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사라진 발레포르
끼이익 두꺼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리아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가 짠 계획은 단순하면서도 확실했다.
병사들이 들어오면 발레포르를 이용해 그들을 잠들게 만든 뒤 안에 가둬 두고 문을 잠근 후 메리와 한나를 데리고 도망칠 작정이었다.
발레포르는 자신이 문을 열어 주겠다고 했다. 그 정도는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차피 그래 봤자 결국 탑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은 똑같았다.
그러느니 병사들을 철문 안쪽으로 유인해서 가둬 두는 편이 더 좋은 계획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철문은 무척 단단했고 건장한 병사 여럿이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을 터였다.
발레포르는 웃기는 짓 하지 말고 그냥 다 죽여 버리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리아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병사들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명령을 따를 뿐이었다.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들을 이런 상황으로 밀어 넣은 자신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테지.
제법 근사한 계획이었다. 한나의 연기도 좋았고 병사들이 잘 넘어가 준 것도 그랬다.
몸을 떠는 리아와 메리의 몸짓이 어찌나 사실적이었는지. 구석에 숨어 구경하던 발레포르 역시도 아무것도 모른 채 보았다면 정말 죽어가는 건 아닌지 의심할 만할 정도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들이 쓰러진 리아와 메리를 살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계획했던 대로 너무 딱딱 들어맞게 진행되는 상황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병사들은 조심스레 리아의 몸을 흔들었다.
“공주님. 어디 아프십니까?”
그들은 절대 곁에 다가가지 말라는 바벨로프의 명령을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공주에게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면 그런 명령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공주가 무사해야 자신들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리아에게는 조심스러웠던 손길이었지만 메리에게는 아니었다. 거칠고 배려 없는 손이 메리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일어나!”
“으윽!.”
꽉 잡힌 어깨의 통증에 메리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성이 난 쪽은 리아였다. 나쁜 놈들. 자기들 살려 주려고 이런 수고스러운 짓을 벌인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하는 행동이라니.
“그 손 치워.”
리아가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치마를 탁탁 털었다. 놀란 병사들이 동작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말 안 들려? 그 손 치우라니까!”
메리의 어깨를 사정없이 흔드는 병사와 한나의 팔뚝을 꽉 잡은 병사를 손가락 끝으로 콕콕 집으며 리아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본능은 무서웠다. 리아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복종하도록 길든 짐승처럼 병사들은 손을 떼고 몸을 곧게 세웠다.
“내 눈을 똑바로 봐. 몸이 이상하지 않아? 졸음이 막 쏟아지지 않아? 내가 너희를 위해 수면 향을 피워 뒀는데 말이지. 참지 말고 그만 자도 좋아.”
나중에라도 요술이나 주술 따위를 부렸다는 소문이 날까 걱정된 리아는 수면 향이라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그녀는 발레포르가 서 있겠다고 말한 쪽으로 몰래 손을 흔들며 혼신의 연기를 했다.
수면 향이라는 리아의 말에 병사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서로를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쯤에서 쓰러져 줘야 하는데… 리아는 계속해서 발레포르를 향해 눈치를 줬지만 병사들은 그대로였다.
‘발레포르 뭐 해? 빨리 재우지 않고!’
리아가 머릿속으로 발레포르를 향해 마구 소리쳤다. 어째서 계획대로 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그런 대사를 읊고 난 뒤 발레포르가 그들을 재우기로 했는데.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발레포르가 있을 만한 곳을 쳐다봤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것은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메리와 한나도 슬슬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둘은 리아가 건네준 수면 향에 당하지 않는 해독제를 미리 마셨다. 어디서 난 건지 묻고 싶었지만 리아는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물론 해독제는 생수였고 수면 향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발레포르. 나 골탕 먹이는 거라면 이쯤에서 그만둬. 시간이 없단 말이야.’
사정도 하고 협박도 해 보았지만 여전히 병사들은 그대로였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이상 없이 그대로인 자신들의 몸을 보며 병사들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놀라고 긴장했던 몸이 풀리고 눈빛이 돌아왔다. 리아는 조급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계획이 어긋날지도 몰랐다.
“발레포르!”
리아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 정도까지 장난을 칠 발레포르가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대며 요동쳤다.
“공주님 그만하시죠. 아픈 곳이 없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지금 일은 못 본 거로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병사 하나가 다른 병사들에게 눈치를 주며 리아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병사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멈춰! 멈추라고! 수면 향의 효과가 늦게 나타날 뿐이야. 너희는 지금 바로 쓰러질 거야! 지금 바로!”
리아가 주먹을 꼭 쥐고 발레포르가 나타나길 바라며 간절하게 외쳤다. 그렇지만 여전히 병사들은 그대로였다.
그때 갑자기 철문 밖에 소란스러웠다. 탑 아래쪽에서 누군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며 소리를 질러댔다.
“공격이다! 공격이야! 공주를 잡아 오라는 명령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리아가 곧바로 문밖으로 몸을 날렸다. 더는 나타나지 않는 발레포르를 기다릴 수 없었다.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고 적들이 눈치채고 자신을 잡으러 왔으니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다.
“꺄악!”
리아의 몸은 철문을 넘지 못했다. 화가 난 병사에게 머리채를 잡혀 고개가 휙 뒤로 당겨졌다. 그녀는 머리 가죽이 벗겨질 것만 같은 통증에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마님!”
“공주님!”
메리와 한나가 동시에 소리쳤지만 그들의 상황도 좋지는 못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리아와 함께 메리와 한나도 병사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포박되었다. 아무리 반항한다 해도 덩치가 두 배나 차이 나는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리아는 절망에 눈을 감았다. 발레포르를 간절히 불러도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자신을 배신할 리는 없을 테니.
헉헉대며 계단을 올라온 다른 병사가 적의 공격을 알리며 공주를 잡아 오라는 바벨로프의 명령을 전했다.
바벨로프는 적이 침입할 경우 보고할 필요 없이 제일 먼저 공주를 잡아 자신에게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이미 열려 있던 문은 수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다시 닫혔다. 메리와 한나는 그곳에 갇혔고 리아는 그대로 끌려갔다.
라이언의 공격이 바벨로프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
리아가 잡혀간 그 시각. 발레포르는 마계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인간사에 지나칠 정도로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소환이 된 참이었다.
발레포르는 발악했다.
“어차피 날 이용한 건 천계 늙은이들이라고! 자기들이 다 끼어들어 놓고서 나만 하지 말라고? 다시 보내 줘! 날 보내 달란 말이야!”
리아와 약속했던 대로 병사들만이라도 잠들게 한 뒤에 소환되었다면 이토록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리아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 걱정돼 미칠 것만 같은 발레포르는 소리를 지르고 또 질렀다.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된다니까! 아니 언제부터 이런 작은 일까지 감시했냐고! 누굴 죽인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가 된다고 날 잡아 왔냔 말이야!”
팔다리가 꽁꽁 묶인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왕 바알과 천계 늙은이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이용해 리아를 다시 그 세계로 돌려보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조금도 도와주지 못하게 하다니!
“어리석은 것. 더는 인간의 일에 상관하지 말아라.”
마왕 바알이 한심하다는 듯 발레포르를 질책했다. 들려오는 마왕의 목소리에 발레포르는 겁도 없이 반색하고 나섰다. 마왕이 나타났으니 바짓가랑이라도 잡아 보자는 심산이었다.
“마왕? 마왕님? 제발 나 좀 보내 줘. 나 약속했단 말이야. 내가 이렇게 와 버리면 리아는 어쩌라고. 악마 체면이 있지. 약속한 건 지킬 수 있게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거래했다고. 거래를 못 지키면 어떻게 되는지는 마왕님이 더 잘 알잖아!”
억지를 부리며 우겨대는 발레포르를 보며 바알이 혀를 끌끌 찼다. 인간에게 정을 준 악마의 최후란 그다지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 단 한 번도 아름답게 끝나는 꼴을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진짜 너무하네. 누구는 나라를 그냥 말아먹어도 봐주고, 누구는 살인귀가 되어서 도륙을 하고 다녀도 모른 척하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내가 누구 죽이기라도 했어? 그저 잠깐 재우려고 했을 뿐이라고. 그게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날 잡아 오고 난리야!”
인간사에 간섭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말일 뿐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정말 세계가 무너질 정도의 큰일만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세계 중에 그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전부 신경 쓰기에는 마왕 바알은 몹시 바빴다.
발레포르도 그 공공연한 비밀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껏 온갖 짓을 저질렀지만, 단 한 번도 소환되거나 경고를 받은 적은 없었다.
아니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혼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리아의 영혼을 훔쳤을 때.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다 천계 늙은이들의 계략이었지 않은가.
“그건 내가 모를 때나 그렇고. 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인간사에 간섭하려고 드는 것은 큰 잘못이지.”
“나도 알아!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안 하고 그냥 쬐끔 아주 쬐끔 티 나지 않을 정도만 움직였잖아!”
얼마나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참고 또 참아서 그 정도만 한 것도 악마로서는 여간 기특하고 대견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
마왕 바알이 소리치자 강력한 음기에 발레포르의 온몸에 털이 삐쭉 섰다. 마왕에게는 발레포르 따위는 손짓 한 번으로도 날려 버릴 힘이 있었다.
“왜 소리치고 그래… 요!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요!”
“내가 많이 봐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네놈이 맡은 임무는 끝났다. 이제 그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그들이 해결해야 할 일.”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마왕 바알의 기운이 사라졌다. 귓가에 작은 속삭임만을 남긴 채.
‘널 제발 잡아들이라는 천계의 부탁이다. 몇만 년 만의 부탁인데 들어주는 척 시늉은 해야지. 딱 3분만 서 있다 가라. 그래도 아무나 막 죽이지는 마.’
대화를 나누는 사이 벌써 3분은 족히 지났는데 또 3분이라니! 천계와 마계의 하루가 인간계의 한 달이니, 6분이면 자신이 리아 앞에서 사라진 지 3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발레포르는 몸을 마구 비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왕이 말한 3분이 지나기 전에는 아무리 움직이려 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리아는 지금 얼마나 황당할까? 병사들이 못된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수면 향을 피웠다며 큰소리를 떵떵 치던 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발레포르는 미안함에 눈을 감았다.
발레포르는 리아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악마의 기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