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초조한 마음
왕궁에 도착한 지 정확히 일주일째 되는 날 발레포르는 댄의 몸에서 빠져나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는 허물어지는 댄의 몸을 챙겨 재운 후 비밀 공간에 숨겨 두었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군.”
수척해진 얼굴로 던컨이 중얼댔다. 밀실에 숨어든 지 벌써 5일째였다.
“인간들은 늘 의심이 많지.”
며칠간 함께한 탓인지 둘은 제법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해 준 이야기들은 전부 황당할 따름이다.”
“라이언 그 자식도 의심이 많긴 했는데 너만큼은 아니었다고.”
“미안하군.”
던컨이 까칠하게 수염이 돋아난 턱을 문지르며 사과하자 발레포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오빠가 낫네. 사과도 빠르고. 받아 주지. 나는 자비로운 악마니까.”
오빠라는 말에 던컨은 발레포르가 해 준 믿기 힘든 이야기를 떠올렸다. 천기누설 급이라며 절대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강조하며 풀어놓았던 과거.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니 다른 사람이 돼버린 것처럼 달라진 레오니의 모습이 납득갔다. 전부를 완벽하게 믿는 것은 아니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발레포르의 말들이 진실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어머니 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어머니, 동생 이름이 리아예요?”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네. 그냥…. 이 아이는 꼭 딸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서 태명을 리아라고 지었단다. 예쁘지?”
“리아…. 리아…. 네. 예뻐요. 정말 예뻐요. 저도 꼭 여동생이 태어나면 좋겠어요. 어머니 리아는 혹시 엘리시아에서 따온 이름인가요?”
“그래 맞아. 우리 아들 똑똑하기도 하지.”
리아. 리아. 리아.
라이언의 입에서도 몇 번이나 리아라는 이름이 흘러나왔었지.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레오니이면서 또한 자신의 동생이기도 한 아이. 던컨의 혼란스러움은 여전했다.
“그만 받아들여. 너도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
던컨은 답을 할 수 없었다.
“레오니는? 그 아이는?”
“남매가 어쩜 이리 똑같을까. 본인들 걱정이나 하라고. 레오니는 아주 평온하게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지금 태평하게 그런 질문이나 할 때야?”
발레포르의 질책 아닌 질책에 던컨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숨어 있는 그도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문을 열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겠지.”
밖에 있는 사람 중에 밀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라이언이 유일했다. 던컨은 마지막 순간 라이언에게 밀실을 열쇠인 왕의 반지를 넘기고 밀실 안에서 일주일 정도 버틸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직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라이언이 실패했다면 열린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리라.
“이 안에서 죽는 것이 엘리시아를 위한 길 일지도 모르지.”
용이 섬세하게 조각된 인장을 만지며 던컨이 중얼댔다. 모르긴 몰라도 바벨로프는 인장을 찾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왕위에 오르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신성함이 깃든 왕의 인장. 엘리시아의 왕을 상징하는 물건.
“그 죽는다는 말 좀 그만할 수 없어? 목숨 귀한 줄 알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 너 그냥 콱 죽어 버리면 나도 리아한테 죽는다고.”
“악마. 네가 악마라면 능력이 있지 않나? 저들을 다 쓸어 버릴 수는 없나?”
발레포르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리아나 그 오빠라는 작자나 하는 말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이러다가 또 능력이 뭐니 어쩌니 따지고 드는 건 아닌지 몰라.
“그 정도로 티 나게 인간사에 간섭할 수는 없어. 그냥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너 알아둬라.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 안 하는 거야.”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라이언이 널 이곳에 밀어 넣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역시, 그 말 왜 안 나오나 했다. 지금부터 이 몸이 보여 주지. 대놓고 끼어들 수는 없지만 살짝 비트는 것 정도는 가능해.”
발레포르는 댄의 몸에서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린 참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그 꼬마 녀석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나와버리고 싶었지만 리아를 떠올리며 꾹꾹 참았다. 아이의 몸으로도 힘을 쓸 수는 있지만 그러자면 밀실의 문을 열고 나가야만 했다. 그랬다가 일이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밀실을 들키는 것은 물론이요, 던컨의 생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어 버리니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댄의 몸에서 빠져나오기만 한다면 연기처럼 스며들어 밀실을 빠져나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무능한 왕아. 조그만 참고 있어. 혼자 죽어 버리거나 그러면 너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괴롭힐 거다. 그동안 좀 무능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잖아.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자. 응?”
무능하다는 말에 아니라고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 던컨은 자신이 무능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무능한 왕이지.”
“아이고 또 자학한다. 진짜 악마 팔자에 이게 무슨 짓이냐고. 인간 위로나 해 주고 있다니. 야 인간아. 진짜 무능한 게 뭔 줄 알아?”
던컨이 고개를 들어 발레포르를 쳐다봤다.
“와 진짜 저 눈동자 너무 닮았다니까. 맘 약해지니까 그만 쳐다봐!”
“진짜 무능한 게 뭐지?”
“포기하는 거.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희망이 있지. 넌 어쩔 거냐? 포기할 거냐?”
“그럴 리가.”
“좋네. 그럼 됐네. 내가 지금 악마로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리아랑 약속한 게 있으니 도와주마. 너 여기서 딱 기다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발레포르는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발레포르가 사라진 밀실은 적막이 감돌았다.
“희망이라. 참 기대되는 말이군.”
당장이래도 뛰쳐나가 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던컨은 눈을 감았다.
***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운 소리가 문밖을 맴돌았다. 철문이 과하게 덜컹이고 철컥댔다.
“문을 열려는 것 같아요.”
메리가 리아 앞을 막아서며 초조한 듯 손을 떨었다. 문이 열리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무서웠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리아는 아침에 한나에게 넬슨과 관련된 일들을 전부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절규했고 믿을 수 없다고 흐느꼈지만 아무리 그런다 한들 이미 벌어진 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물론 리아도 그런 한나의 마음을 이해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되도록 빨리 한나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찾아오기를 빌 뿐이었다.
두꺼운 철문이 덜컹이며 천천히 열렸다.
“레오니 공주.”
그리고 그 앞에 바벨로프가 서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처음 마주한 자리였다. 리아는 긴장을 누르며 그를 살폈다. 며칠 사이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까칠한 얼굴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날카로운 음성이 리아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바벨로프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있다면?”
“음식은 드실 만하십니까? 잠자리는 어떠십니까?”
바벨로프의 시선이 리아가 누웠던 침대를 음흉하게 훑으며 움직였다.
“음식도 잠자리도 전부 엉망이야. 언제까지 날 가둬 둘 셈이지?”
자연스레 반말을 내뱉는 리아를 보며 바벨로프가 웃음을 삼켰다. 볼수록 탐나는 여자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자신이 온 이유를 밝혔다.
“저야 물론 당장 풀어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은데 말이죠.”
“시간을 줄 필요도 없는데 헛수고했네. 그 몸으로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느라 다리가 후들댈 텐데. 좀 앉아서 쉬는 게 어때?”
“아직 건강합니다. 공주님 옆에 서도 하나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말이죠.”
바벨로프의 눈동자가 리아의 온몸을 훑어내렸다. 누가 봐도 눈치챌 만큼 그의 시선에는 욕망이 가득했다.
“제발 날 쳐다보지 말아 줄래? 역겨워 죽겠으니까.”
리아의 말에 바벨로프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 찾아온 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 공주를 탑 안에 가둬 두고 싶었으나 돌아가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여전히 던컨은 찾지 못했고 라이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갑자기 공격해올지 모를 상태였으니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계획대로 된 것이라고는 공주를 잡아 가둬 둔 것 하나였다.
더군다나 백성들은 베드포드 공작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측근들은 공주를 이용하라고 성화였다.
만약 거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일은 틀어졌고 남은 방법은 별로 없었다.
엘리시아의 공주 레오니가 악녀 에리스의 딸이라는 이야기를 퍼트려야만 했다. 그 사실이 백성들에게 알려진다면 전세는 뒤집힐 것이 뻔했다.
악녀 에리스의 딸에게 푹 빠진 베드포드 공작이 아내를 위해 반역을 일으켰다.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이미 공작의 아내 사랑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였으니 소문을 조금 더하는 것쯤은 어려운 것도 아니다.
“에리스의 딸.”
바벨로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리아는 몸을 굳혔다.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 한다.”
“무슨 말이지?”
“만약 백성들에게 네가 에리스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왕실의 권위와 네 남편의 입지는?”
리아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왕실이 레오니의 존재를 숨기고 에리스의 일을 함구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그 사실이 지금에 와서 밝혀진다면 백성들은 배신감을 느낄 것이 뻔했다.
그토록 두려움에 떨게 한 괴담의 주인공인 에리스가 실존 인물이고 그 딸이 엘리시아의 공주라니.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소문이 퍼지는 즉시 바벨로프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겠지.
“만약 네가 나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겠다. 네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말이지.”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왕이 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나를 갖고 싶은 거야.”
“둘 다. 나는 둘 다를 원한다.”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인생은 욕심껏 살아야지. 오늘 저녁까지 시간을 주겠다. 잘 생각해 봐.”
갑자기 리아 앞으로 다가온 바벨로프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턱을 톡 하고 건드렸다. 희번덕대는 바벨로프의 눈동자를 보며 리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꺼져.”
몸을 뒤로 빼며 리아가 소리쳤다.
“역시 에리스의 딸답군. 이따 다시 오겠다. 어차피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간에 너는 내 것이야.”
바벨로프가 떠나고 난 뒤 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벨로프의 더러운 시선도 끔찍했지만 더 무서웠던 것은 그가 데려온 병사들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싸늘한 눈동자.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곧바로 당겨질 것만 같은 팽팽한 활 시위와 같은 몸짓.
당당하게 소리쳤지만 무서웠다. 리아는 메리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메리.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잖아. 그는 내게 생각한 시간을 준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메리를 토닥이는 리아의 목소리가 몹시 가냘팠다.
라이언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던컨은 괜찮은 걸까? 발레포르 제발 대답을 해 주렴. 리아는 마음속으로 발레포르를 부르고 또 불렀다.