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이 밤이 가기 전에
제임스가 탑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리아는 이미 잡혀간 뒤였다.
탑을 지키는 병사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한발 늦고야 말았다. 적들은 공격을 알아채자마자 가장 먼저 리아를 데려가 버렸다.
철문에 칭칭 감긴 쇠사슬을 끊어내고 문을 열자 메리가 울면서 뛰어나왔다.
“마님이! 마님이 끌려가셨어요!”
메리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제임스의 말에 앞으로 나선 것은 한나였다. 그녀는 차분하게 병사들이 어떻게 리아를 데려갔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다.
“바벨로프 그 반역자가 벌인 짓이군. 쥐새끼 같은 놈. 그놈은 어디에 있지?”
화를 참지 못하고 제임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꾀에 놀아난 기분이었다.
“오늘 밤 회의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나는 제임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회의실의 위치와 어느 길로 가면 좀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지까지.
왕성 내부를 잘 알지 못하는 제임스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설명이었다.
제임스는 메리와 한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우선은 탑에 그냥 두기로 했다. 리아와 만났다면 그 즉시 함께 떠나겠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성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겠지만 그러자면 둘을 호위할 단원들을 붙여 보내야 했다. 그건 전력이 분산될 위험이 컸다. 아직 리아도 구하지 못했는데 무모한 짓이었다.
어차피 리아가 없는 탑은 쓸모없는 곳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가장 안전한 곳일지도 몰랐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제임스는 빨리 리아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탑을 빠져나오면서 재빠른 단원 한 명을 라이언에게 보냈다. 리아가 처한 상황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온 성안이 환했다. 누가 다시 횃대에 불을 붙였는지 마치 한낮처럼 시뻘건 불꽃이 사방에 넘실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제임스는 한나의 설명을 떠올리며 바벨로프가 있다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
리아는 병사들에게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병사들은 마음이 조급했는지 반항하는 그녀를 거칠게 다뤘다.
바벨로프는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그녀를 택했다는 건 라이언의 앞에서 협박하려는 수작일 것이 뻔했다. 그러니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저를 끌고 가는 것이겠지.
리아는 겁을 먹지 않은 척 일부러 더 난리를 쳐댔지만, 사실은 무서웠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병사들을 재우고 벌써 성을 빠져나갔어야 했다.
어떻게든 자신이 끌려간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이내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발레포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인간사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잡혀간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배신할 리가 없었다. 리아는 발레포르를 믿었다. 그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과 사라진 발레포르. 그리고 왕성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라이언.
이 밤이 가기 전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겠지.
어쩌다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지. 리아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자책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지 말 것을. 우겨대지 말 것을. 베드포드 성으로 돌아가자는 라이언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그냥 조용히 남편과 함께 장미 비누를 만들며 평온하게 살았어야 했다. 애초에 렌포드를 가는 게 아니었다. 영원히 베드포드 성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리아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
북쪽 탑으로 달려가는 제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이언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던컨을 구하기 위해 왕의 처소로 진격했다.
그는 단원들을 이끌고 그 어느 때보다 매섭게 적들을 쳐냈다. 검 끝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제아무리 증폭제를 먹은 병사래도 태세를 갖춘 라이언의 일격을 당해낼 자는 없었다.
단원들은 사방으로 퍼져 적들과 대치했다. 싸움이 길어지면 불리한 것은 이쪽이었다.
적들이 성 밖으로 나간 총사령관 피어스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며 시간을 끌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무조건 그 전에 던컨을 구해내고 바벨로프를 쳐내는 것이 목표였다.
피융- 피융-
왕성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표식의 불화살이 하늘 높이 쏘아졌다. 시간이 없었다. 라이언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내달렸다.
“시간이 없다! 왕께서 계신 곳으로 진격하라. 우리의 임무는 왕을 모시는 것이다!”
라이언이 검을 들어 올리며 포효했다. 겁도 없이 온몸을 던지며 공격해 오는 적들을 베어내며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 시각, 제시카는 시녀에게 앤 공주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다리는 참이었다.
밀실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반쯤 미쳐 있었다. 곁에서 자신을 지켜 주리라 믿었던 베이트만 경은 사라졌고 호위하는 병사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만약 검은 기사단이 공격이라도 해 온다면 방어도 하지 못하고 단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제시카는 호위병의 숫자만으로도 아버지 바벨로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 그녀는 딱 그 정도였다.
이용할 만큼 이용했으니 이제는 쓸모없다는 뜻이겠지. 밀실의 입구라도 발견해 던컨을 찾아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제시카는 씁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결국, 과정이 어떻든 간에 끝은 똑같을 거였다.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그녀를 지켜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기댈 곳은 없었다.
제시카는 죽음이 두려웠다. 이대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저 사랑을 얻고자 했는데. 완벽한 왕비가 되고자 했는데. 어째서 이다지도 볼썽사나운 꼴이 되었단 말인가.
던컨을 향한 원망과 증오가 그녀를 지탱했다. 언제까지 숨바꼭질을 할 수 있을는지 두고 보라지.
아무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해도 던컨과 함께한 세월이 10년이었다. 그가 그녀를 잘 아는 만큼 그녀도 그를 알았다.
던컨은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순간의 치기로 일을 저지르기에는 그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엘리시아의 왕이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밀실 안에서 왕으로서 죽는 쪽을 택하리라.
“왕비님, 공주님을 모셔왔습니다.”
잠이 덜 깼는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뾰로통한 표정인 앤 공주가 시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리 오렴.”
제시카가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리며 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어머니?”
제시카를 발견한 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한 웃음으로 가득 찼다. 며칠 만에 만나는 어머니가 반가운 탓이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앤을 끌어안으며 제시카는 방 어딘가에 있을 밀실 입구를 향해 삐딱하게 웃었다.
그를 밖으로 끌어낼 방법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분명 던컨은 밀실 안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을 거였다. 앤을 안고 방 안 구석구석을 천천히 돌면서 제시카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그만 나오세요. 공주가 아버지를 찾습니다. 공주를 이대로 두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그대로 계신다면 앞으로 우리 앤은 어쩌면 좋습니까. 계속 그 안에 계신다면 이대로 공주를 안고 제 아버지께 가는 수밖에요.”
협박이 짙게 풍기는 그녀의 말에 그는 분명 나오지 않고는 못 견디리라. 제시카는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아무리 그녀래도 딸을 사지에 몰아넣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던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그가 저를 어떻게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제시카의 품에 안겨 그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앤이 아버지를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며칠간 만나지 못한 던컨이 그리워 설움이 폭발한 탓이었다.
“공주, 울지 말 거라. 왕께서 아무래도 공주를 버리신 게 아닌가 싶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 예쁜 공주가 울고 있는데 나타나지 않으실 리가.”
제시카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에 울음은 점점 커졌다.
“으앙! 아버지, 앤을 버리지 마세요……. 으아앙!”
말문이 트여 조잘조잘 귀엽게 중얼대곤 했던 앤의 입에서 울음 섞인 애원이 쏟아졌다. 가까이에 선 시녀들과 병사들마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만 가자꾸나. 앞으로 평생 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어쩔 수 없지 않니? 왕께서 널 버렸으니.”
앤이 태어난 이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딸을 보던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앤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제시카는 잘 알고 있었다. 던컨은 그녀가 자신이 낳은 딸을 질투하게 될 정도로 오직 앤에게만 관심을 쏟았었다.
앤을 토닥이며 제시카가 방 안을 천천히 돌았다.
“오늘 앤을 데리고 숨어 버릴 작정입니다. 제가 지금 이 방을 떠나는 순간부터 평생을 전하께서는 공주를 보지 못하실 거예요. 부디 그 안에서 평온하시기를.”
말을 꺼내고 보니 정말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던컨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앤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 어쩌면 그것은 던컨과 바벨로프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였다. 이유는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앤을 원하고 있었다.
제시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녀는 품 안에 안겨서 울다 잠든 앤을 꼭 끌어안았다.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납작 엎드렸다.
“저, 전하.”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던컨이 스스로 밀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제시카는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에게 자신은 조금도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오직 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밀실을 빠져나왔을 테지. 다시는 딸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죽음보다 무서웠을 것이다.
제시카는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신호를 주면 그들은 곧장 던컨을 포박할 것이다. 앤을 데려오기로 마음먹고 이미 계획을 세워 둔 참이었다.
앤을 이용해 던컨을 불러내고 그를 생포하는 것.
그도 이미 예상했을 거였다. 지금 상황에서 밀실에서 나오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앤을 내려놔.”
오랜만에 들어 보는 던컨의 목소리였다. 한때는 저 목소리마저 숭배한 적이 있었지. 제시카는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별로 편치 않은 곳이었나 보군요.”
며칠 사이 야위고 거칠어진 던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제시카는 앤을 더 꽉 끌어안았다. 품 안에 잠든 앤이 그녀의 마지막 보루였다.
“당신은 모정도 없나? 당신이 낳은 아이야. 어떻게 아이를 가지고 협박할 수가 있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듯 억눌린 목소리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저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가 아니던가.
“전하를 모셔라.”
제시카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 마주한 던컨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저를 향한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제시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던컨이 웃었다. 불쾌했다. 한때는 사랑한다고 여겼던 그의 미소가 어째서 이토록 모욕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왕을 포박한다는 것이 두려운 모양인지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시카는 짜증이 솟구쳤다. 던컨의 비웃음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뭣들하고 있느냐!”
날카로운 제시카의 목소리에 앤이 깜짝 놀라며 깨어나더니 곧바로 엉엉 울었다. 마구 버둥대는 앤의 몸을 거칠게 끌어안자 그제야 던컨의 얼굴에 웃음 대신 분노가 가득 찼다.
제법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좀 더 망가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병사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미적대는 병사들을 질책하기 위해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것들! 당장 그를 잡으란…….”
제시카는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수십 개의 검 끝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살고 싶으면 앤을 내려놔.”
던컨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