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부인의 비밀 108화. 점점 다가오는 끝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두의 신경이 곤두섰다. 벌써 한차례 수색이 있었지만 다행히 미리 알고 지하창고로 숨어 들키지 않았다. 며칠 동안 르셀 구석구석 온갖 곳을 뒤지고 다닌 병사들의 손길이 많이 지쳐 있던 탓이었을까. 그들은 애초에 의심이 가지 않는 의상실을 그다지 꼼꼼히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저 구색에 맞춰 형식적인 수색이 이뤄졌고 교묘하게 숨겨진 지하창고가 들킬 리는 없었다.
“또 수색입니까?”
며칠 사이 안색이 많이 좋아진 매튜가 자신의 흔적을 정리하며 몸을 잽싸게 움직였다. 문이 열리기 전에 지하창고까지 숨어들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쥬넬의 의상실은 휴점 상태였지만 시국이 어수선했기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사방에 문 닫은 상점이 수두룩했으니 특별히 눈에 띄지도 않았다.
사교모임은 전부 중단된 상태였고 파티가 열릴 리도 없었다. 이런 시기에 드레스를 맞추러 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밖은 조용했다.
“누가 정신 못 차리고 옷이라도 맞추러 온 건가.”
쥬넬이 쯧쯧댔다.
그때 다시 쿵쿵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뒷문이었다.
“나가 봐.”
구석에 앉아 있던 라이언이 말했다. 그는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눈빛이 거칠었다. 명령 아닌 명령에 쥬넬이 툴툴대며 몸을 움직였다.
“영업 안 합니다.”
문을 열지도 않고 쥬넬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요즘 같은 때에 누가 드레스를 맞춰요. 나도 좀 쉽시다. 영업 안 하니까 나중에 다시 오세요.”
“쥬넬.”
히스테릭한 쥬넬의 말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쥬넬은 곧장 커튼을 걷어 밖을 살피더니 놀란 표정으로 잠금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제임스!”
놀라 소리치는 쥬넬을 향해 제임스는 검지를 들어 올려 자신의 입가에 댔다.
“쉿.”
“여긴 어떻게 왔어요?”
“라이언은?”
제임스가 의상실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조심스러운 행동에 쥬넬도 목소리를 낮췄다.
“안쪽에.”
쥬넬이 의상실 안쪽 커튼을 쳐다봤다. 소란스러움을 들었는지 라이언이 나와 있었다.
“라이언!”
제임스는 곧장 라이언 앞으로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자네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네.”
“용케 찾아왔군.”
제임스의 몸을 떼어놓으며 라이언이 살짝 미소 지었다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왕성을 탈출하고 처음으로 보인 미소였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네. 자네가 도망쳤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갈 만한 곳이 없단 말이지. 근데 페넬로페가 쥬넬이 르셀에 왔는데 드레스도 못 맞췄다며 호들갑을 떨어대지 뭔가. 그때 알았지. 거기구나!”
라이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커튼 안쪽으로 들어가던 제임스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매튜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매튜 군! 오랜만일세.”
제임스가 나타나자마자 분위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주 둘 다 엉망이군.”
가만히 서서 매튜와 라이언을 차례로 돌아보던 제임스가 혀를 끌끌 찼다.
“쥬넬. 이 작자들 상태가 어떤가?”
“오늘 공작님 상처의 실밥을 풀 거예요.”
“제임스 정신없으니 그만하게.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나 말해 봐.”
라이언이 이마를 한껏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오자마자 부려먹는 건가? 상황설명도 해 주지 않고?”
“바벨로프 공작이 반역을 일으켰고 공작님께 뒤집어씌우셨습니다. 왕께서는 숨어 계신 상황이고 공작부인께서는….”
공작부인을 언급하며 매튜가 라이언의 표정을 살폈다.
“바벨로프가 리아를 잡아갔네.”
“이런 미친!”
제임스가 화를 숨기지 못하고 소리치자 매튜와 쥬넬이 동시에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취했다.
“그 늙은이 진작부터 맘에 들지 않았어. 왕비를 등에 업고 자신이 왕인 양 설친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왕께서도 너무 물러 터지셨지. 왕실에 딱히 어른이 안 계시니 장인이라고 대접해 준 거 아닌가.”
“욕심은 끝이 없지.”
“그래도 그렇지 반역을 해? 그러고 나서 자네한테 뒤집어씌우기까지? 아니 검은 사자 악명은 어따 다 팔아먹고 도망친 건가? 그냥 칼 한 번 휘둘러서 쓸어 버리지 않고.”
라이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제임스가 유일했다.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친구. 그게 바로 라이언과 제임스의 관계였다.
“그러게 말이군. 그냥 쓸어 버리고 말 것을.”
“계획이 어떻게 되나?”
“기사단원들이 왕성 주변에 포진해 있네. 시기를 조율 중이야.”
“오늘.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지?”
“오늘 페넬로페가 가져온 소식이네. 그 아이가 요즘 어울리는 부인들에게서 들은 말인데. 오늘 바벨로프가 귀족 몇몇을 왕궁으로 불렀다는군. 내일 무슨 발표를 할 예정이라던데…….”
제임스가 말끝을 흐렸다.
“제임스.”
“내일이 되면 백성들의 신뢰가 전부 깨질 거라고 했다더군. 더는 백성들이 자네를 감싸 주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 말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눈치챈 매튜가 라이언을 쳐다봤다. 라이언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말이야. 이왕이면 추잡한 꼴은 보지 않는 쪽이 좋지 않나. 소문은 언제나 무섭지.”
“각하.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미 준비는 끝났습니다. 왕께서 알려 주셨다는 비밀통로는 왕성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부근에서 찾았습니다. 각하와 저만 합류하면 됩니다.”
“아직 내 아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공격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리아를 구해내야 했다. 그래야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싸움이 시작된다면 바벨로프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솔직히 말해 라이언에게는 왕의 생사보다 리아가 중요했다.
“왕성에 들어가는 대로 공작부인이 계실만한 곳을 먼저 뒤지겠습니다.”
“병력이 흩어져서는 안 돼.”
라이언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이 퍼트리려는 소문은 분명 악녀 에리스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 뻔했다. 그 소문이 퍼지면 왕실의 권위도 권위지만 에리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라이언의 이미지는 추락할 것이다.
라이언은 이미지 따위는 상관없었다. 왕실의 권위도 마찬가지다. 소문이 퍼져 온 세상에 공작부인이 악녀 에리스의 딸이라는 알려진다고 해도 괜찮았다. 자신이 그녀를 지키면 되는 것이다. 비난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리아는 아닐 것이다. 그녀는 왕을 아꼈다. 그 사실이 퍼져 버린다면 왕실은 엉망이 될 것이다. 왕의 자리 또한 휘청이겠지. 그걸 알기에 그토록 숨긴 것이겠지. 악녀 에리스를 조직적으로 덮어 버린 것은 왕실이었으니.
오늘 밤, 어둠이 깔리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오늘 밤은 초승달이 뜬다지. 적당히 어둡고 음산한 게 싸우기 딱 좋은 날이 아닌가.”
제임스가 라이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떤 결정이든 후회가 따른다네. 제발 그 인상 좀 풀게.”
***
바벨로프가 다녀가고 얼마 뒤 한나는 점심을 가져다주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고민이 심한지 얼굴이 수척했다.
이제 모든 사실을 알렸으니 한나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리아는 메리의 식판에 반찬을 덜어 주었다.
“많이 먹어. 그래야 버티지.”
“마님. 제발 드세요. 안 그러면 공작님께 제가 혼나요.”
“비밀로 해 줄게.”
쓸쓸해 보이는 리아의 얼굴을 보며 메리가 눈물을 글썽였다.
“물 가져다드릴게요.”
애써 눈물을 훔치며 메리가 일어섰다.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메리?”
그때 갑자기 메리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슨 일이야?”
놀란 리아가 황급히 몸을 움직여 메리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 리아. 그냥 자는 거야.”
들려오는 목소리에 리아의 몸이 굳었다.
“리아 나 좀 봐.”
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발… 레… 포르?”
“나야. 나왔어.”
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발레포르가 싱긋 웃었다. 물론 악마의 미소였다.
“야!”
리아가 소리를 빽 지르고는 발레포르를 향해 달려들어 손으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샐쭉 웃는 발레포르가 얄미우면서도 반가웠다.
“으이구. 성질은 여전하네. 괜히 걱정했어.”
“너 진짜 죽을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내가 얼마나 불렀는데.”
“야, 내가 안 오고 싶었겠냐. 어쩔 수가 없었다고.”
발레포르가 리아를 떼어놓으며 입을 삐죽댔다. 누구보다 오고 싶었던 것은 발레포르였다. 댄의 몸에서 빠져나와도 괜찮을 때까지 기다리느라 애가 타 죽을 뻔했는데.
“라이언은? 라이언은 괜찮지?”
당연히 발레포르가 라이언과 함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를 지켜 주라고 함께 보낸 것이기도 했으니.
“몰라. 그놈 뭐 하는지.”
“뭐?”
“난 왕이랑 있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발레포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보자마자 궁금한 게 그것밖에 없는지. 아주 절절한 사랑이라니까.
“그 쥐새끼 같은 놈이 공격해 왔을 때 라이언이 나랑 왕을 밀실 안에 집어넣었어. 나보고 왕을 지켜 주라던데. 어찌나 부탁하던지.”
발레포르는 왕과의 만남 중에 공격이 일어났고,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리아에게 설명했다. 일찍 오지 못한 이유가 댄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그런 주술은 쓰자고 안 했을 텐데.”
리아는 발레포르가 댄의 몸에서 밤마다 빠져나와 왕궁에서 소란을 부리지는 않을까 싶어 그 방법을 쓰자고 했다. 그러면 댄의 몸도 더 안전하고 발레포르도 더 자유로이 능력을 쓸 수 있다고 했으니까.
다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기에 발레포르의 발을 묶어 놓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고마워. 답답했을 텐데 댄을 지켜 줘서.”
“헐.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
놀란 표정의 발레포르를 가볍게 무시하며 리아가 다시 물었다.
“그럼 라이언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거야?”
“여기까지 오면서 듣자 하니 꼭꼭 숨었다던데. 아직 못 찾은 모양이야. 물론 이 몸은 그놈의 기운을 추적해서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가 있지만 말이지.”
발레포르가 우쭐댔다.
“그럼 찾아 줘.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무사히 잘 있는지. 빨리 가서 살펴보란 말이야.”
“너부터 풀어 줘야지.”
“안 돼.”
단호하게 고개를 흔드는 리아 때문에 당황한 것은 발레포르였다.
“풀어 달라고 징징댈 거 아니야?”
“그럼 안 된다며. 너 인간사에 티 나게 끼어들면 벌 받는다며.”
발레포르는 리아에게 자신은 인간사에 티 나게 끼어들면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 혼란을 일으킨 죄로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가장 큰 벌은 소멸이라고. 물론 들키지 않으면 상관은 없었다.
마계에서 악마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늘 지켜보는 것이 아니므로 별짓을 다 해도 들키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리아는 천계가 신경 쓰는 아이였다.
“그건 그런데.”
“티 나게만 끼어들지 않으면 되는 거지?”
발레포르가 리아의 눈빛에 압도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 찾아서 나 무사한 거 알려 줘. 내가 어디 있는지도.”
“진짜 괜찮겠어?”
“나도 계획이 있어. 걱정 말라니까. 라이언만 무사하면 난 괜찮아. 그냥 네가 라이언과 내 사이를 오가며 소식만 전해 줘. 그 정도는 괜찮지? 티도 안 나잖아. 그냥 말만 전하는 거니까.”
발레포르는 가만히 생각했다. 사실 상관없었다. 들키든 말든 리아를 구해내고 그냥 다 뒤집어엎어 볼까 했었다. 들켜서 소멸한다 해도 그건 나중 일이었으니 딱히 와닿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자신을 위해 주는 리아의 마음이 좋았다. 악마라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예민하다면 모를까. 지금껏 이토록 자신을 생각해 주는 이가 또 있었을까. 다들 계약하자고 소원 들어달라고 난리나 부렸지.
어차피 나중에라도 일이 틀어지면 다 죽여 버리고 리아만 구하면 되는 거였다. 그러니 지금은 리아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자신이 정말 잘못돼서 소멸이라도 되면 그녀가 무척 슬퍼할 것 같았다.
리아가 슬픈 것은 싫었다. 발레포르는 알겠다며 리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으며 몰래 기운을 불어넣었다. 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도록.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싱긋 웃은 발레포르가 검은 연기가 되어 문틈으로 사라졌다.
흐린 밤이었다.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히 어두운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