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반역의 이유
베드포드 공작이 나타났다는 정보에 총사령관 피어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움직였다. 공작이 사라진 이후 그를 찾아낸 것은 처음이었다. 만약 이번에 놓친다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다.
왕성을 빠져나가는 피어스는 묘한 기대감과 조급함에 몸을 떨었다. 지난 며칠간 조금의 성과도 내지 못한 그였으니 이번에야말로 공작을 잡아 제대로 된 공훈을 세울 작정이었다.
라이언을 찾았다는 피어스의 보고에 바벨로프는 흥분했다. 왕궁을 차지한 것 외에는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불안감과 귀족들의 견제에 지쳐가던 참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레오니 공주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전부 밝힐 예정이었다. 왕을 찾아 제대로 왕좌를 계승하지 못한다면 아예 왕가를 망가트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
벌써 5일이 지났고 더는 시간을 끌 수는 없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결정한 일이었다.
“드디어 반역자 베드포드를 찾아냈습니다.”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을 향해 바벨로프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큰소리를 냈다. 드디어 골칫거리 하나가 곧 해결될 것이라는 말투였다.
바벨로프는 자신을 따르는 다섯 명의 귀족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았다. 그들은 모두 20년 전 에리스를 왕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왔던 자들이었다.
에리스의 편에 서서 그녀의 뒤를 봐주며 누린 것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재산도 작위도 전부 그때 얻은 것이었으니.
앤 왕비가 죽고 에리스가 잡혀간 뒤 그들은 죽은 듯 몸을 사렸다. 다행히 왕실에서는 아예 없던 일처럼 악녀 에리스 사건을 덮어 버렸다. 천운이었다.
“그럼 그 일을 들춰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들이 레오니 공주의 비밀을 숨겨 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왕실의 안위 같은 거창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 일이 밝혀지면 혹시나 자신들의 잘못이 함께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약 지난 20년간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평온하게 누리던 모든 것들을 앞으로도 변함없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바벨로프의 편에 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조짐이 보인 것은 최근이었다. 누군가 20년 전 사건을 들쑤시고 다녔다. 왕성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시녀와 시종들을 찾아다녔고, 그 당시 국정에 참여했던 귀족들을 뒷조사했다.
은밀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들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에리스가 왕을 만나도록 돕고 그녀에게 지하감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일들이 밝혀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때 나선 것이 바벨로프였다.
바벨로프는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그들에게는 왕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누가 자신들의 편의를 더 봐줄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것 하나였다.
“그를 이길 수는 있는 겁니까? 베드포드 공작이 전부 죽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바벨로프가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조금 더 준비가 필요했던 반역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베드포드 공작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완벽했을 텐데.
왕과 베드포드 공작이 한 배를 타지만 않았다면, 제시카가 일 처리를 확실히 하기만 했다면. 그랬다면 이토록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을 테다.
비록 시작은 어긋났지만, 마지막까지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오늘 밤 그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내일 원래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할 작정입니다.”
“그랬다가 지난 일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중 걱정이 가장 많은 렌토 백작이 초조하게 말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두려움은 큰 법이었다. 나머지 4명과는 다르게 그는 끝까지 지난 일을 밝히는 것에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어허, 렌토 백작. 다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대로 있다가 베드포드 공작이 불시에 공격이라도 해 오면 어쩐답니까!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냥 있으면 우리 모두 죽습니다. 아시겠어요?”
백발이 성성한 올란드 백작이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며 인상을 썼다. 이번 일에 끼어든 것이 잘못이라는 듯 그의 얼굴에는 후회가 가득했다. 반역은 실패도 성공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였고 혹시나 베드포드 공작이 검은 사자라는 명성답게 기사단을 이끌고 공격이라도 해 온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공작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곧바로 레오니 공주와 악녀 에리스의 비밀을 밝히자고 나선 사람이 바로 올란드 백작이었다.
악녀 에리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 백성들은 동요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베드포드 공작의 손발을 잘라내야만 했다. 악녀 에리스에 관한 이야기가 수면 위에 올라온다 해도 바벨로프가 진짜 왕이 되면 뒷감당은 다 해 줄 것이 아닌가.
가만히 있다가 검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최후의 발악이나마 해 보자는 쪽이 그의 의견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 3명의 귀족은 그 의견에 동의했으나 유독 끝까지 반대한 것은 렌토와 바벨로프였다.
“그만합시다. 우리끼리 언성을 높여서야 되겠습니까. 렌토 백작 걱정하지 마세요. 그 일이 밝혀진다 해도 진상을 조사하려고 나서는 이가 없을 겁니다. 누가 살아남아 조사를 하겠습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시고 맘 편히 계세요. 또 압니까? 피어스가 제대로 마음먹고 병사들을 끌고 나갔으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결과를 들고 올지도 모르죠.”
바벨로프는 귀족들을 진정시켰다. 아직 증폭제의 효과는 그대로였고, 왕성을 차지한 것도 자신이었으니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만약 공작을 잡지 못한다면 공작이 그토록 아끼는 공주를 인질로 삼으면 될 것이니.
“여전히 왕은 찾지 못했습니까?”
구석에 앉아 있던 엘란 후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밀실입니다. 못 찾으면 어떻습니까. 영원히 그곳에 갇혀 있게 된다면 더 좋지요.”
바벨로프는 왕이 사라진 궁을 빙 둘러 촘촘히 쇠막대를 박아넣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통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 왕이 숨어든 곳이 밖으로 연결된 통로가 없는 완벽한 밀실이라는 뜻이었다.
왕이 사라진 지 5일째. 공식적으로는 생사를 오갈 정도로 위독한 왕이었다. 왕의 부재는 백성들에게 혼란을 가져왔다.
“왕의 인장과 반지가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벌써 똑같은 물건을 제작 중입니다. 무슨 상관입니까. 백성들은 왕의 인장이 조금 달라진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왕가의 피가 흐르는 모든 이가 사라진다면 인장도 반지도 그 의미가 없지요. 더군다나 엘리시아의 가장 고명한 귀족 다섯 분이 제 곁에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랍니까.”
왕가의 피가 흐르는 모든 이가 사라진다니. 그럼 어린 앤 공주까지 죽이겠다는 말일까?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바벨로프. 그는 본인의 핏줄까지 죽이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자였다. 왕좌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였다. 그런 자와 한 배를 탄 것은 자신들의 선택이었으니 지금에 와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럼 이제 앞으로의 일들을 상의해 볼까요? 여기 모인 모두가 공신들인데 그에 걸맞은 처우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성문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꿈에도 모른 채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을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며 바벨로프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성벽을 밝히던 횃불이 동시에 꺼졌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졌다. 검은 기사단은 어둠 속에서 누구보다 민첩하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성안을 지키던 병사의 수는 평소의 반도 되지 않았다. 며칠 만에 꼬리를 잡은 베드포드 공작을 체포하기 위해 대부분이 빠져나간 탓이었다.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검은 기사단은 자연스럽게 어둠 안으로 스며들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를 처리하고 갇힌 기사단원들을 구하는 것을 첫 번째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라이언은 곧장 던컨을 구하기 위해 왕의 처소 쪽으로 움직였고, 제임스는 그런 라이언을 대신해 리아가 갇힌 탑으로 달려갔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제임스를 말릴 수 없었던 라이언은 대신 그에게 리아를 부탁했다. 그쪽은 발레포르가 함께 할 테니 좀 더 안전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라이언과 기사단원들은 이미 피올렉샤와의 전쟁에서 증폭제를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제임스는 아니었다. 검을 손에서 내려놓은 지 10년이 훌쩍 넘은 상태였고 그런 제임스에게 증폭제까지 먹은 병사들과의 싸움은 상대도 되지 않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발레포르가 리아를 성 밖으로 데려갈 때 제임스도 함께 나가기를 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리아와 함께해 달라는 다짐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라이언이 막 성안으로 들어왔을 때 리아도 행동을 개시했다.
“꺄아아악! 제발 도와주세요. 큰일이에요!”
한나가 계단 중간에 서서 비명을 질렀다. 찢어지는 비명에 탑을 지키고 섰던 병사들이 놀라 뛰어 올라왔다.
“무슨 일이지?”
“고, 공주님이… 공주님께서!”
“제대로 말을 해! 공주님께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한나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병사가 그녀를 질질 끌고 계단을 오르며 고약하게 소리를 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숨넘어갈 듯 비명을 지른 것이냐는 질타였다.
“식사를 넣어드렸는데도 반응이 없으셔서… 아…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공주님과 시녀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한나가 꽉 잡힌 멱살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애써 짜내며 준비했던 대사를 읊었다.
순식간에 꼭대기에 도착한 병사들이 한나를 던지듯 내팽개치고는 철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숙여 구명을 들여다보니 정말 공주와 시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물론 안에서 대답이 들려올 리는 없었다. 몸을 일으킨 한나가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주…죽은 걸까요?”
“죽다니!”
한나의 말에 병사 하나가 초조한 듯 눈알을 굴렸다. 만약 공주가 죽었다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자신들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꿈쩍도 하지 않으세요. 너… 너무 무서워서….”
“문을 열어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서열이 높은 병사를 향해 눈알을 굴리던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절대 문을 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이런 응급 상황에 대한 대처는 없었다.
“우선 위에 보고부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멍을 쳐다보고 있던 한나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악!”
비명에 놀란 병사가 한나를 밀쳐내며 다시 구명을 확인했다. 그의 눈에 비친 장면은 무척이나 괴기스러웠다. 쓰러진 공주가 누운 채로 격하게 몸을 떠는 것이 아닌가.
병사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만약 정말 공주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첫 번째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하자 막내 병사가 한나의 팔을 움켜잡았다.
“허튼짓하는 거라면 널 죽여 버리겠다. 얌전히 있어!”
어차피 다 해 봤자 상대는 여자 셋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한 번에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연약한.
병사의 협박에 한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철문을 칭칭 감은 쇠사슬이 철커덩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기름을 칠하지 않아 경첩이 녹슨 문이 삐걱댔다.
드디어 자유를 향한 문이 열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