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인질
바벨로프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을 향해 날이 선 수십 개의 검 끝을 마주했다. 코앞에 바로 들이댄 듯 짙은 살기에 온몸이 따끔거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검기. 바벨로프는 허탈하게 웃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난전을 치른 모양인지 사방이 엉망이었고 쓰러진 것은 대부분이 그의 병사였다.
“…한발 늦었군.”
“당장 공작부인을 보내.”
제임스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바벨로프가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제임스의 시선은 거친 병사의 손에 우악스럽게 잡힌 리아에게 가 있었다.
제임스의 목소리에 멈칫한 것은 리아였다. 손이 묶이고 입을 틀어막은 것으로 부족했는지 그들은 두꺼운 천으로 눈까지 가렸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차가운 밤공기가 느껴지기가 무섭게 한발 늦었다는 바벨로프. 그리고 들려온 제임스의 목소리.
리아는 다시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반항에 목덜미를 틀어쥔 손아귀가 더 억세졌다.
바벨로프가 리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윽.”
“가만히 있으세요. 그래야 내가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귓가에 뜨겁고 습한 숨결이 와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리아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바벨로프!”
제임스가 소리쳤다. 바벨로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싱긋 웃더니 리아에게 손을 떼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 발짝 옆으로 빗겨 섰다.
두피의 고통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목젖 부위가 서늘했다.
“당장 그 검을 내려놔!”
또다시 제임스가 소리쳤다. 서늘한 것은 그냥 느낌이 아닌 모양이었다. 리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베드포드 공작이 여기 없다는 게 참 아쉽네. 아마 이 검을 봤다면 참 좋아했을 텐데.”
리아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목에 검이 겨눠져 있으며 그 검은 바로 라이언이 그토록 찾고 싶어 하던 그것이라고.
바벨로프는 그대로 앞으로 한걸음 전진했다. 충실한 병사는 검을 따라 리아의 몸도 앞으로 끌고 나갔다. 움직이면서 몸이 흔들려 검날에 살짝 스쳤는지 리아의 살갗에 피가 맺혔다.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피를 본 검은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그대로 파고들 것만 같은 검날에 제임스와 기사단원들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작부인의 안위였다. 리아의 목숨을 겨누고 있는 검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바벨로프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제임스와 단원들을 보는 것은 무척 맘에 들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열댓 명 정도 되는 병사들과 리아가 전부였다.
“검을 내리고 뒤로 물러서. 당신들이 애타게 원하는 공작부인의 가녀린 목에 검날이 박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모두가 제임스를 쳐다봤다. 이대로 검을 거둬야 할까?
“내가 못할 것 같나? 어차피 죽은 목숨이면 저승길 동무 한 명쯤은 있어도 좋겠지.”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겁을 주듯 검을 살짝 비틀었다. 이번에는 좀 더 깊이 베였는지 리아의 목선을 따라 피가 흘렀다.
바벨로프는 자신이 그저 협박하는 것이 아니란 걸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병사들을 향해 무어라 명령하자 열댓 명 정도 되는 병사들이 호위하듯 그의 주변을 뱅 둘렀다.
제임스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바벨로프를 향해 들이밀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신호로 나머지 기사단원들도 그와 같은 행동을 했다.
바벨로프는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한걸음 옮길 때마다 상대는 한걸음 물러섰다.
그때 두두두두 땅이 울렸다. 바벨로프는 걸음을 멈췄다. 땅이 울리는 저 끝에는 라이언과 던컨이 기사단원들과 정신을 차린 왕실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라이언은 바벨로프의 병사들 틈바구니에서 리아를 발견하고는 숨을 멈췄다. 이럴 수가 그녀는 엉망이었다. 찢기고 더럽혀진 드레스와 산발이 된 머리카락. 얼굴의 반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팔은 뒤로 묶여 있었다.
“무, 무슨 짓이지?”
목이 턱하고 막혔다. 리아를 겨눈 검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목을 꿰뚫어버릴 것처럼 보였다.
“으윽.”
미친 듯 흉터에 통증이 올라왔다. 라이언은 손바닥으로 흉터를 누르며 휘청댔다. 그 검이었다. 바벨로프가 들고 있는 것은, 리아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바로 그 검이었다.
제임스가 급히 라이언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괜찮나?”
라이언이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모엘르 검이 리아의 목에 닿아있는 것을 본 순간부터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으으읍!”
리아가 소리쳤다. 라이언! 물론 울부짖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외침이었다. 오로지 청각에 의지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리아의 귓가에 들려온 라이언의 음성.
그가 왔다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라이언이 왔다. 그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리던 몸이 평온해졌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사라졌다. 무섭지 않았다.
“고딘 빈센트 바벨로프.”
라이언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던컨이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분노한 목소리를 냈다.
바벨로프는 자신의 앞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을 옆으로 비켜 세우고는 던컨과 라이언을 마주봤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당장 그만둬.”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여전히 상황은 바벨로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리아의 목숨이 그의 손아귀에 놓여있으므로.
“뽀얗고 여린 살에 또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군요. 흐르는 피 향기가 너무 짙어서 질식할 지경이 아닙니까. 역시 이런 걸 두고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걸까요?”
바벨로프의 시선이 리아의 몸을 훑어내렸다.
라이언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당장 바벨로프를 때려눕히고 리아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그를 미치게 했다.
섣불리 다가갔다가 궁지에 몰린 바벨로프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리아의 목은 너무도 가늘었고 연약했다. 바벨로프가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당장 그녀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원하는 게 뭐지?”
던컨이 물었다.
“좀 이상하군요. 공주의 목숨을 걱정하십니까?”
“검을 내려놓고 항복하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크하하하하하하.”
바벨로프가 미친 듯이 웃었다. 검을 들고 있는 그의 몸이 흔들리자 상처를 입는 것은 리아였다. 검날이 움직일 때마다 리아의 목은 피로 물들었다.
“제발 그만둬!”
라이언이 절규했다. 이러다 리아가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물러나.”
한참을 낄낄대던 바벨로프가 언제 웃었냐는 듯 굳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주위를 물려. 그럼 검을 똑바로 들고 있을 수 있을 것도 같군.”
“인질을 바꿔.”
라이언이 검집을 통째로 집어 던지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바벨로프는 코웃음을 치고는 검을 움직였다. 관자놀이 근처를 쓱 밀어 올리자 붉은 핏방울이 검 끝을 따라 흘러내렸다. 모두가 두려움에 숨죽였다. 그는 천천히 리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잔인한 방법으로 찢어버렸다.
천이 사라지자 리아는 어둠에서 벗어나려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창백한 라이언의 얼굴이었다.
리아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비록 눈빛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라이언은 알아들었으리라.
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 정도쯤은 아프지도 않은걸요.
“마지막으로 말하지. 공주를 살리고 싶으면 전부 꺼져.”
온몸이 굳은 것처럼 멈춰선 라이언을 대신해 던컨이 명령했다. 후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바벨로프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다시 잡을 수 있지만 리아는 아니다. 지금 무모하게 바벨로프를 공격한다면 그녀는 죽을 것이다.
바벨로프는 자신이 궁지에 몰리면 망설임 없이 리아의 목을 베어내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물러나는 던컨과 병사들을 보면서 바벨로프는 입맛을 다셨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던컨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 잘못된다면 일을 그르치게 될지도 몰랐다.
오직 물러나지 않은 것은 라이언 하나였다.
“왜 남아있는 거지? 정말 인질을 바꾸겠다고?”
바벨로프의 비웃음에도 라이언은 굴하지 않고 양손을 든 채 천천히 그들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내가 인질이 되겠어.”
다가오는 라이언을 보며 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 한 명이면 족하다고 제발 가라고.
“제발 움직이지 마. 자꾸 피가 나잖아.”
“눈물 나는 사랑이군.”
바벨로프는 병사들을 향해 라이언을 잡으라고 명령했다. 공주보다는 라이언 쪽이 그에게는 더 탐나는 인질이었다. 둘이면 더 좋고.
라이언은 리아 옆에 섰다. 리아를 향했던 검은 이제 라이언을 향해 있었다. 두 팔이 묶여 리아를 부축할 수는 없지만, 어깨에 닿은 온기만으로도 두 사람은 충분했다.
바벨로프는 걸음을 재촉했다. 왕이 마음을 바꿔 인질이 죽든 말든 상관없이 그를 공격해오기 전에 성을 벗어나야 했다.
왕은 약속을 지켰다. 성문은 열려있었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은 바벨로프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바벨로프는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손아귀에 인질이 둘이나 있었고 대신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하며 호위하는 병사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는데 자꾸만 뒷덜미가 서늘했다.
무엇이 잘못된 거지?
순순히 물러난 왕? 사랑에 미친 공작? 아니면 소름 끼치도록 조용한 왕성?
열린 성문 저 너머로 피어스와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분위기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선뜻 들어올 수는 없겠지.
바벨로프는 성문을 코앞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자신의 병사에게 잡혀 끌려오는 리아와 라이언을 쳐다보았다. 분명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무리 전쟁의 신이라 해도 검을 잡을 손이 묶여 있었고 자신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릴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가는 것이 분명한데, 왜 불안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