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살아 있다는 것
라이언은 틈을 노리는 중이었다. 자신을 인질로 받아 준 것은 바벨로프의 실수였다. 나머지 사람들을 물러서게 한 것도.
아무래도 그는 초조함에 판단력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뒤에서 무슨 짓을 꾸밀 줄 알고 모두를 보내 주다니.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눈앞에 두고 지켜봤어야 했다.
바벨로프에게는 최악의 선택이었지만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돌아갔다.
팔을 묶은 밧줄은 풀어 버린 지 오래였지만 모른 척 잡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가는 자신보다는 리아가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녀의 목과 얼굴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라이언은 마음이 아팠다.
가늘게 떨리는 볼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겨 주고 번진 핏자국을 닦아 주고 싶었다.
바벨로프는 상처까지 내며 애써 벗겨냈던 천을 라이언의 얼굴만 확인시켜 준 뒤 다시 묶었다. 처음부터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리아에게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그보다 더 끔찍한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경고였다.
리아의 눈동자를 본 순간 라이언은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자신이 괜찮은지를 알리려고 하는지도.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인다. 반드시. 라이언의 턱은 분노로 굳어갔다.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은 총 15명이었다. 시간을 주지 말고 일격에 격파해야 했다.
라이언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렸다. 어차피 자신이 달려갔어도 일은 벌어졌을 것이다.
제임스가 탑에 도착하기도 전에 리아는 잡혀갔다. 공격을 알아채자마자 저들이 한 일은 리아를 잡아 두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도 저열한 놈.
지켜 주지 못했다는, 구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몰려올 때마다 라이언은 묶인 손의 밧줄을 끊어질 듯 세게 잡았다.
벌써 회의실에 갇히다시피 남겨진 귀족들은 잡혔을 것이다. 자신들이 어떠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리라. 반역자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라이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른 채 바벨로프는 성문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주위를 살펴.”
바벨로프는 경계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몸을 떠는 게 훤히 보였다. 라이언은 그가 주위를 연신 돌아보고 초조해하는 모습이 제법 맘에 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가까운 남쪽 성문으로 탈출하기로 한 것도.
바벨로프는 펜대를 굴리며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잘하지만 실전 싸움을 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물론 평생을 고위 귀족으로 살아온 그가 전투를 배워야 할 일도 없었겠지만.
성문 밖의 총사령관 피어스는 지금쯤이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남쪽 성문은 지나기 위해서는 양옆으로 이어진 두 개의 건물 사이를 지나야만 했다. 가장 출입이 많은 곳이기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고지가 코앞인데, 저 앞에 자신들의 편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걸음을 멈춰 선 것을 보니 싸움은 할 줄 모르지만 감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인가.
사방은 조용했고, 어두웠다. 바벨로프의 명령에 병사들은 움직였다. 라이언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가 주변을 살폈다.
라이언은 자신의 목젖 바로 앞에서 당장이라도 찔러올 듯 날을 번쩍이는 검을 쳐다보았다. 병사의 손에 잡혀 보이지는 않지만, 손잡이는 송곳니를 번쩍이는 사자가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겠지.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악연은 악연이었다. 이 밤이 마지막이 되어야 할 악연.
“아무런 기척도 없습니다.”
“불은 왜 다 꺼졌지?”
“전투 중에 꺼진 모양입니다. 적들이 침입해 올 때 성벽의 불을 모두 껐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적이라는 말에 피식하고 작은 비웃음이 라이언의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누가 누구에게 적이라 칭하는 것인가. 침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그럼 앞으로 전진하겠습니다.”
바벨로프의 두려움을 느낀 모양인지 병사들은 이전보다 조금 더 사방으로 퍼져 주위를 경계하며 움직였다.
라이언은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었다. 단 한 번의 기회. 검은 기사단은 이때를 기다리며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바벨로프.”
막 다시 걸음을 움직이려는 바벨로프를 라이언이 불러 세웠다. 옆에 선 리아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말라고 다정한 말을 쏟아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는 돌아섰다.
분명 입을 틀어막았는데 어떻게 말을 하는 것이지? 놀란 바벨로프의 얼굴이 보였다.
피익-
예민한 라이언의 청각에 활 사위를 당기는 아주 작은 기척이 잡혔다.
마지막 공격의 순간이 드디어 왔다.
건물과 성벽, 사방 여러 곳에서 정확하게 병사들을 향해 겨눠진 화살촉. 무조건 심장을 꿰뚫어야만 했다.
라이언은 바벨로프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쏘아진 화살.
놀란 병사가 휘두른 검이 목을 베기 직전에 라이언이 몸을 뒤로 빼며 리아를 끌어안고는 병사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진작에 풀어 버린 밧줄이었기에 몸을 움직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방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단 한 발의 화살에 심장이 멈춘 병사들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무너졌다. 라이언은 리아의 어깨를 자신의 품 안으로 잡아당기며 금방 걷어찬 병사의 손에서 모엘르 검을 집어 들고는 그의 목을 주저 없이 베었다.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 성문은 닫혔다. 갑자기 닫힌 성문에 밖의 적들이 동요했다. 성벽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기사단원들은 그런 그들을 향해 수백 개의 화살을 쏘아 올렸다
허무하게도 바벨로프의 탈출계획이 무너진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심장에 화살이 박혔음에도 꿈틀대며 검을 휘두르는 병사들은 모두 목이 잘렸다.
굳어 버린 바벨로프의 눈앞에 검을 들이댄 것은 던컨이었다.
라이언은 리아 몸을 옭아매고 있던 모든 것을 풀어 주었다. 놀란 그녀의 귓가에 다 끝났다고 속삭이며 입을 가져다 댔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한 명도 남김없이 쓰러진 적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것은 라이언과 리아뿐이었다.
바벨로프는 상황파악을 다 하지도 못한 채 무릎이 꿇렸다. 이마 한가운데에 던컨이 겨눈 검 끝이 닿은 채로.
“라이언.”
“리아.”
“미쳤어요? 당신 다쳤잖아.”
라이언의 품을 빠져나오며 리아가 그의 어깨를 살폈다. 병사를 걷어차기 전 그가 본능적으로 휘두른 검에 어깨를 베인 모양이었다.
“난 괜찮아.”
상처가 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리아가 힘이 빠진 듯 비틀댔다. 라이언은 그런 리아를 다시 품에 안았다.
따스한 리아의 체온이 온몸에 마주 닿자 그제야 그녀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
통이 트기 전에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피어스는 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도망쳤지만, 주인을 잃은 개였다. 그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더는 명령을 내려 줄 사람도 없었다.
바벨로프의 팔과 다리에는 쇠로 만든 족쇄가 채워졌다. 그와 반역을 모의한 귀족들은 지하감옥에 갇혔다.
던컨은 달라졌다. 언제나 나른했던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불타 버린 아델궁을 뒤로 한 채 리아는 샤르트 궁 침실 하나를 차지하고 누웠다.
괜찮다고 버텼지만, 라이언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본 순간 순순히 침대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라이언도 함께였다. 그는 무서우니 곁에 있어 달라는 리아의 속삭임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한 건 나야.”
“내가 오자고 했잖아요.”
지난 며칠간의 끔찍했던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리아가 눈을 깜빡이며 라이언의 품을 파고들었다.
“저자들이 살아 있다면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지.”
라이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리아는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순간순간이 두려웠다.
라이언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될까 봐 무서웠다. 이미 한번 겪어 본 죽음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이제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가만 안 둘 거에요.”
“응?”
“발레포르 이 악마 놈! 하필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리다니.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갑자기 성질이 나는지 리아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라이언은 그런 리아의 볼에 입을 맞췄다.
“다시 돌아올 거야.”
“벌써 왔어요. 내가 무서워서 곁에 오지 못할 뿐이지.”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을 때 발레포르는 나타났다. 잔뜩 기죽은 모습에 리아는 그를 혼내지 못했다. 다만 용서받고 싶으면 도망친 놈들 다 잡아내라고 닦달을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라지는 순간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것을 본 것도 같지만 리아는 모른 척해 줬다.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알고 있기에. 그렇지만 문득문득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진짜 창피했다고요. 허풍 잔뜩 떨었는데 그 허풍이 단번에 들켜 버렸다고 생각해 봐요.”
“귀여웠겠네.”
“라이언!”
라이언은 품 안에서 투덜대며 꼼지락대는 리아를 보며 행복했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한 일이란 것을 이제야 알았다.
“정말 괜찮아요?”
“응?”
“모엘르 검 말이에요.”
라이언은 모엘르 검으로 병사를 베어 버리고 난 뒤 더는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가차 없이 검을 집어던졌다.
쓰러진 병사들과 화살 더미, 병장기 사이로 그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그 검이 나뒹굴었다.
“더는 필요치 않아.”
라이언의 얼굴은 평온했다. 리아는 손끝으로 그의 흉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가 아프지 않기를, 괴로워하지 않기를 빌며.
라이언은 검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리아를 품에 안은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흉터는 흉터일 뿐이다. 검을 다시 본 순간 느껴졌던 고통은 착각이었다. 검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고통은 마음에서 왔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니 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뭐 그래도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제가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응?”
리아는 라이언이 집어던진 모엘르 검의 뒤처리를 제임스에게 맡겼다. 아주 가루가 될 때까지 깨부숴서 똥통에 집어넣으라는 리아의 말에 황당해하던 제임스의 얼굴은 제법 웃겼다.
“내가 평생 만져 줄게요.”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만 있다면, 평생 그녀가 함께해 준다면 아픔도 기쁨이 될 것이다.
그들은 당분간 왕성에 머물기로 했다. 당장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던컨을 혼자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아직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반역자들을 처벌해야 했고 무너진 왕실의 군대를 재건해야 했다. 무슨 일이든 뒤처리가 가장 힘든 법이었다.
리아 역시도 할 일이 있었다. 불타 버린 아델궁 위에 추모관을 지을 생각이었다. 자신은 레오니가 아니었지만 레오니이기도 했다.
레오니의 몸으로 그녀의 몫까지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당신에게서 장미 향이 나요.”
마치 처음 입을 맞췄던 그날처럼.
리아는 라이언의 가슴에 이마를 문질렀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행복하다니. 살아 있다는 것은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