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초승달이 뜬 밤
한나는 혼란스러웠다. 공주에게 전해 들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믿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헛소리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공주가 말해 준 집사의 외모가 아버지와 비슷했고, 성은 달라도 헨리라는 이름은 똑같았다. 심지어 왕비도 모르는, 자신의 본명인 에이미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나는 흔들렸다. 왕비는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일만 봐도 충분히 가능했다. 왕비를 통해 급료를 가족에게 보냈지만, 확인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고민 끝에 한나는 왕비를 찾아갔다.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왕비는 한나를 만나 주었다. 공주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을 들키면 큰일 날 것을 알기에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긴 채 왕비를 떠보았다.
‘왕비님.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휴가를 받고 싶습니다. 이제 가족을 만날 때가 된 것 같아요.’
한나의 말에 왕비는 화를 냈다. 네까짓 게 가족은 무슨 가족이냐며 패악을 부렸다.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찾아왔냐며 불같이 성질을 냈다. 그래도 한나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아버지께서 잘 계신지만 알고 싶어요. 요즘 자꾸 아버지가 꿈에 보여요. 부탁드립니다.’
왕비는 한나를 비웃었다. 가족을 다 버리고 나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드냐며 비아냥댔다. 그리고 능력 없는 놈이라며 한나의 아버지를 비난했다.
도대체 왜? 아무리 신경이 곤두서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왕비는 누구보다도 한나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제시카가 왕비가 되기 전 왕성 밖에 살 때부터 한나는 제시카의 시녀였다. 어떠한 이유로 집을 나왔고 왜 가족을 찾아갈 수가 없는지 전부 다 알 정도로 오래된 관계였다. 늘 한나의 가족을 걱정했었다. 가족에게 급료를 보내는 것도 제시카가 먼저 권유한 일이었다.
핀잔만 잔뜩 듣고 되돌아 나오면서 한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공주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고.
어느 편에 설지 결정해야 했다. 만약 공주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끝까지 왕비의 편이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리고 공주가 전해 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래도 더는 왕비를 믿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한나가 보기에 이 전쟁의 승리는 공주 쪽이었다. 베드포드 공작이 죽지 않고 도망쳐 살아 있다는 것이 그랬다. 아버지 문제를 떠나서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했다.
며칠 사이에 초췌해진 제시카 왕비를 보고나니 결심은 확고해졌다. 만약 공주의 말이 자신을 꾀어내기 위한 거짓일지라도 공주의 남편인 베드포드 공작을 믿기로 했다.
한나는 공주와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조금 이른 시간, 한나는 저녁 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탑에 올랐다.
“공주님 저녁을 가져왔습니다.”
철문 아래쪽 구멍에 쟁반을 밀어 넣자 금세 메리가 달려와 음식을 받았다.
“공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차분한 한나의 목소리가 철문을 타고 넘었다.
“말해 봐.”
이미 철문 앞에 와 있던 리아가 대답하자 한나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를 전부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주님께 제 미래를 걸고자 합니다. 저를 지켜 주세요. 제 아버지를 지켜 주세요.”
“한나 님의 아버지는 이미….”
“네?”
리아와 함께 한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리는 아버지를 지켜 달라는 그녀의 말에 넬슨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려다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메리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리아를 쳐다봤다.
리아는 입 모양만으로 괜찮다고 말하며 메리를 다독였다.
리아는 한나에게 넬슨이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왕비의 계략으로 아버지께서 딸이 죽었다고 믿고 그 복수를 하기 위해 베드포드 가의 집사가 되어 기회를 노렸는데, 실패한 것과 그 과정에서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고만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사실이지만 지금 이 순간 넬슨의 죽음을 말해서 한나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옳은 선택을 해 줘서 고마워. 부탁이 뭔지 잘 알겠어. 내가 지켜 줄게. 한나는 날 도와주겠어?”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한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늘 밤 공격이 시작될 거야.”
“오, 오늘이요?”
놀란 것은 메리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 공격이 시작된다니.
“난 그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해.”
“그, 그건 불가능해요. 제겐 열쇠가 없어요. 있다 해도 탑 밑에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가능해. 어차피 병사들은 내가 아까 난리를 부린 터라 지금 나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알고 있을 거야.”
리아는 아침에 물어봤던 일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저녁에 다시 찾아온 바벨로프에게 온몸으로 반항했다. 이미 오늘 공격을 개시한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겁날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는 곧 죽을 운명이니 내일 일어날 일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공격이 실패하고 내일 바벨로프가 에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퍼트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공격이 실패하면 어차피 살기는 어려울 테니. 죽은 이후 소문이 어떻게 나는지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내가 아프다며 호들갑을 떨어 줘. 병사들이 철문을 열게 만들어야 해. ”
리아는 철문이 열린 틈을 타 도망칠 생각이었다. 전에는 꿈도 못 꿨을 일이지만 이젠 옆에 발레포르가 있었다. 병사 몇 명을 잠들게 한다고 해서 발레포르가 잡혀가지는 않겠지. 그 정도는 분명 하늘도 눈감아 줄 것이다.
“한나의 역할은 거기까지야. 이 철문의 자물쇠를 푸는 것. 뒷일은 걱정하지 마.”
쉽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살기 위해서는 해야만 한다. 지금 선택에 후회가 없기를. 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댔다.
“네. 해 볼게요.”
한나의 대답에 리아는 긴장으로 굳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짐이 좋았다.
***
제임스의 말처럼 흐린 밤이었다.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히 어둡고 고요한 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방금 성안으로 정보병이 급히 들어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병사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바로 계획을 실행한다.”
라이언이 대답하자 기사단장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단원들을 확인하며 주변을 돌아보던 라이언이 천천히 시선을 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벽마다 꽂힌 횟대에서 횃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임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이만 돌아가.”
라이언은 제임스를 향해 진심이 담긴 걱정을 내뱉었다. 극구 따라오겠다던 매튜는 단호한 명령으로 떼어놓을 수 있었지만 제임스는 아니었다.
제임스에게는 라이언의 부탁도 협박도 소용없었다. 그는 무조건 기사단과 함께하겠다고 우겼다.
“이봐 친구. 내가 한창때는 자네보다 훈련성적이 더 좋은 적도 있었다는 거 잊었나? 내 걱정은 말고 본인 몸이나 잘 챙겼으면 좋겠군.”
제임스가 검 자루를 더 세게 움켜잡으며 콧방귀를 꼈다. 그 어떤 말도 소용없었다. 라이언도 제임스의 성격을 잘 알기에 더는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임스의 검술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여느 기사단장보다도 더 훌륭했다. 아군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서 그의 실력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라이언은 제임스의 합류가 반갑지 않았다. 하나뿐인 친구를 위험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검을 잡은 제임스의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라이언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벌렸다. 설득도 협박도 부탁도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무사하기를 비는 수밖에. 제임스에게 오늘 밤 아무 일도 없기를.
“조심해. 적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해. 되도록 단칼에 숨을 끊어놓는 편이 서로에게 좋겠지.”
“무서운 놈들. 병사들이 장난감도 아니고. 그 약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먹었을 것이 뻔해. 힘이 두 배로 세진다는데 안 먹을 리가 없지. 바벨로프 그 쥐새끼 같은 놈. 내 손에 잡히기만 해 봐라.”
제임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수많은 병사를 사지에 몰아넣은 바벨로프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지금 성문이 열렸습니다. 바로 통로로 진입하겠습니다.”
“허락한다.”
라이언의 대답에 기사단장이 깃발을 들었다 내렸다.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신호였다.
바벨로프의 병사들은 정보병이 가져다준 거짓 정보를 듣고 성문 밖으로 몰려나가는 중이었다. 라이언은 보다 쉽게 왕성을 되찾기 위해 르셀 초입에 자신으로 위장한 단원 몇 명을 보내놓았다. 적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베드포드 공작을 추적하기 위해 성안에 있던 병사 중 일부가 자리를 비운다면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라이언을 꼭 잡고자 하는 바벨로프의 간절함 만큼 가능한 많은 병사를 내보내겠지. 그들이 허탕 친 것을 알고 돌아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성안으로 전부 진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선발대는 이미 안에 들어가 대기 중이었고 후발대까지 완벽하게 입성하면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라이언은 통로 입구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들어 성벽 넘어 북쪽 탑을 쳐다보았다. 탑 꼭대기에 갇혀 있다는 리아.
리아의 말처럼 악마 놈은 쓸모가 있었다. 댄의 몸을 벗어난 발레포르는 여기저기 연기처럼 오가며 소식을 전했다. 만약 발레포르가 없었다면 오늘 공격은 불완전한 상태로 시작됐을 것이다.
발레포르는 라이언에게 여차하면 다 죽이고 리아만 데리고 떠나겠다며 똑바로 하라고 협박을 해 왔다. 라이언은 오히려 그 협박이 고마웠다. 발레포르의 말은 혹시 모를 만약의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리아만은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빠른 걸음으로 통로를 달리며 라이언은 다짐했다. 지금 성안에 모인 귀족들은 반역의 선봉에 선 작자들이다. 재상 바벨로프를 포함해 제시카 왕비와 몇 명의 귀족들. 전부 죽일 것이다.
라이언에게 남은 자비는 없었다.
리아는 발레포르가 책임지고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물론 라이언 자신이 직접 리아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병사들의 표적이 될 것이 뻔했다. 리아가 더 위험해지겠지.
무모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아의 안전을 확인하고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라이언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안전이었다.
발레포르라면, 그 악마 놈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제시카 왕비는 밀실의 입구를 찾아내기 직전이라고 했다. 그녀는 전문가 몇 명을 데리고 지난 며칠 내내 오로지 밀실의 문을 찾아내는 것에 매달렸다.
미세한 틈을 찾아내기만 하면 트릭을 부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만약 라이언이 도착하기 전에 밀실의 문이 열린다면 던컨이 위험했다.
발레포르는 던컨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혼란을 이야기했다. 무능한 왕이라는 고뇌와 지금 상황이 본인 탓이라는 것에 대한 자책. 왕은 고통 속에 성장하고 있었다.
몇 년 만에 검은 기사단이 본연의 모습으로 출격했다. 비록 전쟁터는 아니지만 그 각오만은 대단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은 전쟁터에서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왕을 지키고 공작부인을 지키고 엘리시아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기사단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