 더했다. 덕분에 그와 함께하는 신하들 역시도 쉴 수가 없었다.
“좋아요. 언제 갈까요?”
“내일.”
“당장 내일이요?”
라이언이 이마를 마주 대며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살짝 빨았다.
“그래. 당장 내일.”
황당해하는 리아의 모습을 보니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자신을 대신해서 매튜를 남겨 두기로 했으며 봄과 가을 두 달씩 왕성에서 머무르는 조건으로.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아무도 몰래 도망치는 거야.”
“던컨이 허락했군요?”
역시나 리아는 눈치가 빨랐다. 그냥 막무가내로 도망칠 라이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헛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라이언이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내일 당장 떠나겠다는 말도 진실일 것이다.
“그도 이제 혼자가 익숙해져야지.”
“좋아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레몬이 다 떨어지기 전에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가 레몬차를 잔뜩 만드리라.
이번에는 리아가 먼저였다. 깨끗하게 면도한 라이언의 턱을 문지르며 그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라이언은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늘 리아를 위해 면도를 했다. 그녀는 그런 그가 좋았다. 사소한 것 하나도 맞춰 주고 잊지 않는 그의 마음이 좋았다.
“설마 거기서 멈추는 건 아니겠지?”
감질나는 목소리로 라이언이 리아의 얼굴을 위로 끌어당겨 자신의 입술 위에 그녀의 입술을 올려놓았다.
“그럴 리가.”
리아가 입을 벌리자 뜨거운 숨결이 보드랍게 밀려들었다. 그와 침대에 누워 그의 온기를 느끼며 키스하는 이 순간이 너무 짜릿하고 행복해서 숨이 막혔다. 정신없이 그에게 빨려들며 리아는 눈을 감았다.
‘우리 집으로.’
아마도 평생 그 말을 기억할 것이다. 속상한 일이 생길 때면 오늘을 기억하며 다시 힘을 내겠지.
‘이제 내가 이쁜이 널 좋은 곳으로 보내 줄게.’
‘넌 원래 네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야.’
‘행복하지 않니?’
행복해. 모든 것이 꿈일까 봐 두려울 정도로. 고마워 발레포르.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줘서.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