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이 밤이 가기 전에(2)
제시카가 넋이 나간 사이 라이언은 그녀의 품에서 앤을 안아 들어 조심스레 던컨에게 넘겨주었다. 품에서 아이가 빠져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멍하게 서 있던 제시카는 몸이 포박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비명을 질러댔다.
“놔라.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러느냐!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전하, 전하. 도와주세요!”
뻔뻔하게 자신을 부르는 제시카의 목소리에 던컨은 품 안에 안긴 앤의 귀를 막았다.
“내 눈앞에서 치워.”
던컨은 제시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명령했다. 험한 말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는 간신히 이를 악물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앤의 엄마였다. 더는 아이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던컨이 앤을 달래며 뒤로 돌아서기가 무섭게 제시카는 밖으로 끌려나갔다.
시종 한스가 곧장 달려 나왔다. 그동안 감옥에 갇혀있었기에 형편없는 몰골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한스는 벌벌 떠는 시종과 시녀들의 정신을 일깨우며 재빠르게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라이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유모에게 앤을 넘겨준 던컨은 한스에게 전투복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당장 바벨로프를 잡아야 해.”
“제게 맡겨두십시오. 전하께서는 공주님과 함께 이곳에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증폭제를 복용한 병사 중 대다수는 피어스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간 상태였고 나머지는 바벨로프를 지키고 있었다. 그 외 남은 병사들은 어둠을 틈타 불시에 이뤄진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고꾸라졌다. 대부분이 검을 집어던지고 투항했다.
일반 병사들은 반역이 일어난 날의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바벨로프의 계략대로 베드포드 공작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왕을 해치려 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총사령관 피어스와 바벨로프가 직접 키운 사병뿐이었다.
바벨로프가 그토록 쉽게 왕성을 손바닥 위에 둘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진짜 반역자라는 것을 병사들이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하는 병사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바벨로프는 어떻게든 증폭제를 더 구해서 그들을 완전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피올렉샤의 레반왕자는 더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라이언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라이언을 잡아서 죽이지 못한다면 결국은 실패할 것이란 걸 잘 알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사실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해본다면 뻔히 눈에 보이는 술수였다.
늦은 밤, 성 밖에서 발견된 베드포드 공작. 그 소식을 듣고 병사들이 반 이상 빠져나가 허술해진 경비.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상황임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그만큼 초조했고 그만큼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벨로프는 어디 있지?”
전투복을 입으며 던컨이 다시 물었다.
“성 밖으로 나간 피어스와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성안의 병사들은 저희 손에 넘어왔습니다. 바벨로프와 함께 반역을 도모한 귀족 몇 명이 지금 성안에 머물고 있으며 이미 그쪽도 포위되었을 겁니다. 도망쳤다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습니다.”
성문은 모두 닫혔고 비밀 통로 또한 막혔다. 성에서 쏘아 올린 불꽃을 보고 속았다는 것을 눈치챈 피어스가 뒤늦게 달려온다 해도 성안으로는 쉽게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상황을 설명하며 라이언은 연신 입구 쪽을 살폈다. 지금쯤이면 리아가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직 소식이 없다는 것이 불안했다.
제임스와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했었다. 그 뒤 함께 바벨로프를 치기로 했는데….
던컨은 초조해하는 라이언을 보며 무언가 잘못된 것을 눈치챘다.
“공… 자네 아내는 어디 있지?”
던컨은 차마 공주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악마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직도 귀를 쟁쟁하게 울렸지만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그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아무래도 가봐야겠습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라이언이 몸을 돌렸다.
그때 제임스가 보낸 기사단 단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뻘게진 얼굴로 뛰어들어와 쓰러지듯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고, 공작부인께서….”
어찌나 빨리 달려왔는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라이언은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지? 공작부인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침을 꼴깍 삼키며 간신히 숨을 고른 단원이 다시 말했다.
“부, 부인께서 끌려가셨습니다. 브, 브렌트 남작님께서 소식을 전하라고….”
“제임스는! 브렌트 남작은 어디로 갔지?”
쏟아지는 살기에 단원은 겁먹은 듯 말을 더듬었다. 그저 말을 전할 뿐인데도 이 정도로 느껴지는 살기라니. 오싹함에 몸이 떨렸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부 전해주었다. 리아와 제임스의 행방 모두를.
라이언이 단원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바벨로프를 지키는 병사들은 전부 증폭제를 먹은 자들이었다. 어쩌면 리아와 제임스가 위험한 상황에 놓일지도 몰랐다.
“바로 단원들을 정비하고 출발한다.”
“나도 같이 가겠네.”
검을 집어 든 던컨이 라이언 옆에 섰다.
“안됩니다.”
라이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리아를 제임스에게 맡겼다. 그런데 위험에 뛰어들겠다고 나서다니.
“안전한 곳에 계셔야 합니다. 아무리 저와 기사단장들이 함께 한다고 해도 거긴 위험합니다.”
“밀실 안에 숨어 있으면서 무슨 생각을 한 줄 아나? 더는 무능한 왕이 되기는 싫네. 지금까지 해왔던 멍청한 짓을 반복하지 않을 작정이야. 그리고 내가 직접 가서 그자의 반역을 밝혀야 일이 쉬워지지 않겠나.”
“흠… 좋습니다. 다만 한가지 알아두십시오. 이대로 저와 함께 가신다면 더는 전하의 목숨을 지켜드리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명심하겠네.”
어떤 말로도 던컨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언쟁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바로 몸을 움직였다.
***
“으윽!”
리아를 끌고 간 병사들은 그녀를 바벨로프 앞에 떠밀 듯 내려놓았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이게 무슨…?”
리아는 몸을 비틀며 일어서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뒤로 잡아 당겨져 꽁꽁 묶인 팔은 움직이지 않았고 재갈을 물린 입에서는 끙끙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반항이 심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꿈틀대는 리아를 황당하게 내려다보던 바벨로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베드포드 공작인가? 그가 공격을 시작했군.”
시키지도 않았는데 병사들이 공주를 포박해 데려왔다면 이유는 그것 하나였다.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말에 놀란 귀족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공격이라니요?”
“도, 도대체 누가 공격을 한단 말입니까? 베드포드 공작을 잡으러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주를 왜? 공주를 왜 데려온 겁니까?”
웅성대며 질문을 쏟아내는 귀족들을 뒤로한 채 바벨로프가 리아를 데려온 병사를 쳐다봤다.
“그는 어디 있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곧장 공주님을 모시고 이곳으로 오느라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성안에 병사들이 워낙 부족한 터라….”
리아는 모셔왔다는 병사의 말에 끙끙대며 다시 몸을 비틀었다. 모셔오긴 개뿔. 재갈이라도 풀어주면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수 있을 텐데!
병사의 말이 계속될수록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베드포드 공작이 공격을 해왔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닌가!
“베드포드 공작을 잡으러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렌토 백작이 소리쳤다. 자신들이 지금 이 시기에 성안에 그것도 바벨로프와 함께 있는 것을 검은 사자에게 들킨다면 반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우, 우리는 가야 합니다. 나, 나가는 곳이 어딥니까?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올란드 백작이 우왕좌왕하며 초조한 듯 몸을 떨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며 큰소리를 뻥뻥 쳐대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다.
바벨로프는 머리가 지끈댔다. 미치겠군. 이런 상황에서 공격이라니. 하필이면 피어스가 병사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갔을 때 일이 벌어지다니.
“하, 속임수군.”
속았다. 된통 속고야 말았다. 당장 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바벨로프는 이를 바득 갈며 중얼댔다.
“멍청한 놈.”
피어스 이 바보 같은 놈.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신나서 나간 꼴이라니.
확실한 정보라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처리하겠다고 증폭제를 먹은 병사를 잔뜩 끌고 나간 피어스였다. 자신도 속고 피어스도 속았다. 총사령관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렇게 허술한 수에 속아 넘어가다니.
분통이 터졌다. 지금쯤이면 피어스도 거짓 정보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성안으로 다시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되려 성 앞에서 도발하다 화살에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이대로 숨어서 후일을 도모해야 할까? 어차피 피어스와 병사들이 성 밖에 있으니 전멸은 면한 것이 아닌가.
“제길!”
잠시 잊고 있었다.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않는 증폭제의 약점을. 병사들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래, 성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성을 빠져나가 목숨을 부지하기만 한다면 또 기회는 올 것이다. 숨겨둔 재산은 무궁무진하게 많았고 피올렉샤의 레반왕자만 잘 구슬려 증폭제를 또 살 수만 있다면 용병을 모집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레오니 공주라는 히든카드가 있지 않은가.
“말씀 좀 해보세요. 빠져나갈 수는 있습니까? 혹시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것은 아니겠죠?”
“그러게 말입니다. 계획은 있으시겠죠?”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혼자 중얼대는 바벨로프를 보며 귀족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가만히 혼자 생각하던 바벨로프가 드디어 그들을 쳐다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계획이 있습니다.”
물론 혼자만의 계획이지만. 돼지 같은 것들. 이제 다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악을 하겠지. 그들을 끼워주다가 자신까지 죽을 수는 없었다.
“우선, 제가 나가서 사태파악을 하고 오겠습니다. 위험하니 이 안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곳이 가장 안전합니다. 무턱대고 성을 빠져나간다고 나가셨다가는 큰일을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부디 절 믿고 기다려 주시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성안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당장 죽여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벨로프는 귀족들을 남겨둔 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공주를 데리고 나와. 그리고 저들을 가둬. 절대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아.”
바벨로프는 바로 탈출계획을 세웠다. 남은 병사들을 전부 데리고 공주를 앞세워 성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지켜본 바에 의하면 라이언은 자신의 아내를 굉장히 사랑했다. 공주를 방패로 삼으면 그도 어쩔 수 없이 공주의 안전을 위해 험한 공격은 하지도 못하리라. 물론 그럴 필요 없이 몰래 빠져나갈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병사는 리아를 끌고 나온 뒤 회의실 문을 잠갔다.
리아는 또다시 고꾸라졌다. 팔이 묶여 있으니 균형을 잡기가 힘든 탓이었다. 바벨로프는 앞으로 넘어진 리아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으읍! 읍읍!”
리아는 몸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당장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란 걸 알지만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바벨로프에게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바벨로프는 꿈틀대는 리아를 내려다보며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비록 거사는 망했지만 라이언이 그토록 아끼는 공주가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혼자만 지옥 불로 떨어질 수는 없지.
“공주님 품위를 지키세요. 제가 공주님을 예뻐할 수 있도록. 얌전하게 굴면 그 재갈을 풀어주죠.”
목덜미를 들어 올려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은 바벨로프가 병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검을 가져와.”
“이미 챙겼습니다.”
“아주 맘에 드는군. 좋다. 공주를 일으켜 세워. 당장 성을 빠져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